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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73화 (73/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73화

“하…….”

신화문과는 최소한 등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만큼 믿기 힘든 상황.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서로 절대적인 동맹 관계는 아닐지언정, 신뢰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통수를 친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배신감을 느끼기도 잠시.

우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에 감정적으로 확정 짓기보단 이성적으로 재검토를 했다.

‘진정하고 생각해 보자.’

만약 창고가 털렸다면 예상되는 방법은 2가지.

하나는 신화문주가 직접 들어오는 거고, 하나는 일염이가 창고의 물건을 하나씩 알려주는 거다.

‘일단 신화문주가 들어왔을 리는 없을 거야.’

아무리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인 무정검이라고 한들, 당가 또한 당기룡이 지키고 있는 곳.

마찬가지로 천하십대고수인 독왕이 있기에 신화문주가 당가에 드나들었다면 당기룡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신화문주가 내 창고를 털었다고 가정하면 당기룡의 묵인하에 벌어진 일이라는 이야기.

‘당기룡이 몰랐다면 모를까, 신뢰 관계라고 한들 정보 단체의 수장이 당가를 제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꼴을 두고 보진 않았을 거야.’

허나, 상식적으로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기에 기각했다.

당기룡이 말하길 무정검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한들, 못 알아차릴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나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한 명뿐.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일염이를 지긋이 보자, 일염이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정면을 본 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있지만, 전혀 고려하고 싶지 않아.’

창고에 도포된 특수형광물질의 존재를 아는 건 천일염뿐.

즉, 배신자가 있다면 일염이라는 소리였는데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순전히 우연일지도 모르고, 그저 장난일지도 모르지.’

예전에 일염이가 배신한 적이 한 번 있긴 했다.

그건 바로 만독연주가 날 납치했던 날에 돈 받고 팔아넘긴 것.

조금 짓궂은 장난이긴 했으나, 엄연히 내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었기에 배신이라 부르기도 뭐하긴 했다.

‘무슨 속셈이야?’

다시금 일염이를 빤히 바라보며 시선으로 묻자, 일염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나를 바라보더니 전음을 보냈다.

-인맥을 넓힐 수 있을 테니까 하시죠.

눈치도 빠른 편이고,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아는 평소와 달리, 엉뚱한 답변으로 일관하는 천일염.

대충 반응을 보아하니 상세히 말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잘 생각해 보면 배신할 거라면 굳이 이런 이상한 방법을 쓸 필요는 없지. 이게 네가 준비한 안배라면 어울려 줄게.’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자, 일염이가 준비한 게 말 그대로 인맥을 넓히기엔 적절한 임무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왜냐면 하나같이 명망 있는 인물들에게 은혜를 입힐 수 있는 일이었기에.

‘다만, 창고를 턴 건 도를 넘었어.’

허나, 도움이 된다고 해서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는 법.

내가 창고의 물품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면서 이런 일을 벌인 건 도저히 용서가 안 됐다.

“좋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공자님. 저희가 이래 봬도…….”

“단.”

평소라면 신화문주의 말을 끊는 일은 하지 않겠지만, 빈정 상한 상태라 안중에도 없이 내 말만 했다.

“신화문의 일이니 안내인 겸 호위를 붙여주십시오.”

“예? 호위를 말입니까?”

일염이가 있는데 호위가 왜 필요하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신화문주.

나는 그런 신화문주의 물음에 답하듯 일염이를 보고 말했다.

“넌 여기 있어.”

* * *

천일염을 집무실에 내버려 둔 채로 당지천이 집무실을 떠나가자, 혀를 차는 신화문주.

“이런…….”

잘 구슬리면 쉽게 받아들일 거란 예상과 달리, 어떤 부분에서인지 모르게 당지천의 의심을 사버리자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거지? 이거 완전히 버려진 강아지 신세가 되어버렸잖아.”

“아무래도 능력에 대한 확신이 의심을 샀나 보군.”

“왜? 당가주의 말은 지어낸 게 아니고 진짜였단 말이야.”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쓰는 신화문주.

