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51화
곧장 전투가 벌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 천장이 주저앉자,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투.
“이거이거, 웬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가 나서 달려와 봤건만 이런 상황이었나.”
팽구용은 그 속에서 태평하게 삿갓을 매만지고 있었다.
“오셨으면 바로 들어오시지, 왜 신호를 보내고 기다리십니까?”
“원래 불의의 습격만큼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게 없거든. 저기 봐. 참 효과적이지?”
팽구용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상처 입은 왼손을 점혈하고 있는 흑괴.
손가락 몇 개가 꺾이면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인 것을 보면 당장 고쳐 쓰긴 어려워 보였다.
“뭐, 효과적이긴 하군요…….”
왔으면 바로 올 것이지 피리부터 불어서 사람 혼란스럽게 만든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저걸 보고 있자니 뭐라 하기가 좀 그랬다.
“그나저나, 분명 지천이라고 했던가? 그런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나는데, 당가 놈이면서 용케도 이런 데를 제 발로 기어들어 왔구나. 그것도 나를 불렀으면서도 말이다.”
사람 다시 봤다는 듯 팽구용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정말 잘했다.”
이어서 머리를 쓰다듬는 팽구용.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머리를 쓰다듬어지니 좀 기분이 나빴지만, 계속 도망치라는 소리만 듣다가 이렇게 내 공로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긴 하니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도리를 다했을 뿐이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구나.”
재밌다는 듯 옅게 미소를 띤 팽구용이 도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잊고 사는 게 어린아이 입에서, 그것도 당가 놈 입에서 나오다니…… 요즘 강호의 꼴이 말이 아니구나. 그래, 좋다. 어디 한번 무너진 강호의 도리를 같이 세워보자꾸나.”
삽시간에 변하는 팽구용의 기세.
이전에 뇌의랑 같이 있을 때나, 방금까지의 모습이 장난이었다는 듯 건물 자체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화문에서 어쩐 일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같이 싸우는 듯하던데, 흑괴는 그쪽에서 맡아줄 수 있겠소?”
“가능합니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모를까, 조법을 사용하는 흑괴가 왼손을 쓸 수 없는 처지였으니 자신이 있는 듯 이십팔호는 단박에 수락했다.
“그럼, 부탁하겠소”
이십팔호가 쉬이 받아들이자, 육중한 기세를 뿌리며 백괴에게 달려드는 팽구용.
“차륜전 대형으로.”
뒤이어 이십팔호를 필두로 한 신화문도들도 대형을 갖춰 흑괴를 상대했다.
“자, 그럼 흑백쌍괴도 맡겼겠다. 남은 인원은 내가 상대하면 된다는 이야기인가?”
제일 큰 문제를 쉽게 해결해 가뿐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긴장된 눈으로 이쪽을 보는 수십의 무인들.
거기다, 그 뒤로 보이는 세기도 벅찬 반란군을 보자, 절로 욕이 입에 맴돌았다.
“옘병.”
흑백쌍괴가 주는 압박감이 너무 심해서 그들만 잡으면 이길 것 같았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상대할 방법이 막막했다.
‘아니, 저 숫자를 어떻게 이기냐고.’
물경 백은 족히 넘을 듯한 숫자.
지금 내가 가진 암기와 독을 다 합쳐도 일타이피를 하지 않는 이상 가망이 없는 전력이었다.
‘그나마 위에서는 회수라도 해왔는데…….’
지상을 정리할 때는 독은 주워 담기 힘들기에 둘째치더라도 암기 자체는 회수해서 쓰곤 했는데, 지금은 한번 날리면 회수도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이것만은 쓰지 않으려고 했건만, 대안이 없겠어.”
결국, 답은 속전속결뿐이라는 생각에 나는 굳은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염아, 주변에 인질로 보이는 사람 없지?”
지금 눈에 보이는 거라곤 전부 무기를 든 반란군들뿐.
그래도 혹시 내가 보지 못한 인질이 있을까 봐 일염이에게 재차 확인을 거쳤다.
“예, 없습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확언을 하는 일염이.
그 소식에 나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좋아, 그러면 쓸 수 있겠어.’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이제 남은 게 몇 개 없어서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입가에 흰 천을 두르며 빈틈이 없는지 꼼꼼히 살피자, 일염이도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자기도 흰 천을 꺼내 둘렀다.
