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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68화 (68/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68화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다음 날.

개인 연무장에서 운기를 마치자, 몰려오는 탈력감.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몸살이라도 났는지 몸을 엄습하는 오한에 도저히 수련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어제는 정말 위험했지…….’

복기해 보는 광랑과의 전투.

실상 전투라고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끝났지만, 솔직히 비동에서 운 좋게 속밀독봉과 주사를 얻은 것이 아니었다면 십중팔구 이렇게 사지육신 멀쩡히 돌아오진 못했을 거다.

‘당가에 수작을 걸어오는 놈들이 있는 건 알았지만, 날 표적으로 삼을 줄이야.’

유명하다고도, 그렇다고 무력이 뛰어나다고 보기 힘든 무인 광랑.

허나, 실력은 상대적인 것으로 나 하나 상대하기엔 충분했다.

그러니 내가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게 아니겠는가.

‘처음에 도망쳤을 때 가망이 없었으면 동귀어진을 각오해야 했을 거야.’

광랑을 따돌리느라 산화베릴륨을 펑펑 쓴 상황.

막다른 길이었기에 더는 도망갈 곳도 없으니 농성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천일염과 남궁공자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혼합독을 들고 다닐 순 없으니…….’

혼합독은 서로 얽힐 때 더 강력해진다.

광랑조차도 일각은커녕, 반 각도 못 버틴 걸 보면 감이 오지 않는가.

광랑을 상대할 때야 남궁예화에게 명패를 주고 잠시 썼다지만, 만약 여러 명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중독될 거다.

베릴륨과 달리 해독제를 건네주기도 전에 사망하는 건 당연지사.

거기다. 수은을 쓰려면 증기 상태로 써야 하는데, 내가 삼매진화를 쓸 수 있다면 모를까, 적이 눈앞에 있을 때 한가하게 주사를 태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처음엔 동귀어진 목적으로 액체형으로 들고 다니려다가 포기했지.’

자고로 당가의 무인에게는 동귀어진 용도로 들고 다니는 독이 하나씩 있는 법.

나 또한, 혼합독을 항상 쓸 수 없어도 동귀어진용으로 쓰려고 두 개를 미리 섞고 액체 상태로 들고 다니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으니까.’

통제 못 하는 걸 넘어서 목숨의 위협을 느꼈기에 포기했다.

처음에 혼합독을 처음 먹었을 때, 생각보다 배는 강한 독기 탓에 만독연주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골로 갈 뻔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계기로 인해 내성을 키웠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증기 정도를 버틸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고, 무엇보다 수은은 인지능력을 부수는 독.

아무리 내가 어느 정도 내성을 가졌고 해독을 할 수 있다고 한들,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독기를 느껴 해독하려는 순간.

이미 나는 죽어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아예 불침(不侵)이 아니라면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다.

‘독 말고 무공의 비중을 높여야 해.’

그렇기에 귀결되는 답은 하나.

그건 바로 무공 실력을 좀 더 키우는 거다.

독으로 안 된다면 순수한 무공 실력만으로 광랑을 잡을 정도면 해결되는 문제.

단순히 시간을 끄는 수준이 아니라, 독 없이도 이길 정도가 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독을 배제하겠다는 건 아니야.’

물론, 독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당가의 사람임을 떠나서 화학자가 독을 안 쓰면 대체 뭘 쓰겠는가.

단지, 여태껏 벽을 넘으려고 이래저래 노력해 봤지만, 결국 독을 주로 쓰다 보니까 한계를 느꼈다.

‘독을 얼마나 준비하더라도 본 실력이 부족하다면 버티지도 못하니까.’

준비되지 않은 상황은 치명적이고, 준비되었다고 하더라도 독은 소모품이다.

아무리 당가의 사람이라고 한들, 모든 독을 들고 다닐 순 없다.

자신의 애병 하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다른 무인들과 달리, 암기까지 들고 다녀야 했으니 여유가 없었다.

‘뭐, 인벤토리나 아공간 주머니 같은 게 있으면 정말 좋을 거 같지만…….’

판타지도 아닌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있겠는가.

어쨌든, 요번에 광랑을 상대하면서 독만으로 무인들을 상대하는데 한계를 실감했고, 변해야 함을 느꼈다.

