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72화
신화문에 가기로 한 날 당일.
“하암.”
왠지 모르게 몰려오는 피로에 비몽사몽 한 채로 식탁에 앉자, 백호현과 장하가 인사를 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자님.”
“그래, 장하야 너도 잘 잤냐.”
“예, 공자님. 그런데 이제 장하가 아니라 당하입니다.”
“아, 그렇지 참.”
5년 전 일 때문에 당가에 들어오느라 바로 당 씨로 바꾼 백호현…… 아니, 당호현과 달리, 장하는 이번에 독학관에 입학하면서 성씨를 바꿨다.
그래서 지금은 당호현과 당하가 맞았다.
“호현이는 예전에 바꿔서 괜찮은데 당하는 아직 입에 안 붙네.”
“괜찮습니다. 사실 저도 아직 헷갈리거든요.”
막상 당하조차도 가끔 헷갈리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새삼스럽게 이렇게 보니까, 둘 다 되게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네.’
별다른 일이 없으면 매일 보긴 했는데 작았던 아이들이 어느새 이렇게 자라서 독학관에 다니는 걸 실감하게 되니 유독 낯선 느낌이었다.
“다들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어?”
공부 이야기가 나오자, 슬며시 눈을 피하는 당하와 그런 당하를 보고 미소 짓는 당호현.
반응을 보니 어쩔지 대충 예상이 가긴 했는데, 마침 밥을 가져오던 영하가 듣고는 예상 그대로의 답변을 해줬다.
“호현이는 머리가 비상해 입관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수재 소리를 들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만독연주님 밑에서 금전 관련된 일도 동시에 배우는 와중에 한 거니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비상했던 당호현.
겁이 많다는 약점이 있지만, 그 머리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에 독학관 입관 전에 예습을 시킬 때도 가히 빨아들이듯이 지식을 흡수했다.
거기다, 그 정도면 자만할 법도 하건만 내 도움이 되겠다며 쉬지도 않고 공부를 했다.
참으로 기특한 녀석이었다.
“반면에 당하는 필기 성적이 평범한 수준이지만, 무재가 꽤 있는지 실기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손재주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고 하긴 했다만, 어렸을 때 했던 배수 짓이 도움이 되는지 용독술만큼은 잘하던 당하.
머리는 썩 좋지 않아서 필기 점수는 낮지만, 실기를 잘하고 공부하려는 의지도 있으니 독학관은 충분히 졸업할 거다.
“둘 다 잘하고 있으면 다행이네. 독학관을 졸업할 때가 되면 내가 선물 하나씩 줄게.”
요즘은 내 코가 석 자라 관심을 못 가져주고 있음에도 알아서 잘하고 있는 둘.
둘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가주에게 받았던 선물이 떠올라 선물을 주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졸업할 때쯤엔 주력으로 쓸 만한 독 하나씩 챙겨주는 거지.’
아무리 여러 독과 암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당가라고 한들, 애용하는 독이나 암기가 있는 법.
다들 자신만의 특색 있는 물건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바로 여기.
산화베릴륨을 주 무기로 삼아 백독멸악이란 별호를 얻은 내가 있잖는가.
‘물론, 나는 황가에서 퍼뜨린 소문 덕이지만…….’
그건 대충 넘어가고.
어쨌든, 둘에게 줄 만한 독을 생각하다 보니 당하는 특색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곧장 떠올랐다.
‘역시 장하에겐 만테가지아눔어수리가 어울리겠지.’
만테가지아눔어수리.
국내에선 큰멧돼지풀로 불리는 이 식물은 주로 유럽과 미국, 캐나다 쪽에 서식하는 미나리과의 잡초다.
흔하게 볼 수 있으면서도 무려 2m에서 5.5m까지 자라기에 사람의 시야를 가리는 키 큰 풀.
그런데 문제는 고작 사람의 시야를 가리는 게 아니었으니…….
‘큰멧돼지풀이 성가신 건, 자외선을 받으면 독성화가 된다는 점이지.’
그건 바로 큰멧돼지풀의 분비물이 자외선을 받으면 독성화가 된다는 점이었다.
퓨라노쿠머린.
이는 큰멧돼지풀의 모든 부위에서 분비되는 광독성(光毒性) 물질로, 물질이 닿은 부위에 직접 자외선을 쐬게 되면 치명적인 손상을 일으킨다.
즉, 쉽게 이야기해서 바를 땐 모르다가, 자외선을 쐬면 독성화되는 독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구름이 낀 날에는 못 쓸 것 같지만…….’
햇빛에 자외선이 있어도 구름에 가려지면 소용없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자외선은 약해질지언정 구름을 투과하기에 정도의 차이일 뿐 언제든지 쓸 수 있었다.
……밤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차피 독은 하나만 쓰는 게 아니니 제약이 있다고 한들 문제가 될 건 없어. 오히려 제약이 있어도 장점이 명확한 독을 써야지.’
독기가 있는지 없는지 단박에 알 수 있는 무인들.
당연히 당가의 사람을 보면 독에 대해 더 경계하는 만큼 쉽게 이기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독성화 과정을 거치는, 일정한 조건을 만족하기 전까진 평범한 물질로 위장한 독이 있다면?
‘더 볼 것도 없지.’
유용한 건 당연하고 만약 특성을 유지한 채 다른 독과 혼합할 수 있다면 필시 강력한 독이 될 게 분명했다.
거기다, 나중에 당하가 강한 자외선을 내뿜는 물건을 찾게 된다면 밤에도 사용할 수 있게 될 거다.
‘뭐, 그것도 구해야지 가능한 일이지만.’