“확실히 아까는 인질들이 있어서 쓰지 못했으니 지금이 적기로 보이는군요.”
잠시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사이, 채비를 마친 우리 둘.
지하실같이 밀폐된 공간에서 사용하면 우리도 영향을 안 받을 순 없지만, 피독주를 믿고 내가 가진 독 중 유일하게 이중으로 봉인된 독주머니를 꺼냈다.
“일염아, 조심해. 실전에서 써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공자님이 제 뒤통수에 뿌리지만 않으시면 문제없을 것 같으니 잘 뿌리기나 하시죠.”
독주머니를 열자 나타난 것은 흰색 가루 형태의 독.
그건 바로 일전에 내가 녹주석으로 만들었던 극독, 산화베릴륨이었다.
‘다른 독에 비해 양이 많지는 않지만, 사실 많을 필요가 없는 독이지.’
그 자체로도 극독이라 불리는 데 부족함이 없는 베릴륨.
그러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기에 반수 치사량을 높인 대신 전투에서 사용해도 될 만큼 독성이 즉발로 나타나게끔 개량한 물건이었다.
‘그 대신 조금 더 괴로울 테지만…… 너희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위층에서는 인질의 문제도 있었고, 그저 명령을 받는 이들에게 이걸 쓰긴 꺼려졌다.
허나, 지금 저기서 팽구용과 싸우고 있는 사람은 어린아이를 산 채로 잡아먹는다는 흑백쌍괴.
그런 악인하고 손을 잡았다는 걸 알고도 싸우길 다짐한 시점에서 내가 베풀 자비 따윈 더는 없었다.
“일염아, 시작한다.”
품에서 여러 가지 독을 꺼내 산화베릴륨과 반응시켜 독무를 만들자, 당황하는 반란군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꺼끌꺼끌한 감촉에 뒤늦게 입을 막으며 숨을 참아보지만, 이미 중독된 후였다.
“모두 숨을 참아!”
그리고 그건 무인들도 마찬가지.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다들 숨을 참고 독기를 몰아내려고 노력했고, 혹자는 독을 내기로 태워보려고 노력했다.
“켁, 켁! 숨이…… 숨이 안 쉬어져…….”
하지만 일전에 언급했듯이 산화베릴륨은 섭씨 2,000도에서도 안정성을 유지할 정도로 괴랄한 독이다.
저기 있는 흑백쌍괴라면 모를까, 어중이떠중이 취급받는 무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말씀.
그러니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모두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는다!”
예상했던 대로 독무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려는 반란군과 무인들.
“일염아,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자.”
나는 그 틈에 일염이를 대동하고 사람이 있을 법한 곳으로 이동했다.
* * *
위쪽이 그러했듯, 화약이 가득한 공동을 지나자 미로처럼 얽혀 있는 지하실.
“공자님, 이쪽입니다.”
일염이의 안내를 받아 지하실 안쪽으로 이동하자, 손과 발은 묶이고, 눈과 입이 가려진 채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백금현 이 자식 걸리기만 해봐라.’
앞을 볼 수 없어도.
아니, 앞을 볼 수 없기에 화약 냄새와 냉병기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화승총의 폭음을 더욱이 잘 느꼈을 테니,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불쌍한 만큼 지금 당장에라도 풀어주고 싶긴 하다만…….’
허나, 인질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곧장 그들의 구속을 풀어주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과 별개로 괜히 싸우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고, 돌발 행동을 해 낭패를 볼 수도 있어서 그랬다.
그러니 일단 인원수만 제대로 확인하려고 셈을 세던 그때.
“흐흐흐흐…….”
인질들 사이에서 갑자기 스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혹시 몰라 다시금 확인했지만, 인질들은 모두가 입을 막고 있는 상황.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는 스산한 웃음소리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한 발짝씩 나아갔다.
“백금현?”
그런데 웬걸, 백금현이 인질들 사이에서 고개를 떨구고 스산하게 흐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놈이 여기 왜 있어?”
호기롭게 반란을 일으킨 당사자.
