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50화
당지천이 피리를 불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백금현이 사천을 지배하면 위험해지는 건 자신들도 마찬가지라며 협력하겠다는 신화문도들과 함께 태정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천일염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광경에 그리움에 잠겼다.
‘그래, 그날도 이런 광경이었지.’
당가처럼 남의 일에 함부로 간섭하지 않는 새외무림의 문파, 북해빙궁.
그런 북해빙궁에서도 유난히 별종으로 협의를 따지며 불나방처럼 득달같이 달려드는 한 여인이 있었다.
마치 지금의 당지천처럼 말이다.
-그곳은 너무 위험하다.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무림맹의 인원들이 나설 터이니 이만 돌아가자.
-오라버니께서는 녹림도들이 무림맹이 찾아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 위인들로 보이시나요? 저 혼자라도 갈 것이니 말리지 마세요.
얼음장처럼 차가우면서도 차분함을 유지하는 지극히 냉정한 말투.
하지만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열의와 만용이 같이 깃들어 있었다.
-너의 의지가 그렇다고 한들 네가 가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한 손으로 열 손 못 막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네가 지금 가려는 산채에는 서른이 넘는 녹림도가 있다. 아무리 나라고 한들 그들을 모두 막으며 너를 지킬 순 없을 거다. 필시 이기지 못할 싸움이 될 터이니 포기해라.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의 생각보다 상상 이상으로 강하답니다. 그리고 설령 이곳에서 제 목을 내놔야 한다고 해도 제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포기하세요.
마치 벽을 보고 대화하는 듯 일절의 타협도 하지 않던 여인.
끝끝내 혼자 가는 꼴을 보지 못해 결국 사람들을 끌고서 같이 가게끔 만든 여인.
천일염이 세상의 풍파에 하나둘 잃어갈 때, 가장 마지막에서야 놓게 될 그 여인의 모습을 지금 당지천에게서 조금이나마 투영해 보고 있었다.
-펑!
연신 발포되는 탄환의 비 사이로 화약 암기를 던지는 당지천.
아직 단련이 부족한 만큼 단 한 발만 맞아도 생사를 오갈 수 있기에 긴장을 할 법도 하건만, 죽음을 도외시했는지 그의 발걸음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역시 설화의 아들인가…….’
자식이 부모를 닮는 건 당연하다면 참으로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천일염은 그것에 대해 새삼스레 실감했다.
“갈! 아무리 생각해도 화승총은 용납 못 하겠다! 내 무림에서 썩 꺼져라! 이 사특한 것들아!”
……물론, 동일인이 아닌 만큼 조금 닮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다.
“자, 여러분 당가에서 왔습니다. 모두 밖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화승총을 든 인원들을 암기와 독을 적절히 이용해 정리하고는 인질들을 풀어주는 당지천.
천일염은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여인의 모습을 투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였지.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숨김없이 실력을 드러낸 것도.’
엄연히 따지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
기저부터 쌓아온 이야기가 차이가 있었기에 결정했던 사항이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걸 상기해 보면 두 번이 될 수도 있을 거다.
그러니 언젠가.
언젠가 이전에 그러했듯이 당지천에게도 본 실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한때 그러했던 것처럼 누군가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지키겠다는 생각이 들까?
“일염아, 뭘 그리 생각하냐? 너 그렇게 정신줄 놓고 있다간 총 맞아.”
적어도 지금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별거 아닙니다. 것보다 공자님이나 조심하지요. 저야, 맞아도 금창약 바르면 낫지만, 공자님은 관부터 맞춰야 하실 테니까.”
‘부탁’이라는 이름의 정(情).
그것이 세월이란 풍파에 휩쓸려 점점 바래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 * *
인질을 구하기 시작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밖으로 나가면 바닥에 초록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을 겁니다. 출구를 나타내는 표식이니 그걸 따라가면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협.”
황송하다는 듯 감사 인사를 하고 떠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몇 번이나 봤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가 되어서야 태정관에 있는 인질 대다수를 구출할 수 있었다.
‘화승총만 가진 인원을 상대하는 게 생각보다 쉬워서 다행이었어.’
일염이가 자신은 나서지 않고, 호위에 집중하겠다고 말한 상황.
신화문도들이 도와준다고 한다만 내 의지로 들어온 것이기에 살 떨리는 전투를 경험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그렇게 위험하진 않았다.
‘다른 문파와 달리 독에 대한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어.’
아니, 정확히는 독에 대한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긴 했다.
말 그대로 어느 정도여서 그렇지.
지금까지 상대한 백금현의 병력들은 모두 무인이 아니었고, 단순히 해독제를 먹는 훈련으로 독에 대한 방비를 했다.
아마도 어차피 암기를 맞은 시점에서 이미 해독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인원수가 많기는 했다.
총이 강력한 이유는 검 같은 무기들과 달리 단시간에 익힐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당가의 무기가 무엇이던가.
그 어떤 문파와도 비교를 불가한다는 대량 살상의 결정체, 독 아니던가.
그런데 독에 대한 방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니 그게 나에게는 호재로 작용해 거리가 가까울수록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백호현은 잘 도착했으려나.’
슬슬 지금쯤이면 가문으로 보낸 백호현이 도착할 시점.
상황을 설명할 신화문도 한 명도 같이 갔으니 백호현이 문전박대당할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약간 신경이 쓰여 걱정하고 있던 찰나, 이십팔호가 다가와 말했다.
“공자님. 이제 위쪽은 정리를 마쳤습니다. 이젠 남은 곳은 지하실뿐입니다.”
