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61화
기연(奇緣).
기이한 인연을 뜻하는 말로 무협지에선 주로 절세의 영약이나 비급을 얻거나, 혹은 고수의 눈에 들어 무공을 전수받는 상황을 말한다.
왜, 흔히 있잖은가.
악당에게 쫓기던 주인공이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몇백 년 전 자취를 감췄던 고수가 남긴 비급과 영약을 얻어 강해진 뒤, 악당에게 복수한다는 이야기.
‘뭐, 주인공이 좀 약하다 싶으면 일단 기연부터 쥐여주는 게 관례였지.’
주인공이 약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주인공을 강하게 만들어주고 퇴장하는 그 기연.
그걸 얻을 기회가 내게도 찾아왔다.
‘물론, 인원이 4명이다 보니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류 잡배나 어중간한 무인이라면 모를까.
기연 하나에 모든 걸 등지기엔 너무 많이 가진 사람들이기에 적어도 칼부림이 일어나진 않을 거란 사실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우와…….”
넓은 공동을 둘러보며 면사 너머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남궁예화.
기연이 있을 법한 공동에 들어왔음에도, 그것보단 벽에 잘 보이지도 않는 문자들을 보고는 기뻐했다.
‘하긴, 서로 칼부림할 게 아니면 주인이 정해진 것과 다름이 없지.’
어차피 싸울 게 아니라면 합리적으로 나눌 테고, 그렇다면 자연스레 나오는 것에 따라 주인이 바뀔 거다.
그걸 남궁예화도 알고 있으니 저리 행동하는 것이겠지.
‘제발 쓸모없는 것만 나오지 말기를.’
일행 중 누가 뭘 얻더라도 나쁘지 않은 상황.
그런데도 최악의 경우가 있다면 바로 여기 있는 모두가 원치 않는 무공이 나왔을 경우다.
만약 저 상자를 열었더니 혈교의 무공이 갑자기 등장한다면 우리 모두 별말 없이 태울 수밖에 없을 거다.
그게 아무리 격이 높은 신공이라고 한들, 무고한 피로 얼룩진 금기에 불과할 테니까 말이다.
‘당연히 악인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보단 낫지만…….’
물론, 그런 걸 요긴하게 쓸 인물들이 차지하는 것보단 낫다.
허나, 막상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온 비동에서 나온 게 태워 버려야 할 종이 쪼가리뿐이니 허탈함을 감추지 못할 거다.
‘에이, 설마 그러겠어.’
혈교가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 건 지금으로부터 한 200년 전.
400년은 더 되어 보이는 이 비동과 시기상으로는 맞지 않는다.
그러니 혈교의 무공은 아닐 거란 생각에 빨리 상자를 열어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일염아, 여기는 함정이 없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함정이 없다는 일염이의 말에 신나는 마음으로 곧장 상자에 다가가려고 하자, 갑자기 붕 뜨는 몸.
“뭐, 뭐야?!”
“뭐긴 뭐겠습니까, 함정이지.”
마지막까지 기관진식이 깔려 있었는지 어느샌가 바닥이 좌우로 갈려 있었고, 일염이가 내 뒷덜미를 잡은 채 공중에 띄우고 있었다.
“아니, 함정 없다며!”
“본디 사람이란 고지가 코앞일 때 실수를 하는 법. 공자님께 좋은 경험을 선사해 드리려고 일부러 알려 드리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쾅!
일염이가 창살이 가득한 함정 안.
잘 보면 모양이 약간 다른 벽돌을 향해 기를 담은 비수를 던지자, 좌우로 갈라졌던 바닥이 굉음을 내며 원상복귀됐다.
“사람을 너무 믿으시는 것 같아서 한번 해봤습니다.”
“야, 사람을 너무 믿는다니 내가 얼마나 의심이 많은데 그런 소리를 하냐?”
배신으로 인해 죽어야만 했던 내가 어떻게 쉬이 사람을 믿겠는가.
단지, 일염이가 하는 소리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염이를 안 믿으면 홀로 떨어진 중원에서 믿을 사람 하나 없기 때문이었다.
