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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56화 (56/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56화

천하제일세가로 불리는 남궁세가.

그곳에서는 가문 내의 어딜 가더라도 항상 범접할 수 없는 이들을 볼 수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고요한 호수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이도 있었다.

바로 지금.

남궁공자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중년인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고픈 말이 무엇이더냐.”

“제가 여태껏 얘기 드렸잖습니까. 도대체 뭘 들으신 겁니까?”

한숨을 푹 쉬면서도 차마 성질을 내진 못하는 남궁공자.

평소에 그러진 않아도 지금은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만취한 상황이라 실수를 할 법도 했건만, 그저 한탄만 할 뿐 언성을 높이진 않았다.

왜냐면…….

“아버지께선 늘 그러셨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셔서 제 이야기라곤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셨죠.”

지금 남궁공자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중년인.

이 사람이 다름 아닌 남궁공자의 자신의 아버지이자, 남궁세가의 태상가주이며…….

“그래서? 꼬우면 칼부터 뽑거라.”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인 태천검 남궁전유였기에.

“…….”

남궁전유가 어디서 반항이냐는 듯, 으름장을 놓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는 남궁공자.

맘 같아선 시원하게 한번 싸워보고 싶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인 남궁전유는 손속에 자비를 두는 법을 몰랐다.

예전에 남궁전유가 자신의 형인 남궁직유와 동생인 남궁교유를 건방지다는 이유로 반쯤 다져놓은 건, 외부는 몰라도 남궁세가에서는 유명한 일화였으니 말이다.

“뭐,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그래, 네 말은 신화문주가 심마에 빠지진 않을까 걱정된다 그 이야기지? 그리고 굳이 심마에 빠지지 않더라도 지금의 경지를 넘어섰을 때,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고?”

다행히 귓등으로 흘리지만은 않았는지, 남궁전유가 이야기를 요약하자 남궁공자는 신나서 설명했다.

“맞습니다. 지금에야 제 예상보다 훨씬 오래 유지되고 있지만, 슬슬 한계에 봉착했을 겁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미리 대비를 해두어야…….”

“그럴 일은 없다.”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단언하는 남궁전유.

별 말 같지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아니, 왜입니까?”

남궁공자가 자신의 의견이 단박에 잘린 이유를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묻자, 남궁전유는 한숨을 쉬며 답했다.

“분명 나한테 오기 전에 네 스승이나 친우에게도 답을 구했을 터, 걔네들은 뭐라고 얘기하더냐?”

“아버지와 똑같이 단언할 뿐, 딱히 설명해 주진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괜한 걱정 말아라.”

설명을 요구하니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남궁전유.

남궁공자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 이 주제는 그만 이야기하자는 듯 주변을 내리찍는 남궁전유의 기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사천에 장보도가 나타났다지?”

“예, 늘 그렇듯이 진위 여부는 모르지만요.”

“마침 잘 됐다. 네가 사천에 오래 지내는 편이니 오늘 떠나는 길에 예화를 데리고 가주거라.”

남궁예화.

남궁공자의 친형인 현 가주의 늦둥이 딸로, 금지옥엽으로 자랐기에 온갖 사고를 칠 법도 하건만, 언제나 예의 바르고 쾌활하게 지냈기에 더욱이 이쁨받는 아이.

거기다, 용모 또한 천하제일미라 불리는 자신의 언니인 남궁연화를 쏙 빼닮았기에 가히 남궁세가 내에선 싫어하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니, 아직 17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를 거기에 왜 데리고 갑니까?”

당연히 자식이 없는 남궁공자는 남궁예화를 마치 제 자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귀여워했다.

그런데 지금 남궁전유가 그런 예화를 데리고 가라고 하는 건 필시 장보도와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해 조금 언성을 높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명확한 진위 여부는 파악되지 않았다만, 꽤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물었는지 사도련에서 득달같이 달려든다고 하는구나. 그리하여 맹에서도 다들 인원을 파견하길 원하고 있어.”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에 장보도가 나타났으면 모를까.

저 멀리, 한참을 가야 나오는 사천에서 장보도가 나왔기에 남궁전유는 장보도를 가질 수 없을 거라 판단했다.

그러니, 단순히 맹의 요청에 따라 견제한다는 의미로 사절을 보내고 말려고 하는 거였다.

