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52화
재앙.
천재지변으로 인해 발생한 불행한 사고를 뜻하는 말.
아까까지면 모를까, 지금과 같이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면 일개 사람이 손쓸 수 없는, 재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지경이었다.
“아니, 막을 방도는 확실하게 있어. 단지, 그 계획을 위해선 팽 대협이 필요할 뿐이야.”
언제나 그랬듯이 당연하다는 듯 방법을 찾아내는 당지천.
그 방법을 실행하기까지 무수한 위험이 있고, 만약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 터인데, 행동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이유가 뭡니까? 도대체 협의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이기에 창창한 앞으로의 미래를 희생하려 드는 겁니까?’
언젠가 누구에게 했었던 질문.
그와 똑같은 질문을 속으로 되뇌었지만, 홀로 심각한 고민을 하는 당지천을 보고 있자니 끝끝내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팽 대협 대신에 백괴를 누가 상대하느냐인데…… 그건, 상황을 보고 나서 생각해야 할 것 같아.”
여전히 자신의 안위보다 전체를 보는 당지천.
팽구용에게 가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신념에 들어차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기도 하는 한편,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
“팽 대협 대신 백괴만 상대하면 되는 겁니까? 이길 필요 없이?”
이미 당지천을 반쯤 도와줄 생각으로 자신의 역할을 묻고 있었다.
“글쎄, 팽 대협께 여쭤봐야 알겠지만, 어차피 다른 곳에서 지원이 올 시간이 다 되었으니 버티기만 해도 될 거야.”
말 그대로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당지천의 말에 천일염은 생각에 잠겼다.
‘대체 나는 왜 공자님을 도우려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당지천이 어째서 이런 위험을 감수하려 드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째서 도와주겠다고 생각했는지.
천일염으로선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습니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당지천을 돕기로 결정한 순간, 천일염이 당지천의 곁에 있을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그 역할을 하도록 하죠.”
“네가?”
천일염이 선뜻 맡겠다고 하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는 당지천.
당지천은 천일염의 정확한 실력을 모르는 만큼 걱정되는 눈초리로 천일염을 쳐다봤다.
“본디 호위란 본대가 오기 전까지 시간을 벌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이기는 거라면 몰라도 잠시 시간을 끄는 거라면 자신 있습니다. 적이 팽 대협이었다면 고민조차 안 했겠지만, 백괴 정도라면 능히 두 시진 정도는 버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그런 당지천에게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하는 천일염.
그 모습을 본 당지천이 쉬이 안심하자, 무슨 심보인지 경고의 말을 더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공자님 억지에 어울려 드리는 건 이번 한 번뿐입니다.”
당지천에게도.
그리고 천일염 자신에게도 되새기라는 듯 강조하는 말.
무슨 연유에서 이런 말을 뱉었는지 천일염 그 자신도 몰랐지만, 당지천은 그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부탁할게.”
그렇게 천일염이 백괴의 상대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치자, 당지천과 천일염은 걸음을 재촉해 지하실 입구로 돌아왔다.
* * *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지하실 공동.
팽구용은 백괴와 싸우는 도중임에도 여유만만한 모습으로 백괴에게 말을 건넸다.
“왜 그러지? 분명 저번에 봤을 땐, 나 같은 건 쉽게 죽인다고 하지 않았나?”
“…….”
그리고 그와 반대되듯 묵묵히 팽구용의 공격을 막는 백괴.
실력이 부족한 당지천조차도 이대로 싸움을 이어나간다면 일각이 채 지나기 전에 팽구용의 승리로 끝날 걸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맘 같아선 백괴를 처치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만…….’
심히 아쉬운 상황.
허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만큼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천일염이 검을 치켜세우며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뭐야?”
“지금부턴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백괴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으니 공자님을 도와주시죠.”
밑도 끝도 없는 간단한 설명.
한창 잘 싸우고 있던 팽구용으로선 화를 낼 법도 하건만, 팽구용은 당지천이 생각 없이 이러진 않을 거라 보고 곧장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꽤 시급해 보이는구나.”
“예, 한시가 급합니다.”
“그럼 바로 가자꾸나.”
급하다는 말에 곧장 발걸음을 옮기는 팽구용.
당지천 또한 그런 팽구용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천일염이 눈에 밟히는지 쉬이 발을 떼진 못했다.
“저는 걱정 마시고, 어서 가시지요. 공자님.”
그런 당지천의 마음을 아는지 천일염이 삿갓을 매만지며 옅게 웃어주자, 당지천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라, 일염아.”
마지막까지 걱정되는지 미련 섞인 눈으로 천일염을 바라보던 당지천은, 이내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위해 팽구용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분개하는 백괴.
“갈! 내 아무리 팽구용보다 실력이 부족했다고 한들, 네놈 같은 미개한 녀석에게 무시당할 급이 아니란 말이다!”
갑자기 상대하던 팽구용은 자리를 비우고, 웬 수준 떨어지는 호위가 자신을 상대한다고 하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보아하니 저 꼬맹이의 호위인 것 같던데, 내 필시 네놈의 면전에서 저 아이를 머리부터 집어삼키는 걸 보여주마!”
백괴가 울분에 찬 얼굴로 날카로운 손을 들어 올렸지만, 실상 그 속내는 영악하기 짝에 없어서 팽구용이 사라진 지금.