“뭐, 저도 공자님이 사람 쉽게 안 믿는 거 압니다. 어쩌면 제 말이라 신뢰했던 걸 수도 있겠죠. 하지만 믿을 게 설령 저뿐만이라도…….”
일염이가 말을 하다 말고 의미심장한 얼굴로 뒷덜미를 잡은 손을 놓았다.
“너무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후씨.”
다행히 한 번 작동시키면 다시 열리진 않는지, 멀쩡한 바닥.
경각심을 심어주는 건 좋다만, 꼭 이런 방식으로 해야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 명심할게.”
그래도 다 나 좋으라고 하는 말이기에 알겠다고 하자, 상자로 다가가 이것저것 확인하는 일염이.
“상자에는 별도의 장치나, 진법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주변을 경계할 터이니 공자님이 상자를 여시죠.”
이 함정이 마지막이었는지 아무 장치도 없다고 단언했다.
“남궁 소저, 이쪽으로 오시죠.”
일염이가 말한 대로 상자를 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혼자 있던 남궁예화를 부르자, 쪼르르 달려오는 남궁예화.
“이제 상자를 여는 건가요?”
공동을 바라볼 때 호기심 가득했던 것과 달리, 상자에서는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지 별 기대 안 하는 눈치였다.
“예, 뭐가 나올지 같이 보시죠.”
“좋아요.”
“그럼 열겠습니다.”
도대체 뭐가 나올까.
설레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남궁예화와 함께 힘껏 상자를 열자, 갑자기 터져 나오는 빛무리.
“어?!”
채 피할 틈도 없이 우리를 감싸더니 이내 점점 밝아지며 남궁예화와 나를 중심으로 자그마한 원을 그렸다.
“안…….”
이상함을 감지하자마자, 빛 너머에서 손을 뻗어오는 천일염과 남궁공자.
빛무리에 휩싸인 게 절대 좋은 징조는 아니었는지, 얼굴을 굳힌 채 우리를 밖으로 꺼내려 했다.
-위이이잉.
허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형태를 갖춘 원은 시끄러운 진동음과 광활한 빛을 뿌리며 우리의 눈을 가렸다.
그렇게…….
시각와 청각.
감각을 비롯한 모든 것이 빛무리와 함께 반전되었다.
* * *
당황한 상태로 다시금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어두컴컴한 통로.
“일염아?”
“숙부님?”
아까까지의 지하 공동이 아닌 어딘지 모를 통로였다.
“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앞이 깜깜해지는 듯한 상황.
분명 일염이가 말하길 별다른 장치가 없다고 했는데, 우리는 영문 모를 곳에 떨어져 버렸다.
‘아니, 뭐지? 진법인가? 아니면 어떠한 주술?’
우리를 순식간에 날려 버린 방법.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하고 나서도 가늠이 안 되는 걸 보면 적어도 내가 아는 방식은 아닌 듯했다.
그렇기에 마땅한 대처 방안이 없는 상황.
거기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남궁 소저랑 같이 와버리다니…… 큰일이다.’
드넓은 무림에서도 견줄 자가 별로 없는 뇌의.
그리고 무력은 더 약해도 기관진식엔 아주 해박한 일염이.
둘 중 하나와 같이 떨어졌다면 그나마 안심했겠는데, 하필 남궁예화랑 같이 와버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가늠도 안 가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뭐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는지 파악하는 건 나중에 해도 안 늦는다.
그러니 지금은 이 상황에서 벗어날 궁리만 해야 했다.
“소저, 일단 이것을 받으시죠.”
공황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 품에서 내 이름이 각인된 보석을 꺼내 건네주자, 아직 공황 상태인 남궁예화가 화들짝 놀랐다.
“이건 당 소협의 명패가 아닌가요? 이걸 제게 왜?”
명패.
사람의 신분과 직책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놓은 패.
보통은 자신이 누군지 증명하기 위해 많이 쓰이는 물건인데, 무림에선 목숨을 구명받거나 큰 은혜를 입었을 때, 이름을 걸고 반드시 갚겠다는 의미로 명패를 주는 게 불문율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뜻으로 명패를 주는 게 아니지만.
