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67화
기연이 숨겨져 있던 비동에서 벗어나 얼마나 달렸을까.
“이쯤 왔으면 안전할 것 같군요.”
한창 소란스러운 발굴 지역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안전거리가 확보되자, 우리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아이고 삭신이야. 죽다 살았네.”
쉴 틈 없이 긴장했던 탓일까.
근처 바위에 걸터앉자마자 곡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고, 그 탓인지 남궁공자는 곧장 내 상태를 살폈다.
“광랑을 홀로 물리친 것치고는 상태가 용하구나. 숨겨놓은 한 수라도 쓴 것이더냐?”
“예, 숨겨놓은 수를 쓰긴 했죠.”
“호오.”
“그걸 쓰려면 주사가 필요했기에 뇌의 님이 주사를 싹 쓸어가셨으면 반항도 못 해보고 비명횡사할 뻔했습니다만, 다행히 어느 분 덕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 그렇구나.”
힐난하는 눈으로 남궁공자를 올려다봄에도 설설 눈을 피하는 남궁공자.
내가 광랑에게 당했으면 자연히 다음 차례는 남궁예화였다는 걸 알기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뭐, 상황이 뇌의 님 탓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죠.”
솔직히 사람을 날려 보내는 진법 같은 게 있을 줄 남궁공자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게 다 불의의 사고니 순전히 천재지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것보다는…….”
그리고 그것보다 궁금한 건 신화문주가 왜 있냐는 거다.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왔다면 우리보다는 당연히 대문파의 뒤꽁무니를 쫓거나 홀로 움직이는 게 훨씬 나을 텐데, 대체 왜 일염이와 같이 있단 말인가?
“신……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신화문주를 언급하려다 남궁예화도 있음을 깨닫고 급히 말을 삼키자, 신화문주는 남궁예화는 딱히 상관없다는 듯 눈치를 한번 보내고 대답했다.
“공자님이 걱정돼서 와봤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의뭉스러운 눈으로 신화문주를 쳐다보자, 신화문주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휴, 제가 아무리 냉혈한이라고 소문이 났다고 해도, 우리 공자님이 장보도 있는 곳으로 갔다니 신경이 쓰여서 말이죠. 노심초사하며 기다리지 못해서 찾으러 온 거죠.”
무정검이라 불리는 신화문주가 퍽이나 그러시겠다.
아무리 그동안 많은 신뢰 관계를 쌓아왔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조금 양보해 줬을 뿐 무료봉사해 주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군요.”
다시금 의뭉스러운 눈으로 신화문주를 쳐다보자, 신화문주는 휘파람을 두어 번 불더니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미와 청성에서 각각 기연을 얻었다고 하지 뭐예요? 아이고 안타까워라. 혹시 몰라서 다른 기연이 있을까 싶어서 비동을 혼자 탐사해 보기로 했는데 나오라는 기연은 안 나오고 이 친구가 나오는 거 있죠?”
정보 캐려 왔다가, 기연이라도 찾아볼까 했는데 천일염을 만나서 어쩔 수 없이 합류했다는 이야기.
그걸 이야기하면서 신화문주는 퍽이나 안타깝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복면에 가려져 눈밖에 안 보이는데도 표정이 저리 잘 보이는 걸 보면 감정 표현이 참 특출난 사람 같았다.
그렇게 신화문주가 얼마나 울상을 짓고 있었을까.
“그런데 공자님…….”
신화문주가 반격하듯 갑자기 눈가를 좁히며 내게 물었다.
“아까 공동을 보면 공자님도 아주 맛있는 걸 잡수신 것 같은데, 제 입이 좀 근질근질하네요. 제가 참을성이 부족해서 이렇게 근질근질하면 저도 못 참고 어디 가서 소문낼지도 모르겠어요.”
“…….”
“그냥 뭘 얻으셨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살짝 귀띔만 해주시죠.”
말 안 해주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겠다는 협박.