“아니, 그렇다면 다른 인원을 보내면 되잖습니까.”

남궁공자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기에 남궁전유에게 한마디 하자, 남궁전유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다른 인원을 보내면 네가 같이 있어줄 것이냐?”

“…….”

남궁세가의 일원이지만, 그 전에 의선문의 대장로인 남궁공자.

아무리 의선문이 자유로운 행동을 허락한다고 한들, 대장로쯤 되면 쉬이 경거망동할 수 없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장보도 같은 게 나오면 일부러 자리를 피하거나, 아니면 동떨어져서 진료를 보는 게 전부였고, 당연하게도 남궁세가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남궁전유가 예화를 보내겠다는 건 남궁공자보고 같이 있어달라는 소리였다.

무림맹에 속해 있지만, 쓸데없는 일로 사도련과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은 남궁세가는 무인을 파견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일이 잘못되면 가문의 손실로 이어지는 건 당연하고, 괜한 은원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헌데, 때마침 세가에 들른 남궁공자.

현 가주의 동생인 만큼 남궁의 이름을 달고 가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와 동시에 의선문의 대장로였기에 지금 상황에 매우 적합한 인재였다.

상황이 아무리 과열됐다고 한들, 무인들이 의선문을 건드리는 일 따윈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남궁전유는 곧장 남궁공자를 움직이게 손을 쓴 것이다.

……정(情)이라는 이름을 이용해서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자기 손녀를 그런 곳에 보내겠다니 정말 피도 눈물도 없으십니다. 형님께서도 동의하셨습니까?”

“그 팔불출 녀석이 했겠느냐. 워낙 강경하게 나와서 나도 포기할까 싶었다. 헌데, 예화가 직접 가겠다고 하더구나.”

“예화가 말입니까? 대체 왜…….”

“글쎄,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 아마 예화라면 자신이 나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너를 조금 귀찮게 하더라도, 괜한 은원에 얽힐 일 없으니 세가의 사람들은 안전할 거라고 말이다.”

참으로 합리적인 생각.

남궁공자 자신에게 민폐를 조금 끼칠지언정, 세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을 했기에 남궁공자는 남궁예화가 대견스러웠지만, 동시에 위험한 선택을 했기에 용납할 수 없었다.

“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예화는 제가 직접 설득해 보겠습니다.”

말릴 틈도 없이 술잔을 내려놓고 떠나는 남궁공자.

인사도 안 하고 떠나는 모습에 성을 낼 법도 하건만, 남궁전유는 그저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 칠 뿐이었다.

“정이 그렇게 철철 넘치는 녀석이 예화를 설득한다고? 허 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궁전유는 멍하니 창 너머를 바라보다가, 이내 바삐 어디론가 향하는 남궁공자의 모습을 보고선 술잔을 채웠다.

“그리고 그 무정검이 심마에 빠지거나 경지를 뛰어넘는다라…….”

잠시 남궁공자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뒤를 보던 남궁전유는 이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들었다.

“오랜만에 만났더니 퍽이나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 * *

장보도.

숨겨진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지도.

흔히 전대 기인들의 비급이나 영약, 무기 등을 찾을 수 있기에 나타날 때마다 혈겁을 일으키는 무서운 물건이었다.

그런데 웬걸, 객잔주가 말하길 사천에서 장보도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돈다는 것 아닌가?

‘옘병, 왜 하필 장보도냐.’

매번 무림에 등장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주범인 장보도.

그게 무서운 진짜 이유는 실체가 없다는 점이었다.

[분란을 일으키고 싶으면 장보도를 찾았다고 하여라. 그러면 천 리 밖에서도 사람이 모여들지어니.]

어느 서책에서 나오던 격언 중 하나.

이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실제로 장보도로 보물을 찾는 경우는 거의 하늘의 별 따기인데, 등장할 때마다 골치 아픈 일이 터지는 건 거의 확실하다고 보면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래서 신화문으로 가라 했던 건가.’

아마도 그 현장에 내가 투입될 거라는 점이었다.

“에휴.”

“공자님. 벌써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다른 일 때문에 신화문에 보낸 걸 수도 있잖습니까?”

신화문으로 가는 와중에 내가 한숨을 쉬자, 달래주는 일염이.

말은 고맙지만, 슬픈 예감은 십 할 정도 맞다고 봐야 했기에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도착했다.”