눈앞의 천일염을 쓰러뜨리고는 흑괴를 도와 신화문도들을 정리하고 도망칠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을 펼쳤다.
“고작 일개 호위 주제에 월광조법을 보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바로 한번 보고 난 뒤 살아남은 이가 없다는 월광조법을 말이다.
“…….”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월광조법을 거론했음에도 반응이 전혀 없는 천일염.
백괴가 보기엔 순전히 겁에 질려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천일염이 조용히 있는 건 조금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공자님을 산 채로 잡아 먹는다라…… 그것도 내 눈앞에서…….”
천일염이 실력을 감추기 위해선 굳이 이기지 않아도 되는 상대다.
그러니 적당히 상대하고 말려고 했건만…….
“그러더냐.”
감히 자신의 눈앞에서 당지천을 산 채로 집어삼키겠다는 건방진 말.
그걸 듣고 있자니 천일염은 자신도 모르게 검부터 휘둘렀다.
“그럼 죽어라.”
그것도.
조금 본심을 담은 채로 말이다.
* * *
천일염이 잠시간 백괴를 상대하는 사이, 인질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팽구용과 당지천.
“그래,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하면 되겠느냐?”
당지천이 이동하는 사이에 지금의 상황을 대략적이나마 팽구용에게 설명해 주자, 팽구용은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물었다.
“태정관을 건물째로 흔들어주십시오. 최대한 많이.”
“겨우 그걸로 되는 거냐?”
난데없는 건물째로 뒤흔들라는 주문에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팽구용.
“뇌의 님께서 그러셨잖습니까. 저는 머리 굴리는 놈 중에서도 난 놈이라고. 설명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어차피 제가 틀리면 다른 이도 틀린 것이니 의심은 나중에 하시고 일부터 해주십시오.”
당지천이 그런 팽구용과 눈을 마주치며 설득하자, 팽구용은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뭐, 좋다.”
이어서 납도를 하고 진각을 밟더니 단전 저 밑에서부터 기를 끌어올렸다.
“당가 놈들은 싫어하지만…….”
-쿠쿠쿠쿠쿵.
“너는 꽤 마음에 들었으니 말이다.”
삽시간에 서 있기 힘들 정도로 진동하는 건물.
마치 진도 6의 지진이라도 되는 것처럼 외벽이 갈라지지 않을 정도로만 맹렬하게 흔들렸다.
그런데, 그 진동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반란군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 안을 확인했다.
“백금현 님이 당했다! 모두 불을 붙여라!”
그리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 전파해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이 점점 다가왔다.
허나,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반란군들.
불을 붙이려고 함에도 규칙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내부에 번번이 헛된 시도만 할 뿐이었다.
“저 녀석들이 화약에 불을 붙이지 못하도록 건물을 흔들라고 한 거였느냐?”
건물을 흔들면서도 재밌다는 듯 지레짐작하는 팽구용.
흔들리는 건물에 중심을 잡지 못하겠는 건 당지천도 매한가지여서 바닥을 기며 답했다.
“이건 계획에 없었습니다만…….”
그런데 문득 당지천의 눈에 들어오는 불 하나.
시야가 계속 흔들리는 탓에 자세히 보긴 힘들었지만, 화톳불이 아닌, 웬 불덩이 하나가 화약을 향해 날아가는 걸 보게 되었다.
‘아니, 저게 웬 불덩이야?!’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잠시 이목이 끌렸을 때 끝을 봐야 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흐르는 상황.
당지천이 주변을 둘러보자, 불덩이가 화약을 향해 날아가는 걸 다른 사람들도 봤는지, 반란군 측 무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목숨을 도외시한 채로 화약 밭에 불덩이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반란군.
대의가 실패했어도 동귀어진만큼은 해내겠다는 듯, 흔들리는 건물 속에서 쭈그려 앉은 채 화승총을 들고 있었다.
‘기회는 이번뿐이야.’
하지만, 그들을 비롯해 이곳 모두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렇기에 당지천은 재빨리 독과 암기를 손에 쥔 채로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길 잠시.
-폭발한다 엎드려!
불덩이가 화약에 날아가는 걸 본 반란군 측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성이 튀어나왔고 너 나 할 것 없이 화약에서 멀리 떨어지려 몸을 내던졌다.
‘아직이야…….’
무인들이 배제되어 습격하기 나쁘지 않은 상황.
허나, 아직 반란군이 남아 있었기에 당지천은 경거망동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모두 엎드려!”
건물을 흔들던 팽구용 역시 불덩이를 봤는지, 인질들에게 주의하며 자신 또한 주변의 인질에게 몸을 날렸다.
반란군 쪽 무인들도.
인질들도.
모두가 겁에 질린 채 땅에 고개를 처박으며 쓰러지는 상황.
‘아직, 조금만 더…….’
그런 상황임에도 마치 먹잇감이 가시권에 들어오기 전까지 기다리는 치타처럼 당지천은 숨을 죽이며 인내했다.
그저 하는 것이라곤 실수하지 않게끔 독과 암기를 더 단단히 쥘 뿐.
그렇게 불덩이가 화약에 닿기 일보 직전.
“폭발한다!”
누군가의 겁에 질린 비명과 함께 저마다의 이유로 모두의 신경이 흐트러지던 그 순간.
‘지금!’
당지천 혼자만큼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켜 바람같이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