당지천이 유능한 건 옛날 옛적부터 알았어도, 아무래도 30여 개 남짓한 서류는 양이 많았기에 당가주에게 가능한지 한번 물어봤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돌아온 답변은 ‘무조건 가능하다’라는 답변이었다.

“그 녀석은 지천이를 광적으로 추앙하는 팔불출인 녀석이다. 지천이에 관련된 걸 묻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지.”

“……물어볼 사람을 잘못 골랐네. 근데 애초에 공자님이 유능한 건 공자님도 잘 아시잖아. 분명 우리가 어떤 평가를 하고 있을지도 예측했을 텐데? 근데 왜 이러지?”

“그건 내 착오다.”

명백히 천일염은 당지천의 창고를 털지 않았다.

당지천이 자신한테 공개했다고 한들, 창고만큼은 자신에게 아주 귀중한 곳이라고 자주 말하는 만큼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리 의심이 많다고 한들, 창고를 털었다는 의심을 받을 줄은 몰랐다.”

허나, 지금 당지천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 창고를 털었다고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처음 계획을 세울 때 고려했어야 했나.’

그간 당지천과 지내면서 언뜻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물건들.

그게 창고에 있을 걸 예상하고 이번 계획을 세웠는데, 당지천이 자신을 의심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지금의 상황이 의외였다.

“아예 예상 못 한 거야?”

“전혀.”

“흐음.”

천일염이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하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신화문주.

그와 동시에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자, 천일염이 말했다.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다.”

“왜?”

“깊은 의심을 샀다면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의뢰를 받아들이진 않았을 거다. 적어도 받아들였다는 건 나에 대한 실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뿐, 아예 등을 돌린 건 아니다. 아마도 크게 실망했다고 시위하는 거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삿갓을 매만지며 책상 앞으로 움직인 천일염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 끝이 온다면, 이렇게 미리 거리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그러고는 당지천이 가져간 서류와 똑같은, 필사본을 챙긴 천일염이 집무실 문턱을 밟았다.

“그래야 덜 힘들 테니까.”

말을 마치고는 홀연히 사라지는 천일염.

당지천이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만, 기어코 뒤를 밟을 생각인듯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신화문주는…….

“흐음.”

여전히 의미심장한 얼굴로 천일염이 떠난 자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 * *

신화문에서의 꺼림직한 마음도 잠시.

잠시 전각에 들러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 와서 의뢰를 하나씩 해결하러 다니다 보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다들 은혜는 꼭 갚을 사람들처럼 보였지.’

인맥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거라던 일염의 말.

그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하나같이 예의를 알고, 사례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푸하하! 누, 눈이…… 눈이 달려 있어!”

……물론,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지만 말이다.

“하하하하! 이, 인상 쓰는 게 너무 웃겨!”

지금 날 가리키면서 도무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이 여인.

이 여인은 바로 환상혈창의 하나뿐인 손녀로, 과거 충격으로 인해 웃음을 잃었다고 했다.

“하으…… 배야. 죄송해요. 도무지 푸흡……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아닙니다. 웃으시라고 처방한 약입니다.”

물론, 지금은 내가 처방한 약(?) 때문에 실컷 웃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으…… 공자님 너무 웃기게 생기셨어요…… 푸흡.”

“하하하…… 제가 그래도 어디 가서 꿇리기는커녕 나름 잘생긴 편인데…….”

“하하하하! 맞아요! 잘생기셨어요!”

“……솔직히 말해보시죠. 사실 고의죠?”

“죄, 죄송해요! 푸핫!”

당황하면서도 도무지 참지 못했는지 웃음을 터뜨리는 여인.

어디까지나 약효 때문에 웃는 걸 알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더러웠다.

‘열 받네……. 이 얼굴이 어딜 봐서 웃기게 생겼단 말이야?’

옆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자, 똑같이 나를 보는 차가운 인상의 미공자.

옥면공자라고 부를 정도로 잘생긴 건 아니지만, 여자들의 환심을 사기엔 부족함이 없는.

그야말로 개연성을 가진 얼굴이었다.

‘전생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잘생겨진 수준이지.’

어렸을 때도 둥글둥글한 게 나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귀여운 얼굴이었는데, 커서 봐도 잘생긴 편이니 이 얼마나 축복받은 유전자인가.