“제 명패는 웬만한 극독도 막을 수 있는 피독주입니다. 저야, 웬만한 독의 내성도 있고, 해독도 가능하니 가지고 계시죠.”
사천당가의 패는 기본적으로 전부 피독주다.
나야 웬만한 독들은 내성을 가졌고, 극독들 또한 해독은 할 수 있으니 문제가 없지만, 남궁예화는 극독에 당하는 순간 목숨이 위험할 것이기에 제일 좋은 피독주를 주는 것뿐이었다.
“죄송해요, 경황이 없어서…….”
머쓱한 얼굴로 명패를 받아 드는 남궁예화.
아직도 영문 모를 곳에 단둘이 떨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지, 공황상태에서 못 벗어나는 모습이었다.
‘뭐, 당연한 거긴 하지.’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았다면 모를까.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이니 이런 상황에 처했던 적은 없었을 거다.
그러니 돌발 행동하지 않고 상황을 받아들이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남궁 소저, 잠시 손을 주시죠.”
“예.”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며 말하자, 고분고분하게 손을 내미는 남궁예화.
나는 그런 남궁예화의 손에 내용물을 조금씩 부어줬다.
“천리미향입니다. 원래라면 향이 너무 강하지 않게 티끌만큼만 쓰지만, 이런 상황이니 많이 쓰는 게 나을 겁니다.”
일염이는 당연하고, 일전에 남궁공자도 천리미향을 맡을 수 있었으니 만약 우리가 떨어진 곳이 다른 비동과 연결된 곳이라면 금방 찾으러 올 거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향을 뿌리고 숨죽이고 기다리는 것.
“향이 퍼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냄새를 맡으면 누구든 찾으러 올 겁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기다리죠.”
“감사해요. 당 소협.”
이제 좀 진정된 듯 벽에 몸을 기대는 남궁예화.
나 또한 긴장이 풀렸기에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보며 최악의 상황만 오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아까 열었던 상자가 나와 남궁 소저를 뇌의 님과 분리하려고 놨던 거면……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진작에 장보도가 털렸으면 털렸지. 그게 말이나 돼?’
솔직히 뒷받침할 근거가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논리 비약.
내가 사천에서라면 모를까.
무림에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나 하나 잡겠다고 장보도로 함정을 팔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으면 여기에 무인들이 대기하고 있었겠지.’
설령, 그런 계획이 있었다고 한들, 도망치거나 구하지 못하게끔 미리 포위한 채로 단번에 처리하는 게 깔끔하고 맞는 계획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허망하게 놓칠 여지를 주는 건 계획 입안자로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다.
‘물론, 비동에 수많은 기관진식이 깔린 만큼 움직임 봉쇄되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변수는 확실하게 제거하는 게 맞기에 우리를 노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기 있었구나. 당지천.”
허나, ‘설마’는 언제나 사람을 잡는 단어란 걸 잊었던 걸까.
아니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을 잊었던 걸까.
그런 예상을 털어버리기 무섭게 저 멀리서 나타나는 무인들.
최소한 나보다 약하거나 대화가 통하는 상대이길 바랐건만, 한눈에 봐도 사도련 소속의 인원들로 보였다.
심지어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나보다 월등히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목 빠지게 찾아다녔다고.”
하나같이 나에게 명백한 적의를 뿜어대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여차하면 독무를 뿌리고 튈 생각.
잠시 시간이라도 벌 겸, 누군지 물으며 조용히 품에 손을 넣자, 남궁예화도 긴장하는 눈치였다.
“금서방의 방주, 홍유종이다.”
“이거 광랑 대협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사천당가의 당지천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사천에 명성이 자자하다 못해…….”
“시간을 끌려는 건 알겠다만, 거기까지만 해라.”
인사말을 늘리며 최대한 시간을 벌어보려 했으나, 단박에 간파한 홍유종.
역시 얄팍한 수작은 먹히지 않는지 곧장 검을 빼 들었다.
“내가 몸이 좀 달아올라서 말이지!”
기관진식 따윈 상관없다는 듯 단숨에 달려오는 홍유종.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곧바로 독무를 뿌리며 남궁예화에게 외쳤다.
“일단 도망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