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70화
리신(Ricin).
아주까리의 씨앗인 피마자(蓖麻子)에서 추출되는 물질로 피마자는 성인 남성이 4알만 먹어도 치사량에 이를 정도로 강력한 독성을 자랑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피마자인 상태는 정제된 것이 아니기에 독성이 약한 상태.
리신만 추출한다면 반수 치사량이 청산가리와 똑같은 1㎎/㎏이 된다.
‘그 정도만 되어도 극독에 턱걸이할 수 있지만…….’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 하나.
그건 바로 리신이 음독하면 독성이 약해지는 단백질성 독극물 중 하나라는 점이었다.
‘리신은 음독이 아니라 호흡이나 혈관에 직접 주입하면 33배나 강해지니까 말이지.’
경구 투입이 아닐 경우 반수 치사량이 무려 33배 강한 30μg/㎏(0.030㎎/㎏)이라는 괴랄한 수치를 자랑하는 리신.
2.1㎎이면 70㎏인 성인 남성조차도 죽일 정도로 치명적인 독이었기에 현대에서는 암살용으로 많이 쓰이고, 그만큼 유명세를 떨치는 극독이다.
‘물론, 열기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어서 독무로 적합하지는 않을 수도 있어.’
현대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치명적인 독인 만큼 독가스로 써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열기에 약하다는 단백독의 특성상 독가스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취약점은 중원에서도 마찬가지.
화기로 살포하지 않기에 곧장 독성이 약해지진 않아도, 내기로 태우거나 염공(炎功)을 쓰는 상대한테는 통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건 혼합독으로 극복 가능해.’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단독으로 썼을 때의 이야기.
리신을 활용해 혼합독 제조에 성공하게 된다면 그런 단점도 충분히 상쇄할 수 있을 거다.
‘거기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강한 독인 건 변함없으니 다른 용도로 쓰면 그만이야.’
무엇보다 리신은 강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독.
정제하는 과정이 까다로워서 그렇지, 만들기만 한다면 어떤 용도로든 도움이 될 거다.
“공자님.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벼락이라도 맞은 듯 한참을 가만히 서 있자, 걱정되는지 안색을 살피는 만독연주.
“볼일이 끝났으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허나, 난 그런 걱정에 답할 새도 없이 부리나케 강당을 벗어났다.
* * *
강당을 벗어나 도착한 곳은 만독연의 독을 관리하는 곳.
주로 연구에 필요한 독이 있을 때 방문하게 되는 곳으로 내주지 않는 독은 있어도 없는 독은 없는 곳이었다.
“예?! 피마자가 없단 말입니까?!”
그러나 지금.
눈앞의 독지기는 내어줄 수 있는 피마자가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공자님. 피마자를 관리하던 인원의 관리부실로 인해, 피마자가 전부 말라 죽어버리는 바람에 내어드릴 피마자가 없습니다.”
“그런…….”
만독연에서 독을 관리하는 독지기들.
비록, 이들이 연구원들에 비하면 뒤처지는 실력이라고 해도 극독 또한 다뤄야 했기에 어중이떠중이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순전히 관리부실로 피마자를 전부 잃었다니?
‘설마 당군성이 이것도 예상하고?’
독지기에게 독을 못 받은 건 이번이 두 번째.
언제였는지 자세히 기억 안 날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지만, 분명 5년 전에 한 번 이랬던 적이 있었기에 당군성을 의심했다.
‘그럴 리가.’
허나, 그것도 잠시.
피마자는 어디까지나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거다.
당군성이 독심술이라도 쓰는 게 아니면 알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거기다, 피마자는 독성이 강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희귀하지도 않았으니 만독연에서 찬밥 신세였을 거다.
당연히 경력 없는 신입이 맡을 만큼 중요도가 낮았을 테고, 그러니 관리부실이 일어났다고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혹시 따로 모아둔 것도 없습니까?”
“죄송하지만 따로 모아둔 것도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피마자는 쉽게 구할 수 있기도 하고, 약으로 쓸 수 있어서 대부분 채취하면 바로 의약당으로 보냅니다. 크게 쓸모 있진 않습니다만, 어차피 따로 쓸 곳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흔해 빠진 거라 보관도 안 했다는 말.
심지어 채취한 것마저 의약당으로 보내놨다고 한다.
“그럼 언제쯤 복구가 되겠습니까?”
“제초제로 쓰이는 독을 부어버린 탓에 아주까리가 전부 죽어버려서 근 시일 내로는 힘듭니다. 급하신 거라면 인원을 몇 명 추려서 피마자를 채취해 오게 하겠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독이라도 엄연히 자신들의 탓이기에 찾아주겠다는 독지기.
마음 같아선 당연히 그렇게 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다.”
왜냐면 지금처럼 당가가 이곳저곳에서 견제받는 상황에서 괜히 피마자를 찾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게 좋으니까 말이다.
‘독은 숨길수록 강해지니까 말이야.’
그리고 아까 언급했듯이 피마자는 흔하다.
지천에 널려서 발치에 치일 정도는 아니어도, 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연구하기엔 부족함 없는 양을 구할 수 있을 거다.
‘근데 생각해 보니 어딘지도 모를 조직에서 내 목을 노리고 있잖아?’
생각해 보니 광창신투의 비동에서 죽을 뻔했던 나다.
