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64화
함정 속에 감춰져 있는 입구.
그리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통로.
뻔하다면 뻔할 만큼 어디서나 자주 나오는 장면으로 누구나 한 번쯤 봤을 법한 곳이었지만, 막상 함정을 코앞에 뒀을 땐 전혀 떠올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동굴이 왜 여기에?”
위의 공동에 도착한 것도 어디까지나 벽화를 해석하고 비동을 찾아내서다.
그런데 그걸 한 번 더 꼬아서 이렇게 숨겨놓을 이유가 대체 어딨냔 말이다.
“역시 맞았네요! 처음에 봤던 벽화도 그렇고, 공동에 있던 글귀랑 이 앞의 벽화까지 전부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어이없다는 듯 동굴을 보고 있자, 글귀는 원래 동굴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었다는 남궁예화.
나는 읽지도 못하는 글자들이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모든 것들이 이곳을 암시하고 있었다고 했다.
“잘 모르시겠죠? 대충 간단히 설명하자면…….”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남궁예화는 곧장 설명을 시작했다.
누가 남궁공자의 조카가 아니랄까 봐 아주 장황하게 늘어뜨렸다.
“소저, 시간이 없습니다. 설명은 나중에 하시죠.”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네요.”
“저도 가끔 그럴 때가 있으니 이해합니다.”
쑥스러운 듯 멋쩍은 웃음을 짓는 남궁예화에게 괜찮다고 하자, 남궁예화가 곧장 물어왔다.
“바로 들어가실 건가요?”
“그래야죠.”
어차피 함정에 있어봤자,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러니 함정에 들어온 이상 무조건 들어가야 했다.
“그러면 바닥을 유심히 살피며 걸어주세요. 걸을 때마다 독무가 쏟아져 나오는 그림도 작게 그려져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바닥을 조심하라는 남궁예화의 조언.
위험한 상황은 되도록 만들지 않는 것이 좋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 * *
구불구불한 동굴의 길을 얼마나 따라 걸었을까.
바닥을 조심하라는 남궁예화의 말이 무색하게도 우리가 들어온 동굴은 자연 상태 그대로였고, 그 어떠한 함정조차 없었다.
“이상하다…… 왜 아무 일도 없지? 벽화의 해석이 틀렸나?”
벽화의 해석이 틀리자, 안절부절못하는 남궁예화.
대충 보면 함정이 없어서 다른 것이 숨겨져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벽화의 해석이 틀린 게 어지간히도 신경 쓰이는 듯했다.
“아직 안 나온 것뿐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다 온 것 같은데요…… 보세요. 벌써 공동이 나왔잖아요.”
대화하는 사이 빛이 새어 나오는 동굴의 끝에 도착하자, 이전과 비교하면 훨씬 규모가 작은 공동이 나타났다.
‘여기가 진짜 기연이 숨겨진 곳…….’
규모 자체는 작지만, 위의 공동과 똑같은 모습.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해골 한 구와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뭐가 숨겨져 있을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얼떨결에 여기까지 도착했기에 그간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곧 얻는다고 생각하니 몸이 달아올랐다.
“공동에도 함정이 있으니 기다려 보시죠.”
허나, 일염이가 본디 사람이란 고지가 코앞일 때 실수를 하는 법이라 말했다.
들뜬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상자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 발.
한 발.
상자로 다가갈수록 남궁예화의 두 눈에는 기대가 서렸고, 내 가슴에는 설렘이 차올랐다.
그렇게 상자를 향해 걷기를 잠시.
“하아, 결국 제 해석이 틀렸나 보네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 상자 앞에 도착하자, 남궁예화가 한숨을 푹 쉬었다.
“좋게 생각하시죠. 함정이 있는 것보단 없는 게 낫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자, 비 맞은 고양이처럼 풀이 죽어서 처져 있는 남궁예화.
함정은 둘째치고 자신이 세운 가설이 틀렸음을 알았을 때, 얼마나 슬픈지 잘 알았기에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넘어갔다.
“소저,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이전 것처럼 이상한 장치가 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 상자는 같이 열어보죠.”
“예.”
남궁예화가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옆에 다가온 걸 확인한 나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엽니다.”
한껏 긴장한 채로 상자를 열고 남궁예화와 함께 잠시 물러났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전한가 본데요?”
“그런 것 같군요.”
조금 더 기다려 봤지만, 잠잠한 공동 안.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스레 상자를 들여다보자, 달랑 비급 하나만 들어 있었다.
“천열운무보(天裂雲霧步)?”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무공.
일단 장보도를 통해 찾은 비급에다가 보법인 만큼 성능은 확실하겠지만,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무공의 이름에 당황스러웠다.
“이게 대체 누구의 무공이지?”
현대의 무협지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이곳.
그렇다 해도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이들의 무공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비슷한 이름의 무공이라도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아, 천열운무보!”
남궁예화가 들어본 이름인지 박수를 쳤다.
“아는 무공입니까?”
“예, 400년 전쯤에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광창신투(狂猖神偸)의 무공이에요.”
“광창신투?”
아니, 무영신투도 아니고 뭔 신투가 또 있어?
“관심받기를 누구보다 좋아해서 물건을 훔칠 때마다 항상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주변에 안개를 뿌리고 다니던 도둑이에요. 아까 벽화에 나온 게 함정이 아니라 비급을 뜻하는 것이었나 봐요!”