설령 오늘 당장 벽을 부순다고 하더라도, 독에만 의존하게 된다면 어제 일이 반복될 게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하아.”

명확한 판단이 서자, 절로 나오는 한숨.

솔직히 그간 예상은 했었지만, 실제로 와닿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누가 몰라서 안 했냐고. 억울하다, 억울해.”

아무리 독을 좋아하고 독을 잘 다룬다고 한들, 엄연히 무인.

당연히 무공에 대한 미련이 없을 리가 없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거기다. 지금 내 내공이 무려 1갑자.

독을 음독하면 음독할수록 강해지기에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 되어 있는 당가에서도 유별나게 특출난 속도다.

물론, 그 부작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사람이 적긴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다음의 이야기.

지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보통 남들은 이 정도 수준만 되면 자연히 깨달음을 얻는데, 나는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인지 깨달음이 찾아오긴커녕, 작은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젠 희망이 있으니 다행이지.”

하지만 그것도 결국 어제까지의 이야기.

지금 내 손에는 비동에서 구해 온 천열운무보가 들려 있었다.

천열운무보.

비동에서 얻은 상승무공으로 한 보, 한 보 내디딜 때마다 천둥소리와 함께 운무가 퍼지는 보법.

모두가 광창신투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어도, 그 누구도 광창신투를 붙잡을 수 없게 만든 절세의 무공.

이걸 내가 익힌다면 어쩌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물론 안 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걸 제하더라도 무조건 익혀야지.’

광창신투 본연의 실력도 있겠지만,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만큼 상승무공일 게 분명한 천열운무보.

그냥 놔둬도 강하기 짝에 없는데, 만약 뿜어져 나오는 운무도 독무로 개량한다면?

심지어 그게 무색무취의 독이라면?

‘아주 그냥 끝장나는 거지.’

무공의 개량이 쉬운 일이 아니고, 상승무공일수록 더더욱이 힘든 일이기에 머나먼 미래의 일이 되겠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절로 났다.

“자, 그럼…….”

이제는 잡념도 털어냈겠다.

처음으로 상승무공을 익힌다는 고양감에 들뜬 채로 첫 장을 넘기려는 그 순간…….

“공자님.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

“예, 곧장 오시랍니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비급을 도로 닫을 수밖에 없었다.

* * *

당지천이 가주전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시각.

가주전에서는 당기룡과 만독연주가 대면하고 있었다.

“……그러면 실상 아미와 청성만이 기연을 얻은 것이 아니고, 공자님도 기연을 얻으셨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다.”

“허어, 솔직히 일말의 가망도 없이 체면치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정말, 정말 대단하군요.”

만독연주가 감탄을 연발하며 당지천을 칭찬하자, 당기룡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한껏 고개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지천이잖느냐.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라면 모를까, 지천이 수준에서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거다.”

마치 당지천을 보낸 그 순간부터 예정된 결과라는 듯 말하는 당기룡.

누가 팔불출 아니랄까 봐 만독연주를 앞에 두고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뭐, 물론 도가 지나치긴 했어도 당지천이 한 일이 대단하고 생각하는 건 만독연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6장로님의 연구가 도움이 되었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공자님의 위명이 사천에 자자하다고는 하나, 광랑에 비하면 아직 부족한 수준이었잖습니까.”

언뜻 보면 종이 한 장 차이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간극은 결코 좁지 않았다.

그런데도 당지천이 스스로 광랑을 이겨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쯧쯧, 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지천이를 모르는구나. 하긴, 과소평가하는 것을 알아차려 평가를 수정할 때쯤이면 이미 지천이는 또다시 그 평가 위에 있지. 그러니 지천이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그 그림자를 쫓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맹목 없는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했던가.

만독연주 앞에서도 당연하다는 듯 당지천의 찬양하는 당기룡.

처음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노골적인 모습이었으나, 만독연주도 5년이나 봐왔던 터라 이제는 익숙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지.’

그래서 그것보다는 당지천이 상승 무공을 얻었다는 사실이 더 신경 쓰였다.

“그런데 가주님. 결국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면 공자님이 처음 얻은 상승무공이 당가의 것이 아니잖습니까? 깨달음을 얻기 전에 상승무공을 주면 기초무공들이 도외시된다고 금하셨는데, 공자님이 다른 무공을 익히시느라 당가의 무공을 외면하는 게 아닐까 두렵습니다.”