진법이야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있어도, 광랑은 확실히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던 상황.
그럼 지금도 날 죽이려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옳지 않을까?
‘쓰읍, 그냥 나가지 말고 천열운무보나 익히고 있을까?’
번뜩 떠오른 생각이기에 급하게 피마자를 찾으러 온 거지, 급하게 쓸 물건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연구를 마친다고 해도 써먹기도 어려울 게 분명하니 맘 편히 나중으로 미뤄놓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으로 보였다.
‘별수 없네. 포기하자.’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있으면 모를까.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기에 순순히 집으로 돌아가서 천열운무보를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다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오랜만이구나, 지천아.”
“형님?”
그건 다름 아닌 맏형인 당지독의 목소리였다.
“아니,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와봤다.”
나를?
왜?
“혹시 시간 괜찮다면 잠시 나랑 차나 한잔하자꾸나.”
갑작스러운 차 권유에 도대체 무슨 용건일까 싶어 곰곰이 생각해 봐도 마땅한 답안이 나오지 않는 상황.
애초에 당지독과는 경쟁 관계이기는 하나 서로 죽일 사이도 아니었고, 수작질 부리기 좋아하는 당지혁과 달리 공정한 경쟁을 하기에 접점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잠시 대화를 나누자는 게 어떤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해코지하진 않을 거란 판단에 흔쾌히 따라가기로 했다.
“가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줘서 고맙다.”
제안을 승낙하자 잔잔한 미소를 머금는 당지독.
행여나 마음이 바뀔까 싶었는지 별다른 말도 없이 곧장 전각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 * *
당지천이 당지독과 함께 전각으로 향하던 시각.
천일염과 신화문주는 집무실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성도 외곽, 환상혈창(幻像血槍), 과거 충격으로 인해 웃음을 잃는 손녀랑 단둘이 살고 있음.”
“가져와.”
가져오라는 말에 서류를 천일염의 앞에 올려놓는 신화문주.
지금까지 총 몇 개를 추렸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30여 장에 달하는 서류가 천일염의 앞에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더 있지 않나?”
“은혜를 입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갚는 녀석들은 이게 끝.”
신화문주는 서류가 가득한 서랍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서 더 추리려면 추릴 수 있긴 한데, 효율이 좋지 못해…… 아니, 오히려 나중에 인연이랍시고 도움을 달라고 할 녀석들이 태반이야.”
“그렇다면 배제하는 게 낫겠군.”
배제하기로 결정하자, 곧장 환상혈창의 정보가 담긴 서류로 눈을 돌리는 천일염.
신화문주는 그런 천일염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무리 공자님이 사랑스러워도 그렇지, 이렇게 다급하게 인맥을 만들어줄 이유가 있어?”
오늘도 평화롭게 집무실에서 일하던 신화문주.
예와 다름없는 평탄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천일염의 방문에 지금까지 쉬지도 못하고 일하고 있었다.
……당지천에게 인맥을 만들어주겠다는 천일염 때문에 말이다.
“…….”
신화문주의 물음에도 천일염은 무표정한 눈으로 서류만 바라보고 있자, 신화문주는 눈웃음을 짓더니 천일염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한 번 더 물었다.
“혹시 정이라도 생겼다든가?”
‘정’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천일염이 무표정한 눈으로 신화문주를 바라보더니 다시금 서류를 쳐다보며 말했다.
“순전히 벌충이다.”
“벌충?”
“너도 알지 않느냐. 이제는 정말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그렇긴 하지. 그래서 가기 전에 선물이라도 주려고 하는 거야?”
“아니.”
신화문주의 물음을 단호히 부정한 천일염이 왼손으로 삿갓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연이 다해 결국 끝이 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때의 이야기. 난 아직 호위다.”
“그럼 비동에서 있던 일 때문에?”
“맞다. 지키는 자가 지키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니 그에 대한 보상을 주는 것뿐이다.”
마치 지키지 못했으니 보상을 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천일염.
신화문주로서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워낙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많이 하는 터라, 딱히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류를 바라보던 천일염이 말을 마치자마자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검토는 끝났다. 이대로 진행해라.”
천일염이 서류를 정리하고 곧장 집무실을 떠나자, 생글생글 눈웃음을 짓고 있던 신화문주의 눈에서 웃음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역시 극복은 요원한 일이었나. 그나마 오래 버티긴 했지.”
한탄스럽다는 듯 말하는 신화문주.
허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어쩌면 천설화가 있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군. 뭐, 이미 10년도 더 된 이야기를 해봤자 의미가 없긴 한가.”
집무실 책상으로 이동한 신화문주가 책상에 고이 보관된 서류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건 다름 아닌 천일염의 서류.
천일염 특유의 감정 없는 눈이 잘 묘사된 초상화와 함께 천일염의 진짜 행적이 적힌 서류였다.
“그래도 공자님 곁에서 그렇게 오래 버틴 걸 보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하긴, 이것도 결국 천설화의 그림자를 봤을 뿐이구나.”
처음의 초상화부터 마지막 행적까지.
서류를 찬찬히 살펴보던 신화문주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다음으로 집무실 오른편에 걸린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기에 그 누구보다도 기대했건만, 결국 끝은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구나.”
그 거울 속에 비친 신화문주의 눈은…….
“다음은 내 차례인가.”
그림 속 천일염과 같은.
이상하리만치 공허한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