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62화
당지천과 남궁예화가 정체불명의 빛무리에 휩싸인 그 시각.
공동에 남은 남궁공자는 허망한 눈으로 남궁예화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었다.
“예화야?”
지금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남궁예화를 불러보는 남궁공자.
반신반의하며 남궁예화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암담하게 그지없는 침묵뿐이었고, 그제야 작금의 상황이 머리에 들어오는지 혼란에 빠졌다.
“어, 어째서 이런 일이…….”
남궁공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는지 손을 덜덜덜 떨다가, 갑자기 천일염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왜! 왜 안 구한 건가?! 자네라면 가능했잖는가!”
멱살을 잡힌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천일염.
그러고는 이내 생각을 마쳤는지 무표정하게 답했다.
“글쎄.”
도무지 호위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무책임한 말.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남궁공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명색이 호위라는 작자가 그러고 쳐다보고만 있으니 10년 전에도 그렇게 허망하게 잃은 거 아닌가!”
허나, 화가 나도 해도 될 말이 있고, 하면 안 되는 말이 있는 법.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깨달은 남궁공자가 곧장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일염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말이 심했네.”
말이 심했다.
그 사과를 들은 천일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
남궁공자가 알기로 10년 전, 그 일은 가히 천일염의 역린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일.
그렇기에 천일염이 얼굴을 굳힐 거란 생각과 달리, 별다른 반응을 안 하는 모습에 조금 섬뜩함까지 느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내 탓이다. 다만, 잘잘못은 나중에 따져도 될 터이니 일단 찾으러 가지.”
찾으러 가야 하는 건 알아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는 상황.
남궁공자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당장 움직이자는 천일염의 말에서 희망을 엿봤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는가?”
“아니.”
허나, 고개를 젓는 천일염.
“내가 아는 진법 중에 이런 진법은 없었다.”
당지천이 어디로 갔는지 짐작조차 못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발로 뛰어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
웬만한 진법가보다도 진법에 대해 더 잘 아는 천일염조차 알지 못하는 진법이란 소리에 남궁공자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웠다.
“이게 만약 아이들을 우리에게서 격리한 뒤, 노리려고 한 거라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남궁공자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 천일염은 곧장 공동의 문을 열었다.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서로 떨어져서 찾아보자는 천일염.
통로에 기관진식이 도배되어 있다고 한들, 남궁공자 정도면 능히 해결할 터이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괜찮겠나? 지금쯤이면 색을 거의 다 잃었을 텐데.”
최악의 경우 수십의 무인들이 얽힐 수 있는 상황.
일차적인 피아 식별은 옷의 색깔로 하는데, 천일염은 그게 불가능하니 차라리 같이 다니는 게 더 빠를 거라는 남궁공자의 말에 천일염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아무리 색을 잃었다고 한들, 아직 백색만큼은 구분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아무리 혼잡한 상황이어도 당지천만큼은 찾을 수 있다는 천일염의 말에 남궁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먼저 찾는 쪽이…… 이런.”
한시가 급한 상황.
서로 탐색을 시작하려는 찰나, 사방에서 포위하듯 다가오는 무인들의 기세에 남궁공자는 입술을 씹었다.
왜냐면…….
“어딜 가시려고 그러나.”
지금 이곳을 찾아온 무인들.
그들 모두가 만만치 않은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노린 표적이 당지천이나 남궁예화가 아닌…….
“아무래도 표적은 둘뿐만이 아니었나 보군. 아니면, 이쪽 둘이었거나.”
남궁공자와 천일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 * *
최악과 차악.
어느 쪽도 좋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선택지가 두 개뿐이라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는 정해진 것과 다름이 없다.
“옘병.”
앞은 금서방의 무인들과 광랑 홍유종.
뒤는 셀 수 없이 많은 기관진식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사지로 몸을 던지는 것이었지만, 뒤로 가면 조금이나마 살 가능성이 있는 것과 달리, 앞으로 가면 확정적인 죽음이었다.
‘홍유종 한 명뿐이라면 어떻게 하겠다만…….’