흔하다고는 하나, 큰멧돼지풀은 서양에서만 자생하는 만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씨앗만 구하면 재배할 수 있고, 잡초인 만큼 쉽게 자라기에 전문 지식이 없어도 재배가 가능하다는 점.
그러니 구할 수만 있다면 당하에게 줘야겠다.
‘그리고 호현이에게는…….’
당하와 같이 눈에 띄는 특징은 없는 당호현.
딱히 정해진 색깔 없이 순전히 머리만 좋은 쪽에 속하기에 특색 있는 걸 주기엔 힘들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확신이 섰다.
‘화학을 가르치자.’
당호현에게 현대 화학을 가르치자고.
“선물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그동안 형님께 받은 은혜가 얼만데 그런 걸 받겠습니까.”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그냥 받아.”
“……감사합니다.”
송구스럽다는 듯 감사를 표하는 당호현.
원래라면 화학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칠 생각은 없었지만, 그간 당호현을 봐오니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가르쳐 줄 의향이 생겼다.
“형님의 기대에 누가 되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기대할게.”
물론, 아직은 시기상조지만 말이다.
* * *
식사를 마치자마자 일염이를 대동한 채 찾아온 신화문.
신화문주가 부른다고 해도 별거 없을 거라 생각해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막상 듣게 된 건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예? 저보고 이 많은 걸 처리하라는 겁니까?”
그건 바로 책상 앞에 놓인 서른 개 남짓한 서류들.
여기 적힌 임무들을 나보고 처리하라는 거다.
“에이, 많다니요. 고작 서른 개 언저리잖아요. 공자님이라면 하루 이틀이면 처리할 일입니다.”
“아니, 서른 개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제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해결합니까? 애초에 이런 건 정보원들이 하는 거잖습니까.”
내가 신화문에 요구했던 건 피마자가 열리는 식물, 아주까리의 자생지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한 것뿐이다.
길바닥에 굴러다니진 않지만, 흔한만큼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정보.
그만큼 대가가 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이렇게 많은 일을 줘버리니 황당하기 짝에 없었다.
“아이 참, 우리 애들로 안 되니까 공자님을 부른 거죠. 그리고 당연히 공짜로 해달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아니, 그래도…….”
신화문주랑 연을 쌓으면 쌓을수록 좋은 건 이쪽.
이런 의뢰가 있으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인맥을 쌓는 것이 엄연히 맞는 행동이고 평소에도 그렇게 하긴 했다.
허나, 지금은 그때와 다른 상황으로 시간이 금이었다.
“지금 공자님은 누군가에게 노려지고 있잖습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맘 편히 돌아다니는 걸 보면 잠깐이나마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어서겠죠?”
하지만 신화문주는 그런 상황조차도 진즉에 알고 있었는지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것도 결국 잠시뿐. 당분간은 가문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텐데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평소라면 몰라도 현재 어딘지 모를 조직에 노려지고 있는 당가.
자연히 무언가를 구하려고 할 때마다 방해를 받는 실정이었고, 아마도 내가 가문 안에 틀어박힌다면 나 또한 그런 방해를 받을 게 분명했다.
만독연의 연구원들에게 심부름을 시킨다고 한들, 피해가 없을 순 없는 상황.
그렇기에 피해를 감수하고 인원들을 내보내거나, 혹은 외부 수급을 포기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태인데, 만약 신화문을 통해 수급한다면?
‘나쁘지 않아.’
대놓고 움직인다고 한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그들의 특성상 정보 단체인 신화문과 척을 지는 건 부담되는 일일 거다.
신화문에서 작정하고 캐려 한다면 정체가 드러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쪽의 피해도 없을 테고, 위험부담은 신화문이 전부 짊어지는, 이상적인 상황이 되는 거다.
“조건 자체는 괜찮습니다만, 서른 개는 너무 많습니다.”
“이상하군요. 저희가 공자님을 과대평가했을 리는 없는데요?”
그래도 역시 서른 개는 너무 많아서 고개를 젓자, 당연히 할 수 있지 않냐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 신화문주.
나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높은 건지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지 않냐는 듯 서류를 들고 흔들었다.
“거기다. 당가주님께 문의드렸을 때도, 뭐든지 충분히 가능하다고 단언했는데요?”
“예?”
‘그 가주가 가능하다고 단언했다라…… 그렇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닌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이건 너무 많지.’
빈말하지 않는 당가주라면 객관적인 판단을 했을 터, 문제 자체는 충분히 해결할 만할 거다.
그러나 문제는 양.
설령 화학이나 독과 관련된 문제라도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 최소한의 시간이 걸리는 만큼 서른 개는 무리였다.
……미리 준비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아, 간단한 물건 전달이라면 모를까 서른 개를 어떻게 하루 이틀만에 처리합니까.”
그렇기에 보란듯이 한숨을 쉬며 신화문주의 손에 들린 서류를 건네받아 살폈다.
그런데…….
‘뭐야?’
서류를 찬찬히 읽어보자, 예상외로 금방 해결 가능한 의뢰 내용.
‘분명 이거라면 쉽게 하겠지. 창고에 있는 걸 꺼내 오면 되니까. 근데…… 우연인가?’
갑자기 온몸을 지배하는 위화감.
단순히 우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함을 느낀 즉시 내 몸은 다른 서류를 들어서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이것도? 그럼 다른 건…… 이것도?’
그렇게 서류를 점점 살필수록 우연으로 치부했던 것이 확신으로 변하고, 위화감은 오히려 사그라지고 있었다.
왜냐면 지금 내가 읽은 모든 서류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건 바로…….
‘창고가 털렸어?’
창고에 미리 준비해 둔 물건들로 해결 가능하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