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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57화 (57/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57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롭기만 하던 강호.

자잘한 다툼이야 늘 있던 일이야 넘어간다 치지만, 대문파 간의 다툼은 암암리에서 이뤄졌기에 대규모 전면전이 발생하진 않았다.

“땡중 놈들이 뭔 그리 욕심이 많아서 절에서 기어 나왔는가.”

“우리의 욕심이 아무리 크더라도 말코 도사들만 하겠습니까.”

허나, 지금 이곳.

장보도를 찾으러 온 청성파와 아미파의 흉흉한 기세를 보면 전면전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제발 그냥 시원하게 싸워주면 안 되나? 요리하는 것도 아니고 무림인이라는 것들이 왜 이렇게 간을 봐.”

괜히 얽히지 않으려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청성파와 아미파를 감시하고 있는 상황.

저쪽에서도 내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수십에 달하는 인원과 달리, 이쪽은 고작 둘 뿐이었기에 아예 신경을 끈 상황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봅니다. 그걸 보게.”

“……재밌으라고 한 거냐?”

“……공자님이 먼저 하셨잖습니까.”

“…….”

“…….”

실없는 농담 따먹기에 불과했지만, 심심한 탓에 잠깐 이어진 눈싸움.

“푸흡.”

조금만 더 하면 이길 것 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여인의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보니 웬 면사를 쓴 여인과 함께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뇌의 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쩐 일이긴, 너와 같은 이유지.”

이곳에 온 게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반갑다는 듯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 줬다.

그러자, 남궁공자의 뒤를 따라 다가오는 여인.

얼추 나와 동년배처럼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면사로 가렸음에도 언뜻 보이는 외형이 매우 아름다운 걸 보면 꽤 미인으로 보였다.

“인사하거라. 내 조카인 남궁예화다.”

“안녕하세요. 당 소협. 무림에 자자한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이네요.”

꾀꼬리같이 청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남궁예화.

예전에 듣던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아름다운 목소리’라는 관용 어구가 떠오르는 곱고 예쁜 목소리였다.

……저기 저 멀리서 대치하던 무인들 몇조차 이쪽을 쳐다보게 할 만큼 말이다.

“예, 안녕하세요.”

원래 아름다운 꽃에는 벌과 나비가 꼬이는 법.

남궁세가라는 배경이 있고, 뇌의가 옆에 붙어 있기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이라면 남궁예화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여기 있는 무인들은 장보도를 찾으러 온 이들.

거진 하루살이마냥 ‘대박 아니면 쪽박’을 외치며 목숨을 불사르러 온 이들이라, 눈을 뒤집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거기에 얽히고 싶지 않은 나는 예의를 차리면서도 거리를 두는 듯, 대강 인사를 마쳤고, 그러자 남궁공자가 곧장 물어왔다.

“당가에선 너만 나온 것이냐.”

단순히 나만 왔냐는 간단한 질문.

하지만 그 안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은 묻는 남궁공자도, 그리고 답변할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 남궁세가에서도 뇌의 님만 오신 겁니까?”

“그래, 내가 대표로 오기로 했다.”

역시나 똑같이 많은 의미가 함축된 질문.

고작 질문 두 번 나눴을 뿐인데, 남궁공자와 나는 대략 서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청성파와 아미파는 한없이 바쁜데 너는 태평하구나.”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서 저 혼자 뭐 하겠습니까. 그냥 적당히 얼굴 비치고 있는 겁니다.”

아직 절정의 경지에 이르진 못한 나.

그래도 1갑자가 넘는 내공과 독 덕에 웬만한 고수를 만나도 전혀 꿇리지 않았으나, 청성과 아미에서는 장로들도 등판한 상황이라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장보도가 진짜라고 해도, 괜히 객기 부리다간 장보도도 뺏기고, 목숨도 위태로워진다. 여기서는 놓아주는 게 맞아.’

진짜라는 소리에 잠시 혹한 적은 있었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이다.

“그리고 뇌의 님도 태평하신 건 마찬가지잖습니까.”

“나야, 뭐. 크흠.”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헛기침을 하는 남궁공자.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산 전체에 장보도의 위치를 나타내는 똑같은 벽화가 수십 개나 발견되었다고 하는구나. 한번 살펴보러 가겠느냐?”

이전에 신화문에서 들었던 정보.

이번에 나온 장보도는 특이하게도 하나의 산에 똑같은 그림이 그려진 벽화가 수십 개나 존재한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 통제하기도 전에 장보도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던 거고, 아직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사천에 소문이 돌지 않았던 건, 어디까지나 청성파와 아미파에서 수작을 부려서랬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괘씸하고 영악한 녀석들.

허나, 미리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긴 했으니 딱히 원망스럽진 않았다.

“뭐, 할 것도 없는데, 한번 가보죠.”

장보도를 찾으려는 행위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똑같은 게 수십 개나 있는 벽화를 본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심심한 찰나, 그 정도는 여흥 삼아도 괜찮다는 판단이 서자, 가벼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남궁공자의 안내에 따라 벽화를 찾으러 가는 길.

“여긴 우리 구역이오.”

남궁공자가 알아 왔다는 동굴을 찾아갈 때마다, 이미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했는지 날이 선 무인들이 동굴을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알겠소.”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쪽에 남궁공자가 있고, 벽화는 수십 개나 있었기에 다짜고짜 싸움을 걸어오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그럴 것 같았으면 오지도 않았겠지만 말이지.’

하지만 심심해서 나선 것과 달리, 막상 벽화를 보지 못하게 되자, 짜증이 살짝 났다.

