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48화 (48/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48화

독살.

인간의 역사에서 정적을 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범인이 가장 안전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라 가장 애용됐던 암살법.

왜 은수저가 모든 독을 가려낼 수 없음에도 권력자들이 꼬박꼬박 은수저를 썼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독살만큼 쉽게 막히는 암살법도 없었다.

왜냐면 몇 년에 걸쳐 죽이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독살에 쓰이는 독은 손가락으로 콕 찍어 맛만 보아도 죽일 만큼의 극독을 썼기에, 하인에게 먼저 먹여보면 독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변칙적인 방법으로 생긴 게 독살용 찻주전자.

이 주전자는 보이지 않지만, 층이 2개로 분리되어 있어서 서로 다른 용액을 담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두 개의 용액은 찻주전자의 어느 부위를 손가락으로 막음으로써 기압 차를 이용해 하나씩 꺼내 부을 수 있다.

즉, 물과 독을 함께 넣어놓고 사람에 따라 다르게 따라줄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런데 지금.

그 독살용 찻주전자가 내 눈앞에 있었다.

“공자님. 차가 식기 전에 드시지요.”

일염이도 호위이기 전에 손님이라고, 식사는 몰라도 차는 대접하겠다며 손수 차를 따라주는 황충.

솔직히 처음에는 우연히 비슷한 찻주전자를 내놨을 거라고, 이건 독살용 찻주전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허나, 내 바람이 무색하게 황충은 나와 일염이의 차를 따를 때, 찻주전자의 뚫린 서로 다른 구멍을 막으며 따랐다.

이는 기압 차를 이용해, 서로 다른 용액을 잔에 따르기 위한 행동이었으며 저 찻주전자가 독살용 찻주전자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근데 이걸 대놓고 온 이유가 뭐지?’

다른 거면 몰라도 독 하나만큼 자타공인 천하제일인 당가.

당연히 독살용 찻주전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내놓는 건가? 들켜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잠시 그 이유에 대해서 추측해 봤지만, 어떤 연유에서든 대놓고 이럴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문득 드는 생각.

애초에 용독술에 도가 튼 이들이 있는 곳이 당가인데, 거치적거리게 찻주전자를 쓸 이유가 있을까?

‘아, 그러네. 생각해 보니까 당가에서는 볼일 없는 거구나?’

만약 당가에서 독을 쓸 거라면 다른 방법이 워낙 많아서 찻주전자는 고려 대상에 오르지도 않았을 거다.

남들이 쓰는 걸 본 적이 있으면 몰라도 말이다.

‘식견이 좁은 어린애라 무시하는 건가? 근데 그렇다기엔 일염이도 같이 있는데…….’

당가의 호위라고 한들, 어차피 무림인.

황총이 생각하기에 무림인이 보기엔 힘든 물건이라 생각해 그랬을 수도 있다.

“오늘따라 차가 별로군요.”

명백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독살이 의심되는 상황.

당연하게도 나는 차를 마시길 거부했고, 대충 상황을 보고 있던 일염이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안색을 굳히는 황충.

“아무래도 저희 준비가 부족했나 봅니다.”

얼핏 들으면 손님 대접이 잘못됐다고 생각될 만큼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쉬이 차를 마시지 않자 안타까워하는 눈치였다.

‘무슨 속셈이지?’

황충이 왜 자꾸 그러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상황.

그러나 이유는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만큼 일단 자리를 벗어나는 데 주력하려 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들통이 나다니 말입니다.”

“뭐?”

황충이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튕기자, 사방에서 갈색 무복을 입은 인원들이 들이닥치며 우리를 포위했다.

일염이도 곧장 황충에게 찻잔을 집어 던지며 내 앞을 막아섰지만, 저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갔기에 일염이가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다.

“도대체 이게 무슨…….”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미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

일염이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황충이 말했다.

“저희는 공자님을 인질로 삼으려고 한 것뿐이지,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호위에게 준 차도 독살하려 준 것이 아니라 군자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투항하시지요.”

투항은 개뿔.

너 같으면 남의 차에 독을 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놈의 말을 믿겠냐고.

“뭐, 사실 투항하지 않으셔도 상관없긴 합니다.”

투항하라는 소리에도 내가 움직임 없이 가만히 있자, 다시금 손가락을 튕기는 황충.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인원들은 그 신호에 맞춰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어린애를 죽이고 싶진 않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습니다.”

여차하면 죽일 마음도 있으니 순순히 투항하라는 경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단전 밑에서 화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왜냐면…….

“갈! 무림에 화승총이 웬 말이냐!”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

그건 다름 아닌 무림에서 보기 힘든 화승총이었기에.

“자고로 무인이라면 자신의 신념이 담긴 무기로 무를 나눠야 하거늘, 그런 사특한 것에 기댄단 말이냐!”

삼류와 이류 수준의 무인은 쉬이 죽이고, 일류의 무인도 사람이 모이면 충분히 죽이는 무서운 물건.

그럼에도 무협지에 화승총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화승총에 필수인 화약은 관아에서 금지한 물건이었고, 화승총으로는 고수들을 이길 수 없었으며, 그 무엇보다 멋이 없었다.

자, 한번 상상해 보자.

화승총으로 싸우는 무림인?

게다가 쓰는 무공이 화승총 장전, 조준, 격발?

‘어후씨.’

그딴 게 어떻게 무협이겠는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속이 메스꺼운 게 가히 피를 토하며 심마에 빠질 것만 같았다.

“공자님. 지금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이신데 도발은 좀 그렇지 않으십니까?”

“아, 맞다.”