게임으로 치자면 보스 몹과도 같은 녀석이었기에 저 안쪽, 화약의 산더미 어딘가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인질들 사이에 숨어 있던 건 어지간히도 의외였다.
‘나중에 일이 끝날 때쯤 가서야 내게 황실에 대해 설교하며 회유를 할 줄 알았는데…….’
지금의 백금현을 보면 신념을 가진 채 반란을 주도했다고 보기는커녕, 단순한 미치광이로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야, 황충이…… 황충이 그럴 리가 없잖아? 그치?”
나와 일염이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백금현은 쭈그려 앉아 있는 채로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러다가 완전히 미쳤는지 점점 격양되어 가는 백금현의 혼잣말.
나는 싸우는 건 둘째치고, 백금현이 왜 이러고 있는지 이유를 물어봤다.
“백금현. 황충이 대체 뭘 했길래 이러고 있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든 백금현이 나를 한참을 보더니 이내 슬픈 눈으로 내게 답했다.
“황충이 날 버렸어…….”
그러고는 두서없이 쏟아지는 백금현의 하소연.
이미 백화상단의 부단주는 어디 갔는지, 논리정연한 말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말의 대다수는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그러나, 영 못 쓸 만한 정보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황충이 널 태정관과 함께 산 채로 날려 버리려고 한다는 거지?”
가히 반평생을 준비하며 뜻을 함께했던 백금현과 황충.
그렇기에 백금현은 자신의 가족들보다도 황충을 더 신뢰했었는데, 전조도 없이 갑자기 배신당했다고 한다.
그것도 단순히 버리는 게 아니라, 여태껏 모아온 화약과 함께 폭사하도록 하게끔 잔인하게 말이다.
“맞아. 내가 황충에게 잘못했어.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게 한 거야…….”
명확한 이유가 떠오르진 않지만, 일단은 날 속이려 드는 걸 수도 있는 상황.
백금현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었기에 한 발자국 물러난 채 생각하고 있자, 일염이가 뭔가를 발견한 듯 백금현에게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팔다리의 힘줄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뭐? 힘줄이 모두 끊겼다고?”
예상치 못한 의외의 증거.
아무리 적을 속이는 것이 능사라고 한들, 반란을 주모했던 백금현을, 그것도 회복조차 불가능한 힘줄을 모두 자르면서까지 날 속이려 들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자, 그럼 상황을 정리해 보자.
백금현이 그렇게 신뢰했던 황충은 백금현의 힘줄을 끊고 달아났다.
그러니, 적어도 황충이 백금현을 죽이려 한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까 백금현에게 들어보니, 황충은 반란군에게 일을 그르치거나, 백금현이 사로잡혔다면 화약을 터뜨려 건물 채로 날리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반란군에게 백금현의 존재를 들키는 상황이 온다면 태정관은 곧장 건물째로 날아갈 거란 이야기였다.
‘옘병, 지금 내가 딛고 서 있는 이곳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는 거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몸에 달린 털이란 털은 죄다 쭈뼛쭈뼛 서고, 온몸에 핏기가 가셨다.
‘시간이…… 시간이 없어…….’
“당장 팽 대협! 팽 대협께 가야 해!”
상황 파악을 마치자마자, 절로 움직이는 몸.
백금현이 있는 곳에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게끔 연막을 가득 던져놓고서 재빨리 팽구용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공자님. 팽 대협을 찾을 때가 아닙니다. 한시라도 빨리 태정관에서 벗어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죽게 내버려 두고? 그리고 이 양이면 태정관만 날아가는 게 아니라 길면 반경 몇 리까지 영향이 갈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아무리 팽 대협이 나선다고 하시더라도 한 손으론 열 손을 막을 수 없는 법. 반란군 전원이 죽음을 각오한다면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팽구용조차도 불가능한 일을 내가 해낼 순 없을 거라 단언하는 천일염.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불가항력이니 도망치라고 설득했다.
“아니, 막을 방도는 확실하게 있어. 단지, 그 계획을 위해선 팽 대협이 필요할 뿐이야.”
하지만 천일염이 알기나 할까.
평소에 나랑 같이 다니고, 화약의 이름값에 지레 겁을 먹어서 모를 뿐, 이 상황을 타개할 아주 간단한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