“벌써 말입니까?”
태정관에 들어오기 전에 일염이랑 논쟁을 한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빨리 정리되는 상황.
신화문도들의 도움도 있고, 적들이 독에 대한 방비도 안 되어 있긴 했으니 예상보다 훨씬 빠른 상황이었다.
“예, 처음에는 그래도 반란군 사이에 무인 몇이 껴 있어서 시간이 걸렸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걸 보아하니 아예 지하실에서 농성하려고 작정한 듯합니다. 아직 구하지 못한 인질 중 가치가 높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건 그에 대한 방증일 겁니다.”
여태껏 싸운 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는 이십팔호의 말.
아무리 독으로 손쉽게 해결했다고 한들, 한 대만 맞아도 치명상인 내게는 살 떨리는 격전이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싸움은 시작도 안 했단다.
“정말 가실 겁니까?”
지금도 위험했지만, 이제는 좀 더 위험할 거란 이십팔호의 말에 천일염이 재차 내 의지를 물어봤지만, 조금 무서울지언정 내 답변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가야지.”
지금 지하실에 어떤 위험이 숨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뿐.
망설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장설 테니 조심히 따라오시죠.”
* * *
창고로 위장한 거대한 지하실 문 앞.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자, 모골이 절로 송연해졌다.
왜냐면 지하실에는 예상했던 대로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무인들과 배는 많아 보이는 반란군.
그리고 화약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동시에…….
“네가 말하던 게 저 쬐끄만 녀석이더냐. 참으로 맛있어 보이는구나.”
“고작 어린애한테 당한다길래 무능하다고 생각했거늘, 당가 놈이면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저 아이는 톡 쏘는 맛이 날까? 아니면 얼굴이 저릿한 맛이 날까?”
“뭐, 먹어보면 알지 않겠느냐.”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는 하얀 의복의 노인과 검은 의복의 노인이 같이 서 있었기에.
“저들은 도대체?”
“흑백쌍괴입니다.”
“흑백쌍괴라면 어린아이를 산 채로 잡아먹는다는 괴물들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십팔호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내 얼굴을 썩어 들어갔다.
‘젠장, 도대체 뭔 수를 써야 흑백쌍괴를 데려올 수 있는 거야?’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흑백쌍괴가 어린아이를 산 채로 잡아먹는 괴인들이라 그렇기보다는 그런 짓을 벌이고도 살아 있을 만큼 실력이 있는, 조법(爪法)의 대가들이기 때문이다.
“공자님. 지금이라도 도망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문도들이 흑백쌍괴 중 한 명을 상대할 순 있어도 둘 모두를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한 명만 상대한다면 이길 수 있단 이야기입니까?”
“그것조차 확신하진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다른 한 명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상대해야 할 것은 저들뿐만이 아니잖습니까.”
한 명이면 모를까, 두 명이면 아예 가망이 없다는 이십팔호.
나 또한 상대할 적이 흑백쌍괴뿐만은 아니었기에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허나, 포기하긴 이른 법.
문 앞에 주저앉아 활로를 모색하고 있자, 문득 어디선가 자그마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 말씀입니까?”
“지금 나는 이 피리 소리 말이야.”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다만.”
갑자기 들려오는 피리 소리가 혹시 음공은 아닐까 싶어 물어봤지만, 전혀 들리지 않는지 의문에 찬 눈으로 날 보는 일염이와 이십팔호.
고개를 빼꼼 내밀어 다시금 안쪽을 보자, 흑백쌍괴조차도 전혀 못 들은 듯했다.
“아이야. 계획은 다 세웠느냐? 그러면 얼른 들어오거라.”
“그래, 우리는 참을성이 좋지 못하단다. 지금 들어오면 적어도 팔다리 하나쯤은 남겨주마.”
그저 나를 보고선 군침을 흘릴 뿐.
“공자님. 저희에게 들리지 않는 피리 소리가 공자님께 들린다면 어떠한 징조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자리를 벗어나시고, 다음에 생각하시죠.”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피리 소리가 들린다고 하자, 다시금 자리를 벗어나길 종용하는 이십팔호.
그러나, 나는 그 피리 소리가 어떠한 의미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굳이 도망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도망치기도 늦었거니와…… 이제 슬슬 올 때가 됐으니 말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누구 하나 말리기 전에 곧장 지하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환희에 찬 표정을 짓는 흑백쌍괴.
“어린 것이 야들야들해 보이는 게 참 맛있어 보이는구나. 더는 못 참겠다!”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는 법. 첫입은 내 몫이다!”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는지, 나를 보자마자 손날을 치켜세우며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공자님! 위험합니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놀란 일염이가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서며 날 밀어냈지만, 그런데도 나는 굳이 피하지도, 그렇다고 막으려 들지도 않았다.
왜냐면…….
-쾅!
단숨에 주저앉는 지하실의 두꺼운 천장.
그걸 통째로 부수며 나타난 한 남자가 대신 막아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웨, 웬 놈이냐?!”
불미스러운 기습에 왼손에 상처를 입고 물러난 흑괴가 당황한 채 외치자, 자욱한 먼지 속에서는 가소롭다는 듯 되묻는 한 남자.
“나?”
어이가 없다는 듯 잠깐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어깨에 걸쳤던 검을 휘둘러 단칼에 먼지를 몰아냈다.
“아니?! 네놈은?!”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겁하는 흑백쌍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왜냐면 천장을 뚫고 내려온 남자는 당연하게도…….
“네놈들을 데려갈 저승사자다.”
악인들에겐 재앙 그 자체인.
일도일협 팽구용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