“이거 이러다 오늘 벽화는커녕, 동굴에 발 한번 못 들여놓고 돌아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사도련에서 대대적으로 나섰다고 해서 무림맹에서도 꽤 출혈을 감수하기로 했다. 인원이 워낙 많으니 웬만한 동굴은 다 차지하고 있긴 할 테지만, 어차피 똑같은 내용이라 모든 벽화를 확보하진 않았을 거다.”

찾다 보면 어딘가는 남아 있을 거란 뜻.

허나, 그걸 찾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게 자명했기에 짜증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쓰읍, 괜히 온다고 했나?’

속으로 괜히 따라왔나 싶어 후회하고 있자, 그런 속내를 읽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남궁예화가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숙부님. 저쪽에도 동굴이 하나 있어요.”

조금 멀긴 하지만, 절벽에 있다시피 해 접근성이 떨어져 보이는 동굴.

그런 연유에서인지 동굴을 지키는 무인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가보자꾸나.”

벽화가 있는지 없는지는 명확하게 모르는 상황.

어차피 가보면 알게 될 터라, 남궁공자가 남궁예화를 업었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일염이의 등에 올라탔다.

“아니, 공자님. 남궁 소저라면 몰라도, 공자님은 절벽 탈 줄 아시잖습니까.”

“야, 저기까지 어느 세월에 타냐. 이게 더 빨라.”

평소라면 수련이라 생각하고 떨궈놨을 일염이였지만, 남궁공자가 먼저 동굴까지 뛰어오르는 걸 보고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거, 누구 없소?”

도착하자마자 동굴 안을 향해 소리를 쳐보는 남궁공자.

잠시 기다리며 인기척을 살폈지만,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있어도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는지 선두에 서서 동굴에 들어갔다.

“다행히 사람은 없는 듯하구나.”

남궁공자의 뒤를 따라 들어간 어두컴컴한 동굴 안.

맘 같아선 야명주를 꺼내 들고 싶었지만, 주변에 보는 눈도 많은 곳이고, 무엇보다 가까이에 남궁예화가 있기에 안력을 돋워 안을 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뇌의 님은 아시니 상관없지만,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찾아올 수도 있고 말이지.’

“공자님. 횃불입니다.”

하지만 그런 내 불편함을 알아차렸는지 일염이가 곧장 횃불을 만들어 주위를 비춰줬다.

“고맙다.”

그렇게 일염이의 횃불에 의지한 채로 동굴을 걷기를 잠시.

“여기 벽화가 있어요!”

드디어 찾았다는 듯 신나서 외치는 남궁예화의 소리에 일행들이 다 같이 가서 간이 횃불로 벽면을 제대로 비춰보자.

“오…….”

동굴 벽 한쪽에 지도 모양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지도일까요?”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이리저리 선이 그어져 있는 벽화.

그걸 자세히 살펴보면 하얀색으로 채워진 곳곳에 초록색 삼각형이 그려져 있고, 왼쪽 중앙부에 빨간색 표시가 되어 있는데, 그 옆에 장보도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장보도를 찾는 지도로 보였다.

‘뭐, 당연하게도 저기 있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단순히 보물 지도로 본다면 손쉽게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그렇게 쉽게 풀렸으면 이 사달이 날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 뭔가가 숨겨져 있을 게 분명했다.

“일염아, 불 좀 줘봐.”

일단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벽화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호기심.

장보도를 찾는 지도에 어떤 장치를 해놨을지 궁금해 이것저것 시도해 보기로 했다.

“여깄습니다.”

일염이가 건네주는 횃불을 벽화에 가져다 댄 채로 한참을 기다리고 있음에도 변함이 없는 벽화.

“흠, 불에는 변화 없고.”

이어서 횃불을 치운 다음, 물주머니를 꺼내 물로 물감을 지워보려 했는데도 변함이 없었다.

“물에도 변화가 없네.”

뒤이어 벽화 뒤에 검흔을 새겨놨을까 싶어, 손으로 바위의 결을 만져보기도 했고, 혹시 비밀 문이라도 있을까 싶어 벽화에 기를 불어넣어 봤는데, 그림의 표면이 오돌토돌하긴 해도 이 역시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아무것도 알 수 없나.”

사실 이렇게 쉬운 방법으로 찾을 수 있으면 말이 안 되긴 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장보도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한들, 지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공자님.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이 벽화는 대략 40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아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예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안목을 키우려 경매장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다고.”

아, 맞다.

분명 그랬던 적이 있었지?

“잠깐만, 벽화가 400년이나 됐다고? 그렇다면…….”

벽화가 400년이나 됐다는 소식에 뇌리를 스치고 가는 한 생각.

맞을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이왕 이렇게 찾아온 거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레 벽화를 살짝 긁어 맛을 보자…….

“알았다.”

내 생각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뭔가를 알아냈느냐?”

벽화를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알았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나를 의심할 법도 하건만, 조용히 답을 기다리는 남궁공자.

나는 그런 남궁공자에게 긍정적인 화답을 해줬다.

“예, 이 벽화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대단해요. 당 소협! 도대체 벽화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었나요?”

벽화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냈다고 하자, 대단하다며 알려주길 종용하는 남궁예화.

남궁공자의 조카가 아니었다면 남의 노력을 불여시같이 빼먹으려 든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런 눈빛이 아닌 단순한 호기심인 것 같아서 기꺼이 알려주기로 했다.

“이 벽화는 바로…….”

“바로?”

사실 애초에 그런 행동이었다고 해도 상관없긴 했다.

왜냐면 이 벽화의 비밀은…….

“독입니다.”

딱히 숨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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