주위를 둘러보니 인상을 뻑 쓴 채로 날 조준하고 있는 인원들.

자신들의 무기를 보고 무어라 지적을 하니 다소 화가 나 보이는 모습들이었다.

‘이런…….’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될 이들의 심기를 건드리다니,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였다.

하지만 원래 누구에게나 발작하게 만드는 게 있는 법.

나한테는 화승총이 그러한 물건이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무리 사실이라도 말조심을 했어야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반란을 준비하는 건 대충 눈치챘지만, 화승총을 나한테 들이댈 줄은 몰랐지…….’

“거, 다들 미안합니다.”

아쉬운 놈이 우물 파는 법이라고 했던가.

별로 사과하고 싶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과열되길 바라진 않았기에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사과했다.

“공자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

허나, 그런 내 기대와 달리, 날 포위하던 이들은 하나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쏴라.”

에라이, 속 좁은 녀석들.

제 한 몸 충분히 지키기 쉬운 일염이와 다르게 방해만 되는 나는 품에서 연막을 꺼내 던지며 식탁을 쓰러뜨려 벽을 만들었다.

-탕! 탕! 탕!

그러자, 곧장 쏟아지는 탄환의 비.

다행히 식탁이 고급품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염이가 일일이 쳐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나에게까지 날아오는 탄환은 없었다.

‘화승총은 재장전까지 평균 20~30초 걸렸었지 아마? 그러니 지금이 도망칠 기회지만…… 아까 봤던 화승총의 개수치곤 총성이 적어. 도주를 고려하고 있는 건가?’

정확하지는 않은 상황.

도주를 시도해 볼 순 있겠지만, 일염이가 확실히 지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일염이가 알아서 대처했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에 선택지에서 배제했다.

그렇기에 연막이 사라지기 전에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우는 게 맞기에 머리를 굴려보려는 찰나…….

“히, 히익!”

옆에서 들려온 비명에 반사적으로 암기부터 쥐었다.

“뭐야? 백호현이었잖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겁에 질린 듯. 양팔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땅바닥에 고개를 박고 있는 백호현.

그런 와중에도 목소리에서 죄송스러움이 묻어나는 게 단순히 공포에 질려 사과하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야, 네가 어떻게 알았겠니. 사과할 필요 없어.”

저번에 봤을 때, 겁이 참 많아도 머리는 꽤 돌아갔던 백호현.

그 기억을 떠올려 본다면 아마도 백호현은 이런 상황에 일조했다는 것에 사과하는 걸로 보였다.

“고, 공자님은 저랑은 두, 두 살밖에 차이 안 나시는데…….”

“됐고, 미안해할 필요 없으니까 몸이나 잘 간수해.”

대충 신경 쓸 것 없다며 손사래를 치며 백호현을 만류하자, 백호현은 곧장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저, 저는 황충이 공자님을 부른 게 도, 독살하려 그랬다는 걸…… 아, 알고 있었어요…….”

“그래? 황충이 말해준 거야?”

“아, 아니요…… 그, 그냥 저를 부를 이유가 그것밖에 없었어요…… 저, 저번에 공자님이 오셨을 때도 못 나오게 했었고…… 부, 분명 뭐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말을 하면서도 점점 작아져만 가는 백호현의 말소리.

연신 울리는 시끄러운 폭발음에 묻힐 법도 했건만,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백호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뜻이 확실히 다 전해졌다.

“그, 그래서 죄송합니다…….”

“네가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죄송해하지 말고, 지금은 여기서 나가는 것만 생각하자.”

“그, 그거라면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고작 10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정도로 씁쓸한 얼굴을 하는 백호현.

“저, 저는 아직 쓸모가 있어서 지금 죽이진 않을 거예요…… 고, 공자님의 인질로 잡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죠…….”

공포에 떨면서도 자신의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걸 보면 참으로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그, 그리고 나가실 때 일이 어떻게 돼도 지하실만큼은 가지 마세요…… 화, 황충이 거기에 뭔가를 잔뜩 숨겨놨어요…….”

뭔가를 잔뜩 숨겨놨다.

이는 필시 화약을 숨겨놓은 곳이 지하실이라는 이야기일 거다.

“그래, 고맙다.”

비록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작은 정보라도 주려고 노력하는 백호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백호현에 대한 측은지심이 들었기에 피독주를 하나 건네주었다.

“이, 이건…….”

“피독주야. 지금부터 독무를 뿌릴 건데 행여 다칠 수도 있으니까 잘 간직하고 있어.”

“예, 예…….”

백호현이 피독주를 품에 잘 갈무리하자, 나는 품에서 독들을 꺼냈다.

방 밖에 얼마나 많은 적이 있는지 모르는 상황.

내가 가진 무기라곤 제한된 숫자의 암기와 독뿐이었기에 최대한 아끼는 게 좋았고, 필연적으로 많은 양의 독이 필요한 독무를 뿌리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수라고 한들, 가랑비에 옷이 젖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야. 무인을 상대하는 데 무인을 대기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지금은 아껴야 해.’

나를 지켜주는 건 일염이뿐.

지금은 화승총을 든 인원들밖에 없지만, 밖에는 무인이 있을 수 있으니 지금은 힘은 아끼는 게 좋은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독 몇 가지를 배합해 독무를 뿌리려는 찰나.

“컥.”

영문 모를 신음을 뱉으며 하나둘 쓰러지는 적들.

‘뭐, 뭐야?’

갑자기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식탁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 보니 낯설면서도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 흑의인들이 화승총을 든 인원들을 단숨에 처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신화문이 왜 여기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