경지가 아득히 높은 고수라면 모를까.
5년이란 인고의 시간을 보냈기에 조금 위험을 감수한다면 홍유종 정도는 싸울 만했다.
장소가 독무가 쉬이 날아가 버리는 밖이 아니라, 밀폐된 공간일수록 내 쪽이 좀 더 유리했으니 말이다.
‘그렇다 한들, 저 숫자를 혼자 상대할 순 없겠지.’
하지만, 홀몸으로 저 많은 숫자를 감당할 수는 없는 법.
홍유종을 잡는 건 둘째 치더라도, 저들을 이길 여력은 더는 남지 않을 거다.
그러니 미리 준비했던 독무를 뿌리며 반대편으로 몸을 던진 거다.
그런데…….
“이딴 독무로는 내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
예상했는지 숨을 참은 채 달려오는 홍유종.
숨을 쉬지 않으면 독무에 중독되지 않는 점을 알기에 일부러 호흡을 멈췄다.
“젠장!”
설상가상으로 대놓고 보이는 화살 구멍들.
단 몇 발자국만 앞으로 간다면 곧장 화살이 내게로 쏟아질 게 분명했다.
“하하하!”
발걸음을 망설이자,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언젠가는 숨을 쉬어야 하는 만큼 독무는 위협적이겠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따라잡힐 게 분명했다.
‘독무를 뚫고 온 게 광랑뿐이니, 지금이라도 광랑을 상대해?’
저쪽에서 기관진식을 무시하니 나도 도망치려면 기관진식을 배제하고 도망쳐야 하는 상황.
문제가 됐던 인원들을 독무가 막아주니 차라리 승부수를 띄우는 게 어떨까 싶었다.
“숨을 참아라!”
하지만 남은 인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숨을 참으며 독무에 들어오는 걸 보고, 곧장 그 계획은 폐기했다.
“소저, 제 뒤에 바짝 붙어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결국, 선택한 건 기관진식을 뚫고 도망치는 것.
독무가 있는 범위를 늘리면 따라오지 못할 거란 생각에 몸으로 길을 뚫기로 했다.
-피슝!
발을 몇 발자국 내딛기 무섭게 날아오는 화살.
최대한 급소만 피한다는 생각으로 어깨를 내어주자, 그대로 어깨에 틀어박혔다.
“큭…….”
예상은 했다만, 더럽게 아픈 화살.
그것도 한 발이 아니라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몇 발씩 날아와서 온몸에 멍이 든 느낌이었다.
“당 소협…….”
뒤에서 걱정하는 남궁예화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생로가 여기뿐이라는 건 남궁예화도 알고 있기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는 약 바르면 낫습니다. 걱정은 나중에 합시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슬쩍 뒤돌아보자, 크게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예화.
이제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모습에 나는 곧장 시선을 돌려 더 뒤에 쫓아오던 홍유종을 흘겨봤다.
-깡! 깡! 깡!
튀어나오는 쇠공들을 일일이 쳐내는 홍유종.
내게 화살이 날아왔듯이 시간 차를 두고 작동하는 함정들이 홍유종의 발목을 잡는 중이었다.
“거기 서라!”
서란다고 설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쇠공을 열심히 쳐내며 외치는 홍유종.
나는 그런 홍유종에게 독무를 뿌리면서 점차 거리를 벌렸다.
“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독무 하나라면 모를까.
기관진식에서 쏟아지는 독들은 하나같이 극독들.
나조차도 일각이 되기 전에 해독하지 못하면 위험한 독들이었다.
홍유종은 그런 독을 하나라도 맞으면 심히 불리해질 걸 알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거기다, 홀로 기관진식을 뚫고 나간다고 한들, 시간이 끌리면 결국 독무를 들이마시게 될 걸 알기에 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어차피 그쪽으로 도망쳐 봤자 막다른 길이다! 목 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퍽이나.”
시간이 곧 금.
