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49화
어디선가 갑자기 홀연히 나타난 신화문도들.
문주도 아니고 순전히 문도들이니 화승총을 든 인원들과 싸우면서 한 명쯤은 생채기가 날 법도 하건만, 인원을 모두 정리하는 동안 옷깃조차 스친 이가 없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신화문도들에 의해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자, 천일염은 다급히 내 안위부터 살폈다.
역시나 실력이 없진 않은 만큼 신화문도들처럼 생채기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신화문도들과 달리 옷 여기저기에 총알에 스친 자국들이 있었다.
“나는 괜찮아. 그것보다 황충이라는 자는?”
“공격 명령을 내리고선 곧장 방을 벗어났습니다.”
“아쉽네…….”
이왕이면 신화문도들의 손에 썰리길 바랐건만, 안타깝게도 도망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신화문도 중에서도 조장으로 보이는 흑의인에게 감사를 전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무뚝뚝하게 답변하는 흑의인.
“신화문의 이십팔호입니다. 담소를 나누기엔 장소가 좋지 못하니 일단 자리부터 옮기겠습니다.”
자신을 이십팔호라고 소개하고는 곧장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이어서 그 뒤를 하나둘 따르는 흑의인들.
그들이 문을 나가자마자, 잠시간 조용했던 태정관 내부가 소란스러워졌다.
-살수다! 살수가 있다!
-지원 요청해! 입구 쪽을 틀어막아!
한동안 소란스러운 고성과 폭음이 몇 차례나 오갔을까.
삽시간에 복도를 확보했는지 태정관 내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조용해졌다.
오직 방으로 들어오는 이십팔호의 발소리만 들릴 정도로 말이다.
“복도를 확보했습니다. 빠르게 이동하시죠.”
“알겠습니다.”
복도가 안전하다는 말에 쭈그려 있던 백호현의 뒷덜미를 잡고 이십팔호의 뒤를 따라 문밖에 나섰다.
“이쪽으로.”
복도에 발을 내딛자마자 안내를 시작하는 이십팔호.
일전에 들어왔던 길이 미로처럼 얽힌 길임에도 막힘없이 나아가며 단숨에 주파했다.
-크헉!
-도,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녀석들이야!
“무, 무서워요…….”
“이쪽은 안전하니까 잘 따라오기나 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간간이 비명과 폭음이 들려오자, 누군가 갑자기 습격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백호현은 두려움에 떨었다.
허나, 그런 백호현의 상상과 달리 우리는 태정관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까지 흑의인들을 제외한 사람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렇게 태정관을 벗어나 조금 거리가 있는 골목에 들어서자, 드디어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아이고, 십년감수했네.”
일염이를 믿었기에 긴장감이 없긴 했지만, 다소 위험했던 상황.
신화문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부상 하나쯤 달고 나왔을 수도 있었으니 참으로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도대체 내가 뭔 짓을 했다고 저래?”
화승총이 사특한 무기라고 모욕하긴 했다만, 어디까지나 그건 불려온 뒤 일어난 일.
미친 것도 아닐 텐데 굳이 가만히 있는 나를 불러서까지 건드리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혼잣말하자, 이십팔호가 대답해 줬다.
“지금 백금현은 사천의 주요 인물들을 각양각색의 이유로 태정관에 모은 뒤 인질로 삼고 있습니다. 공자님이 선정된 이유는 별다른 이유가 있기보단 순전히 인질로 삼기 편하다는 판단에 공자님을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저를 말입니까? 저를 인질로 잡아봤자, 당가의 분노만 살 텐데 그걸 한단 말입니까?”
“애초에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겁니다.”
간단명료하게 상황을 정리한 이십팔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성적인 판단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의 생각을 어떻게 읽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건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는 점인가?’
여차하면 처분할 테니 투항하라고 으름장을 놓던 황충의 말이 순전히 위협이라는 걸 깨달으니
“그럼 신화문에서 여기 와 있던 이유가…….”
“맞습니다. 그에 대한 정보 수집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보를 모아본 결과,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만 신화문에서는 백금현의 목표를 사천의 지배로 보고 있습니다.”
단순히 황가를 향한 반란이라고 생각했건만, 내 바람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백금현의 목표.
그것만 들었을 때도 굉장히 머리가 아픈 상황인데, 지금 나를 인질로 붙잡으려 했던 걸 상기해 보면 더 머리가 아팠다.
“설마 문파까지 포함해서 말입니까?”
“예, 청성파와 아미파와는 인질을 잡지 않고, 따로 손을 잡은 걸 파악했습니다. 아마도 공자님을 인질로 삼을 수 있던 건 청성과 아미를 믿고 있어서라고 생각됩니다.”
그냥 상단에서만 나섰다면 모를까.
사천에 있는 대문파 3개 중 2개를 섭외했다면 사천의 실효 지배라는 목표가 단순히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니었다.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백금현이 준비를 굉장히 잘했습니다. 뒷일은 몰라도 한순간 사천을 장악하는 것이라면 칠할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무조건 막아야 하는 상황.
만약 백금현이 사천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기라도 하면 당가에게는 치명적일 거다.
지금 당장이라면 어찌어찌 괜찮을지 몰라도 5년, 10년 동안 돈줄이 죄이다 보면 어느샌가 당가는 말라 죽을 게 분명하니까.
“공자님. 도망치시죠.”