“하하하.”

걱정할 만한 질문을 했음에도 호탕한 웃음을 흘리는 당기룡.

별 시답지 않은 걱정을 다 한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자세히 말해주기 힘들지만, 엄연히 이번이 두 번째다. 거기다. 보면 알지 않느냐. 지천이는 그런 우리의 생각과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다. 고작 그런 조잡한 무공 하난 던져줬다고 독을 등한시하기에는…….”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당지천에 대한 칭찬.

만독연주가 옛날이었으면 굽신거리며 한참을 듣고 있었을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당기룡에게 적응한 만독연주였기에 곧바로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잘 아시면 직접 칭찬 한마디 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

당유철의 한마디에 곧장 닫히는 당기룡의 입.

언제 쉴 새 없이 떠들었냐는 듯이 철옹성처럼 잠겨 버렸다.

‘하여간 부끄럼쟁이 같으니라고.’

당기룡이 당지천을 본격적으로 밀어주기 시작한 게 5년째.

솔직히 이쯤 되면 서로 허물없이 지낼 법도 하건만, 무려 5년이나 지났음에도 관계에 진전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체통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면 자식 교육에 좋지 않다.”

“칭찬 명목으로 돈은 꼬박꼬박 주시잖습니까. 거기다, 이게 작은 일로 치부할 일인가 싶습니다.”

“…….”

당유철의 반박에 다시금 말문이 막힌 당기룡.

만독연주의 주장이 하나같이 맞는 말임을 알기에 차마 반박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흐음…… 이런, 지천이가 예상보다 빨리 오는구나.”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당지천이 오고 있음을 느낀 당기룡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변을 정리하고는 근엄한 얼굴로 돌아왔다.

“들어와라.”

당기룡의 허락에 다소 언짢은 얼굴로 집무실로 들어오는 당지천.

자신의 아버지이자, 가주인 당기룡의 앞에선 표정 관리를 하고 예를 취하는 게 맞는 행동인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그리고 그런 당지천을 본 당기룡은…….

‘역시 나를 두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구나. 암, 당연하지. 비록 새끼라고 할지언정, 어찌 용이 호랑이 앞에서 고개를 숙일까.’

당연하게도 당지천에 대한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물론, 당지천에겐 내색할 수 없는 속내였기에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용건을 말했다.

“만독연에서 몇몇 독이 독성이 줄어드는 일이 발생했다. 가서 해결해라. 나머진 만독연주가 자세히 설명해 줄 것이다.”

당기룡은 격공섭물을 펼쳐 관련 보고서를 당지천에게 건네주고는 관심 없다는 듯 이미 처리한 서류에 시선을 내리깔며 축객령을 내렸다.

“…….”

당기룡이 이러는 것도 익숙한 일이었기에 당지천은 눈대중으로 서류를 살피고 당유철을 쳐다봤다.

아마도 시간 낭비하지 말고 바로 가자는 뜻일 거다.

당지천이 곧장 나갈 걸 알기에 서류를 보며 잠시 기다리려는 찰나.

문득 당기룡의 머릿속에선 당유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잘 아시면 직접 칭찬 한마디 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확실히 고생한 만큼 공로를 치하해 주는 것이 가주로서 맞는 행동이다.

다만, 당기룡이 그간 그러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낯간지러운 걸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

유독 당지천에게는 직접 칭찬 한마디 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꼭 칭찬해 줘야 한다.’

자신의 명령 때문에 잠깐이나마 목숨이 위태로웠던 당지천.

그 역경을 쉽게 헤쳐 나갔다고 한들, 한때 위험했단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기에 꼭 칭찬해 줘야만 했다.

그렇기에 결심이 선 당기룡은 책상 아래 숨긴 왼손을 덜덜 떨면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나가려던 순간 입을 열자, 꽂히는 당지천의 시선.

당기룡에게는 그 시선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압박감이 심한 시선이었지만, 이미 결심한 만큼 꿋꿋이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고생 많았다.”

“가, 감사합니다.”

떨떠름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숙이는 당지천.

그걸 본 당기룡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류로 시선을 옮겼지만…….

“그럼 가보거라.”

입가엔 차마 숨기지 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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