홍유종이 뭐라 지껄이든 우리는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 * *
일단 자리를 벗어났지만, 홍유종이 언제 따라올지 모르는 상황.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다가 갑자기 나타난 문에 심히 당황스러워졌다.
“뭐야? 이게 왜 여깄어?”
왜냐면 그 문은 일전에 봤던 뭔가가 있을 법한.
결과적으로 우리를 이곳에 고립시킨 함정이 있었던 문이었다.
일전에는 문 양옆으로 길이 있어서 우회할 구석이라도 있었건만, 지금은 다른 길 없이 오직 문만 존재했다.
“혹시 이전과 같은 상자를 열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요?”
내 혼잣말에 남궁예화가 희망적인 발언을 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건 의견을 제시한 남궁예화도 알고 있을 거다.
“그렇다고 해도 위험하죠.”
거기다. 만약, 다시 어딘가로 원래 장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이미 남궁공자나 일염이가 우리를 찾으려고 움직였을 게 분명했기에 엇갈릴 가능성이 컸다.
“역시 그렇겠죠…….”
면사 너머로 씁쓸한 미소를 흘린 남궁예화는 잠시 풀이 죽어 있다가, 이내 품에서 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당 소협의 상처 먼저 확인하는 게 낫겠어요. 숙부님이 챙겨주신 효과 좋은 금창약이 있으니 제가 발라 드릴게요.”
금창약을 들고 다가오는 남궁예화.
나는 그런 남궁예화를 만류했다.
“독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 제가 하겠습니다.”
피독주가 있다고 한들, 독과 접촉은 최대한 줄이는 게 낫다.
피독주는 어디까지나 독기를 빨아들여 주는 물건이지, 내부의 독기를 해독해 주는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쓰읍.”
어깨와 팔에 박힌 화살들을 빼내자, 몰려오는 통증.
다행히도 부상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고, 남궁공자가 만든 약을 바르니 금방 진정됐다.
더럽게 아프긴 했지만 말이다.
‘맘 같아선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공이라도 늘리고 싶지만…….’
해독제를 먹으면서도 아쉬운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한가하게 가부좌를 틀고 있을 시간은 없었기에 체념하고 해독제를 복용했다.
“됐습니다.”
몸 안을 감돌던 독기가 상쇄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곧장 문 앞으로 다가갔다.
“엽니다.”
준비를 마치고 문을 열자, 예상대로 안은 이전과 똑같은 공동이었다.
가부좌를 튼 백골과 사람을 날려 보내는 보물 상자가 있는 그 공동 말이다.
“이전과 크게 다른 점은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하죠? 혹시 비밀 통로라도 숨겨져 있는지 확인할까요?”
“아뇨. 주어진 시간은 길어봤자 일각일 터이니 비밀 통로를 찾기엔 늦을 겁니다.”
홍유종이 언제든 들이닥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
지금부터 비밀 통로를 찾기엔 늦었다.
“그러니 여기서 상대할 겁니다.”
“여기서 말인가요?”
아까와 뭐가 다를 바가 있냐는 듯 되묻는 남궁예화.
홍유종을 상대할 거면 차라리 아까 처음 조우했을 때가 낫지 않았겠냐는 물음이었다.
“광랑에겐 당 소협의 독무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괜찮나요?”
거기다, 홍유종은 단순한 행동이지만, 독무를 대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우려하는 모습이었다.
“아마 홍유종이 제 암기를 순순히 맞아줄 리는 없으니 힘들겠지만…….”
하지만 상대가 대비를 해왔다면 나도 그에 맞춰 새로운 수를 준비하면 그만.
준비가 조금 필요하지만, 약간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홍유종이 독무를 들이켜려 하지 않고, 암기를 순순히 맞아주지 않을 게 확실한 상황.
그렇다고 순전히 무공으로 싸우면 질 게 분명하기에 남궁예화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한 번 더 말했다.
왜냐면…….
“그것도 무조건 이길 방법이 말입니다.”
오늘 긁어낸 벽화와 함정의 독.
거기서 얻은 독 중에 홍유종을 쓰러뜨릴 독들이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