강압적이진 않지만, 성능 좋은 협박에 나는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비급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천열운무보입니다.”
솔직히 비급을 얻은 건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
허나, 사실 신화문주는 반쯤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왜냐면 이 장보도가 진짜라고 판명한 것은 다름 아닌 신화문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마 내게 이러는 것은 예상이 정확했는지 알아보려 하는 것일 거다.
“천열운무보 말이더냐?”
예상대로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신화문주와 반대로 놀란 듯 토끼 눈을 뜨는 남궁공자.
확실히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비급의 이름만 들어도 무슨 무공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허어, 광창신투의 천열운무보라니…… 축하한다. 죽을 고비를 넘긴 만큼 너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기연을 얻었구나.”
“감사합니다.”
단박에 잘 어울리는 무공이라고 단언하는 남궁공자.
확실히 반응을 보니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독무부터 떠올리는 듯하다.
‘쓰읍, 이놈의 고정관념. 어떻게든 해야지…… 그러고 보니 우리를 날려 보낸 진법도 듣도 보도 못한 것 아니었나?’
마치 판타지의 텔레포트처럼 공간이동을 시키는 진법.
현대에서 읽었던 무협지에서 그런 진법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통용되는 진법에는 그런 진법이 있다고 들어본 적도 없었다.
“뇌의 님. 그런데 저희가 날아간 진법이 무슨 진법인지는 알아보셨습니까? 이동된 곳 멀지 않은 곳에 광랑이 있었고, 제 이름을 들먹이며 죽이려 드는 걸 보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서 설치한 것 같습니다.”
“광랑이 바로 근처에 있었다고?”
“예.”
“흐음…….”
광랑이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에 신음을 흘리는 남궁공자.
광랑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온 것 자체는 당가가 여기저기서 견제받는 만큼 하등 이상할 것 없는 문제였다.
허나, 그것이 알아볼 수도 없는 진법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왜냐면 중요도가 그리 높지 않은 나를 죽이려고 이런 진법까지 쓸 정도면 당연히 진법과 관련된 단체가 의심되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능력이 되는 곳은 있지만, 어떤 곳이든 그럴 만한 이유는 없을 텐데…….”
사주한 곳이 도저히 가늠이 안 가자, 이것저것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남궁공자는 이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이 일은 금방 알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진법에 관해서는 다들 문외한인 만큼 진법가를 데려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해결할 방법이 없을 거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어디까지나 진법은 비동에 원래 설치되어 있던 것이고, 우연찮게 광랑과 조우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그게 가능성이 크니 말입니다.”
“맞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몸조심하고, 이 이야기는 예화를 데려다주고 와서 마저 하자꾸나.”
남궁공자가 남궁예화를 데려다주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자, 가만히 있던 남궁예화가 감사 인사를 했다.
“당 소협. 오늘 일은 정말 감사했어요.”
“아닙니다. 어쩌면 저 때문에 휘말린 일일지도 모르니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이건 뭡니까?”
잠시 빌려줬던 명패를 다시금 돌려주는 남궁예화.
그런데 남궁예화가 내 명패 말고도 작은 명패를 하나 더 건네주는 거 아닌가?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성에는 정말 유명한 해결사가 한 명 있어요.”
“해결사?”
못 받은 돈 있을 때, 연락하면 모두 찾아준다는 그 해결사를 말하는 건가?
“아, 당 소협이 생각하시는 무력 같은 걸 쓰는 해결사는 아니고, 그 이외의 것들을 해주는 해결사예요. 예를 들면, 관아에서 못 푸는 미제 사건을 해결해 준다든가, 아니면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물건을 감정해 준다든가, 그런 일들이요.”
미제 사건 수사와 고대 물품 감정이라…… 대충 탐정과 고고학자의 짬뽕 느낌인 건가?