“저희도 문파에 연락은 넣어놨으니 전각까지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상황임에도 일염이와 이십팔호는 전각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솔직히 따지자면 백화상단만으로도 내 수준을 뛰어넘은 일.
청성과 아미가 그 뒤를 봐준다면 내가 해결하기엔 많이 벅찬 일이긴 하다.
일염이와 이십팔호도 그걸 알기에 내 안위를 걱정해서 하는 소리일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전의 초석 광산만큼은 못하겠지만, 지금 태정관에 쌓인 화약의 양이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할 테니 빠르게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일염아, 너는 얼마나 강하냐?”
유감스럽게도 내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 아니었다.
“얼마나 강하냐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상황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소리.
그런데도 내 말의 의미를 곧장 파악한 일염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허튼 생각하지 마시죠. 공자님은 공자님의 안위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조금 싸늘하다 싶을 정도로 덤덤한 목소리.
어쩌면 일염이가 보기엔 지금의 나는 단순히 불나방으로 보일지 모른다.
“공자님이 한때 입버릇처럼 하시던 이야기가 있으시잖습니까. 천하제일인이 되어 마음 가는 대로 살겠다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의협심도 좋지만, 이전과 상황이 다릅니다.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공자님이 들어가시게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원론적으로 보면 일염이의 말이 맞았다.
대기만성을 할 수 있다고 한들, 지금의 나는 약하다.
거기다. 일전에 언급했듯 나는 선인도 악인도 아니다.
어느 무협지 주인공처럼 의협심이 넘치는 협객은 더더욱 아니었다.
허나…….
“지금 걸 보고도 무시하겠다면 천하제일인이 되어봤자 의미 없어.”
그 어떤 무기든 그것이 힘없는 자를 향한다면.
더군다나 그것이 만든 이의 바램과 다르게 사용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 눈에 띄었다면.
나는 결코 외면하지 못하겠다.
아니, 결코 외면하지 않을 거다.
“평소엔 논리적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왜 그렇게 비이성적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시는 건 좋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공자님을 지킬 자신이 없습니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을 왜 감정에 치우쳐 앞뒤 안 가리냐는 듯 타박하는 천일염.
호위로써 걱정하는 건 나도 이해하고 있다만, 감정 때문에 움직인다는 것은 조금 왜곡된 이야기였다.
나는 그걸 알려주기 위해 이십팔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만약 저들의 계획이 실패한다면 태정관에 쌓인 화약을 통째로 날려 동귀어진을 노릴 겁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공자님 말이 맞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언하는 이십팔호.
아무리 황실이 약해졌다고 한들, 반란을 일으킨 자의 구족을 멸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기에 백금현에게는 어차피 뒤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재라도 뿌리고 갈 게 분명했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당가에서 인질들을 고려할 거라고 봐?”
그런 상황에서 당가가 직접 나선다면 필시 인질들의 안전 따윈 알 바 없고, 백금현을 척살하는 데 주력할 거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태정관에 있는 모든 화약이 폭발해 인질들을 싸그리 날려 버리겠지.
아니면, 안에 인질들을 무시한 채 태정관 전체에 독을 풀어 전부 다 몰살시킬 수도 있을 거다.
나는 그 꼴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니 혼자서라도 갈 거야.”
계속 만류하는 일염이에게 혼자서라도 간다고 확실한 의지를 전하자, 일염이는 이제 최후통첩이라는 듯 나를 어르고 달래려 했다.
“공자님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셨다는 것만으로 대견스럽습니다만, 여기까지만 하시죠. 공자님은 이미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물러나라.
이 얼마나 달콤한 속삭임인가.
“사정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알아버린 이상 난 도망치지 않아.”
허나, 그런 말 하나에 타협하기엔 내가 온 걸어온 길이 많이 험난했다.
“내게 최선은 이 방법뿐이야.”
그 어떤 말에도 타협하지 않을 거라는 의지 표명.
그것을 듣고 있던 일염이는 설득하기를 포기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
“공자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다만, 이전과는 엄연히 상황이 다릅니다. 자칫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알고 있어.”
“순전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생사의 경계에 서보지 않은 이는 목숨을 건다고 쉬이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신다면 바로 이야기하십시오. 곧장 안전한 곳으로 모셔 드리겠습니다.”
“명심할게.”
“행여 망설일까 봐 말씀드리는데 도망치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니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생존 본능을 이겨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누구나 목숨을 건다고 쉬이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주지시키며 언제든 나에게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염이.
일염이는 내가 오기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만약, 그런 생각이 든다면 꼭 말할게.”
하지만 난 도망치지 않을 확신이 있었다.
왜냐면…….
“어디까지나 그런 생각이 든다면 말이야.”
목숨을 거는 건 이미 한번 해봤으니까.
물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한참이나 달랐다.
‘지금은 기댈 구석이 없는 건 아니거든.’
아무리 신념에 따라 무대포로 들어간다고 한들, 계획이 없었겠는가.
언제나 인생엔 최후의 보루가 있는 법.
나 또한 얼마 전에 팽구용에게 받았던 피리를 꺼내 들었다.
“피리?”
그게 웬 피리냐는 듯 쳐다보는 천일염.
이런 상황에 꺼내 든 만큼 예사롭지 않은 물건임을 직감적으로 눈치채고 설명을 요구하는 듯했지만, 나는 그런 천일염에게 미소 한 번으로 설명을 대신하며 힘차게 피리를 불었다.
-삐이이익!
부디 나의 간절함이 사천에 널리 퍼져 나가길 바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