그런데 이런 나의 귀한 얼굴을 보고 웃어?

“손녀의 무례에 대해선 내가 사과하겠네. 소선이가 대체 얼마 만에 웃는 건지…….”

심기가 뒤틀린 얼굴을 하자, 황급히 달려와서 사과하는 환상혈창.

그러면서도 깔깔깔 웃어대는 손녀를 감격스러운 얼굴로 보는 게 한때 강호에서 유명할 정도로 성깔이 더러운 사람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디까지나 고의가 아니라 약 때문이니까, 사과 안 하셔도 됩니다.”

아산화질소(N2O).

통칭 웃음 가스라고 불리는 이 가스는 흡입 시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웃음이 나게 하는 환각 물질.

소기(笑氣)라고도 불리며 한때 ‘해피벌룬’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도 유통됐다가 금지된 화학물질이다.

마약과 비슷한 효과를 내면서도 엄연히 마약은 아니었기에 휘핑크림을 만드는 등 식품첨가물로 쓰일 정도로 여기저기 많이 쓰였으나, 엄연히 부작용이 있는 물건이기에 결국은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던 물건이다.

“하하하하!”

“그런데 이거 부작용은 없는 건가?”

“단번에 많은 양을 들이켠다면 생길지도 모릅니다만, 이 정도 양이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현대에서 이런저런 부작용 때문에 금지됐다고 하나, 결국 현대의 이야기.

치사성이 극히 낮은 물건이라 무인에 한정한다면 부작용은 없다시피 했기에 환상혈창을 안심시키고, 아직도 웃음이 멎지 않는지 웃고 있는 여인을 방에 둔 채 밖으로 나왔다.

“아까 설명했다시피 마음의 병은 진작에 나은 듯하고, 순전히 얼굴 근육이 굳어서 그런 것이니 주기적으로 소기(笑氣) 처방하면서 얼굴 근육을 풀어주면 금방 자연스러운 웃음을 되찾으실 겁니다.”

“허어, 역시 위명이 자자한 뇌의의 제자답구나. 수많은 의원을 찾아가봤지만, 소선이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건 자네가 처음이었네.”

“아닙니다. 뇌의 님께는 어깨너머로 조금 배웠을 뿐이고, 지금은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도 실력이 없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지.”

겸손 떨지 않아도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면서 품에서 명패를 꺼내주는 환상혈창.

“약속했던 답례네. 이 노부가 가진 거라곤 비루한 몸 하나뿐이니 내 도움이 필요해지면 주저 없이 부르게나.”

목숨을 바쳐서라도 치료해 주고 싶은 손녀의 병이라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쉽게 명패를 내놓았다.

“감사합니다.”

환상혈창이 건네주는 명패를 조심히 받아 챙기고는 작별 인사를 한 뒤, 곧장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밖에서 짐을 든 채로 대기하던 신화문도가 다가와 서류를 내밀었다.

“아직 서류가 두 개 남긴 했는데, 두 명 다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가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이제 복귀하면 됩니까?”

“예, 문파로 돌아가시면 될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아싸, 퇴근이다.’

자고로 퇴근이란 언제 해도 좋은 법.

조금 힘들었지만, 퇴근 생각을 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런데…….

“공자님.”

신화문으로 복귀하려고 한 발자국 겨우 뗐을까.

바로 코앞에서 천일염이 대기하고 있었다.

“뭐야? 신화문에서 대기하랬잖아.”

“신화문에서 아주까리의 자생지를 알아 왔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서류 한 장을 내미는 천일염.

고개를 뻣뻣이 세운 채 묵묵히 서류를 들이밀고 있길래, 할 말 없냐는 듯 천일염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일전의 일은 죄송했습니다.”

“알면 됐어.”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오늘 일이 솔직히 도움이 안 됐던 건 아니었으니 쉽게 봐주기로 했다.

거기다. 일염이 녀석도 결국엔 좋은 마음으로 한 거였으니 훌훌 털고 말기로 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고,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은 진짜 피마자 구하러 가자.”

“알겠습니다.”

그렇게 일염이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

왠지 모르게 일염이의 입가엔 자세히 봐도 긴가민가할 정도의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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