“가끔가다가 제가 도움을 주기도 하는데…… 아무튼, 제가 그 해결사랑 굉장히 친한 사이인데, 이건 일종의 부탁권 같은 거예요. 나중에 안휘에 들를 일이 있으면 쓰세요. 물론, 그냥 남궁세가로 찾아오셔도 되고요.”
“예…….”
거절할 틈도 없이 손에 명패를 꼭 쥐여준 남궁예화가 잠시 뒤로 물러나더니, 복면을 벗어 던지고는 눈을 맞추며 말했다.
“당 소협. 다음에 꼭 봬요.”
잔잔하면서도 애틋한 남궁예화의 미소.
그 미소를 마주 보고 있자니 내 얼굴에도 자연스레 화답의 미소가 떠올랐다.
“예, 꼭 뵙도록 하죠.”
* * *
당지천이 남궁예화와 헤어지고 당가로 발길을 돌린 그 시각.
어딘지 모를 지하실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의문의 인물에게 보고를 올리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하여 온전히 다루긴 힘들어도 행동을 유도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행이네, 무인들에게 통하게 개량하는 데 성공해서. 차후 일의 진행이 수월해지겠어. 잘했다. 황충.”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결국 호위의 실력은 또 확인 못 했네?”
“예, 가능하다면 뇌의와 함께 처리하려 했으나, 인원들이 손써보기도 전에 무정검이 나타나서 검조차 못 뽑게 했습니다.”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애초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어중이떠중이들만 끌어모은 거라 무정검이 없었어도 처리하진 못했을 거야.”
“죄송합니다. 계획을 조금 더 신중하게 짰더라면…….”
“아니야, 괜찮아. 호위의 실력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신화문이랑 아주 탄탄한 끈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인했으니까 말이야.”
바로 앞의 탁자에 손가락을 두어 번 튕긴 인물이 뭔가를 고민하더니 황충에게 물었다.
“당지천은 어떻게 됐지?”
“안타깝게도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
슬며시 미소를 짓는 의문의 인물.
“거, 정말 안타깝게 됐네.”
안타깝게 됐다는 말과는 달리,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전혀 사라질 기미가 안 보였다.
“지금이라도 확실히 죽입니까? 당지천의 재능은 비정상적입니다. 거기다, 이번엔 기연까지 얻었으니 앞으로 싹이 더 자라기 전에 미리 목을 치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뭐, 확실히 죽일 수 있으면 죽이는 게 좋긴 한데…… 그러고 나면 별로 재미가 없잖아. 나랑 비슷한 냄새가 나는 녀석은 그 녀석뿐인데, 그 녀석마저 죽여 버리면 외로울 것 같거든.”
“그렇습니까?”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인물의 명령은 절대적.
작전 제안은 가능하더라도 선만큼은 엄격히 지켜야 했기에 의문을 버렸다.
“그럼 초기 계획대로 이행합니까?”
“어,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았으니 당지천과 호위는 배제하는 거로 가자고.”
“알겠습니다.”
“가서 일 봐.”
“예.”
보고를 마친 황충이 나가자, 홀로 남은 인물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당지천을 죽인다라…….”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나서 관심이 간다.
이건 엄연한 사실이었지만, 그 무엇도 대계보다 위에 있을 순 없었다.
거기다, 자신이 바보도 아니고, 싹이 보이는 당지천은 당연히 빠르게 처리하는 게 맞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냐고.”
그러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제약이 사라진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 나가서 손수 처리하고 싶은 게 본심이었다.
허나, 그게 불가능하니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구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그 녀석을 옥죄는 것처럼, 그 녀석도 날 옥죄고 있으니까 말이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찬 인물은 그래도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뭐, 어차피 그것도 얼마 안 남았어.”
약속된 5년.
이제는 그 끝에 다다랐기에 조금만 참으면 제약이 사라진다.
그렇기에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인물은 여유롭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디 마음껏 발버둥 쳐보라고. 당지천.”
……한없이 슬픈 눈을 한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