5년 전과 별다를 바 없는 신화문의 입구.

처음 신화문의 존재를 알고 나서부터 꽤 빈번하게 드나들었기에 형형색색의 종이 달린 모습이 이제는 익숙하기만 했다.

그런데 익숙해지지 않는 점이 하나 있다면…….

“오늘 암호가 뭐였더라?”

이제는 일염이가 아닌, 내가 직접 암호를 입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적색 2번, 황색 1번, 흑색 4번입니다.”

암호를 읊어주고 자연스레 뒤로 물러나는 일염이.

5년.

길다면 긴 세월, 짧다면 짧은 세월.

그사이 일염이는 하나둘 색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더니, 지금에 이르러선 단 하나의 색을 제외하곤 그 어떠한 색도 구분하지 못했다.

“적색 2번, 황색 1번, 흑색 4번 말이지?”

암호를 입력하기 위해 종을 부여잡는 순간, 갑자기 열리는 문.

“이야, 공자님. 오랜만이시네요.”

“이틀만입니다만.”

“뭐, 사소한 건 넘어가시고 얼른 들어오세요.”

여전히 별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화문주가 나와서 우리를 안으로 인도했다.

“오늘따라 내부가 어수선해 보입니다?”

평소의 적막함은 어디 갔는지 발을 들여놓자마자 느껴지는 소란스러움.

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신화문도들이 이리저리 활발히 돌아다니는 게 어지간히도 바빠 보였다.

“공자님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장보도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고 분주하게 다니고 있죠”

“혹시 오늘 제가 온 일도 그것 때문입니까?”

“역시 공자님. 척하면 척이시네요. 지금이라도 저희 문파에 들어오지 않으실래요? 지금 들어오시면 저희가 파격적인 조건, 월 금 500냥에 공자님을 섭외하겠습니다.”

“아, 안 사요.”

“정말 칼 같아서 마음에 드네요. 뭐, 농담 따먹기는 이쯤에서 하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농담을 그만두고 방문을 닫는 신화문주.

문파가 바쁘게 돌아가는 만큼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듯했다.

“예상하신 대로 당가에서 공자님께 원하는 건 장보도를 찾는 걸 견제하는 일입니다.”

“청성파와 아미파가 가지지 못하게끔 말이죠?”

“잘 아시네요.”

언제나 혈겁을 부르는 장보도.

평소라면 대문파는 남이 가지지 못하게 견제 정도만 나서지만, 경쟁 관계가 극심한 아미파와 청성파가 보기엔 지금 사천에 나타난 장보도는 먹지 못하면 지는 패로 보일 거다.

따라서 탐사에 총력을 기울일 게 분명한데, 만약에라도 둘 중 하나가 장보도를 찾는다면 당가는 재미가 없을 게 분명했다.

따라서 견제를 해야 하는데, 지금 당가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결국 나만 보내는 것일 거다.

……반쯤 포기한 채로 말이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공자님이 직접 장보도를 찾으시는 게 어떨까요? 뭐가 나올진 몰라도 당가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본디 최고의 방어는 공격인 법.

괜히 깔짝대며 견제하지 말고 장보도를 찾는 게 어떻냐는 신화문주에 말에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관심 없습니다.”

“아니, 사천에 명성이 자자한 백독멸악 당지천 공자님이시면 충분히 찾을 수 있으신 거 아닌가요?”

“전 남들이 띄워준다고 해서 제 위치를 망각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실체가 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싶진 않고요.”

“호오, 그렇다면 이건 어떠실까요…….”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은 신화문주가 방 한구석에서 있는 서랍장을 뒤지더니, 이내 서류 한 장을 꺼내서 들고 왔다.

“이건 뭡니까?”

“저희 문도들이 작성한 장보도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신화문주가 건네주는 서류를 자세히 살펴보자, 장보도에 대한 배경을 시작으로 과거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고수들의 행적과 지금 장보도가 나타난 지리적 위치를 비교, 조합해 장보도가 있을 확률을 추측하는 보고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다소 충격적인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건…….”

“어떠십니까? 마음에 동하나요? 저희 문파가 보기에 이번에 나타난 장보도…….”

[……따라서 구 할 이상의 확률로 보물이 존재할 것으로 판명됨.]

“진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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