“예? 도둑인데 항상 굉음을 내고 다니고, 안개를 뿌리며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는 말입니까?”
“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고 하네요.”
요약하자면 관종.
관심에 미쳐서 도둑질할 때마저도 자신의 위치를 널리 알렸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이목을 끌고 다녔으면 진작에 잡혔을 것 같은데, 그러면 이 비동도 가짜인 게 아닌가 싶군요.”
“보통은 금방 잡히죠. 아니, 그래야 하죠. 그런데…….”
비급을 가리킨 남궁예화가 말을 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천열운무보. 이 보법 때문에 광창신투를 잡았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허, 이게 그렇게 대단한 무공이란 말입니까?”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폭음을 뿌리고 다녀도 잡히지를 않는단 말인가.
필시 절세의 무공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게 대단한 보법이라면 마음이 동하긴 한다만…… 애매하네.’
하지만 본디 무공이란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협화음만 가득한 음악과도 같다.
당가의 무공과 어울릴지는 미지수.
선뜻 가지기엔 당가의 보법도 어디 가서 뒤처지지 않는 편이기에 굉장히 애매했다.
‘차라리 무영신투의 보법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전설적인 도둑의 보법.
비록 말로만 전해 들었지만, 특유의 은밀함과 민첩함이 강점이라 들었기에 무조건 잘 어울렸을 거다.
‘이거 진짜 계륵이네.’
넘기기도, 그렇다고 가지겠다고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하고 있자, 예상외로 남궁예화가 먼저 비급을 포기했다.
“당 소협께서 챙기시죠.”
“제가 말입니까?”
광창신투의 무공임을 알아본 건 남궁예화.
아무리 관심 없어 보였다고 한들 남궁예화도 무인인 만큼 마음이 동할 거고, 당연히 욕심낼 줄 알았다.
“예, 제게는 단순한 상승 무공에 불과하지만, 당 소협에게는 꼭 필요한 무공이잖아요.”
허나, 내가 가지는 것이 더 적합하다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떠올려 보면 단순히 필요 없어서 건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주는 듯했다.
‘내게 꼭 필요한 무공? 도대체 어딜 봐서 그러는 거지? 분명 폭음과 안개를 뿌려 자기 위치를 동네방네 알리고 다니는 무공이라 하지 않았나?’
남궁예화가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내게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던 그 순간.
‘허어…….’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생각 하나.
‘보법을 펼칠 때 나오는 운무를 독무로 바꾸면 되잖아!’
내 주무기는 독무.
운무를 퍼뜨리는 과정 자체는 잘 모르지만, 만약 이걸 독무를 퍼뜨리는 데 적용할 수 있다면?
거기다. 그 독무가 무색무취의 호흡하지 않아도 중독되는 독이라면?
‘대박.’
멀리서는 시야를 가리지 않는 독무로 다가오는 걸 막고.
가까이서는 회피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소리가 좀 거슬리긴 하다만…….’
그것도 조절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독무만 뿌릴 수 있으면 소리 따윈 어찌 되든 좋았다.
아니, 어쩌면 어중이떠중이 상대로는 위압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고 말이다.
‘내가 이 생각을 왜 못 했지?’
될지 안 될지 명확히는 모르지만, 최소한 시도는 해볼 만한 상황.
보법은 순전히 보법에 불과하다는 내 고정관념 때문에 놓칠 뻔했는데, 남궁예화가 그 부분을 잘 잡아줬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필요한 사람이 가지는 게 맞죠.”
당연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남궁예화.
고절한 무공인 게 분명한데도, 오히려 잘됐다는 듯 미련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설령 제게 필요했더라도 내어드리는 게 맞는 거죠.”
거기다, 필요했다고 해도 주는 게 맞다며 작은 미소를 지어주는 걸 보면 참으로 생각이 깊은 여인이었다.
‘그렇지. 잠시나마 같이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신뢰는 다른 문제니까 말이야.’
자고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아까까지 생사를 같이했다고 한들, 어느 순간 돌변할지 모르는 게 사람이다.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잠깐 봤다고 금방 사람을 신뢰할 순 없는 법.
내게 이미 광랑을 상대할 만큼 강력한 수단이 존재하는 걸 알았고, 또, 본신의 무력이 나보다 낮으니 남궁예화가 지금 당장 몸을 사리는 것은 매우 냉정하고 현명한 판단이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사람이야.’
처음에 봤을 땐, 되도록 얽히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 여인이었다.
“그럼…….”
비급도 챙겼겠다.
마음 같아선 바로 주저앉아 3회독을 실시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는 관계로 품에 갈무리하고 독 제조에 들어가기로 했다.
“지금부터…….”
“전 준비됐어요.”
위험할 수 있으니 최대한 피부를 가리라고 주의를 주려 했는데 웬걸, 남궁예화는 이미 피부가 노출된 곳이 없게끔 장갑을 비롯한 보호장구를 착용한 상태였다.
……무려 얼굴엔 복면까지 쓴 채로 말이다.
“소저…… 복면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여자에게 비밀 한두 개는 있는 법이랍니다.”
“아, 예.”
어떨 때 쓰는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좋다.
자기가 비밀이라는데 뭐 어쩌겠는가.
무엇보다 지금은 독을 만드는 게 먼저라 대충 넘어갔다.
“그럼 진짜로 시작하겠습니다.”
남궁예화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복면도 쓰고 있으니 더는 꺼릴 것 없겠다.
진짜로 독 제조를 하기 위해 자리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