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45화
현대에 있을 때도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미쳐 돈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
연구원들 중에서도 그러한 부류가 가끔 있었는데, 하고 싶은 연구를 하기 위해선 결국 그만큼의 돈이 필요했기에 경제관념을 배우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디서 돈이 무한정 나오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 후계 경쟁에서 이기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구나.”
정확한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지금의 상황을 요약해서 설명해 주자, 목함을 통째로 내어주는 장소산.
“그럼 날 도와주면 이걸 주마.”
일이 성공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수만 냥이 들어 있는 목함을 통째로 내밀었다.
“아니, 이걸 통째로 주시면 대인은 어떻게 생활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나중에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습니까?”
조건도 모른 채 목함을 받았다면 모를까, 단순히 화약의 개량을 도와달라는 일에 수만 냥이나 받는다는 건 내 기준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 도와달라고 하는 게 필요한 일 아니냐?”
“아니, 그렇긴 한데…….”
“그럼 됐다. 산속에 틀어박힌 사람이 뭔 돈이 필요하겠느냐. 그저 먹을 것만 먹고 개인적인 연구하는 데 쓰면 그게 진짜 필요한 것이지.”
무려 몇십 년을 산속에 틀어박혀 있었다던 장소산.
그간 어디 한 군데 가지도 않고, 화약을 만드는 데만 몰두해서 그런지 돈에 대해 초탈한 모습을 보였다.
“분명 너한테도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했거늘, 왜 이렇게 만류하느냐.”
왜 그러긴.
나쁜 놈 호구 잡는 건 대환영이지만, 악하지도 않은데 순순히 호구 잡혀주면 괜히 내가 나쁜 놈인 것 같아서지.
“아, 혹시 다른 것들도 필요해서냐? 잠시만 기다려 보아라.”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조금 그랬습니다. 보상은 충분하니 얼른 화약부터 보시죠.”
이 정도 호구 잡히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뭔가를 또 꺼내오려는 장소산.
그런 장소산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 화약의 개량부터 나섰다.
* * *
화약.
무림인들이 쓰는 무기가 아닌, 무공을 배우지 않은 관군들이 주로 사용하는 전쟁 병기.
기의 수발이 자유로운 고수라면 모를까, 어중이떠중이들 정도는 손쉽게 쓸어버릴 수 있는 원천이었기에 관에서 엄금하고 있는 물건이다.
당연히 양민들에게도 치명적일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기에 화약의 개량법을 온전히 알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장소산이 요청한 게 화약의 위력을 올리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대인께서 원하시는 게 화약이 쉬이 섞이지 않게끔 해달라는 것 맞으십니까?”
“그래, 네가 만든 것처럼 말이다.”
내가 건넨 화약 암기를 아까부터 계속 흔들고 있는 장소산.
“알고 했는지, 모르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본디 화약이란 이렇게 휘저으면 폭발하지 않는다. 그런데…….”
-펑!
이쯤이면 됐다 싶었는지 장소산이 흔들고 있던 암기에 불을 붙이자, 암기가 폭음을 뿌리며 사라졌다.
“네가 만든 물건 화약은 그러지 않더구나.”
장소산은 그런 암기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전에 언급했듯 흑색화약은 무연화약과 달리 초석과 숯, 그리고 황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그런데 현대에서 사용되지 않는 만큼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수십 번 흔들고 나면 곧장 못 쓰게 된다는 거였다.
브라질 땅콩 효과.
다양한 크기의 고체 물질로 된 혼합물을 흔들면 입자 크기에 따라 층이 나뉘는 현상.
흔히 시리얼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제품을 운반하고 나면 층별로 나뉘어 있기에 다시 섞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여기서 문제는 어떤 것이든 다시 섞어주면 쓸 수 있게 되지만, 화약의 경우 다시 섞다가 폭발할 수도 있고, 제대로 섞이지 않으면 불발이 계속 나며, 적의 기습에 대응할 때처럼 급하게 써야 할 때는 못 쓴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코닝이라는 결정화 과정을 거치며 그 문제를 해결했는데, 지금 장소산이 원하는 것이 그 코닝 방법이었다.
“알려줄 수 있겠느냐?”
“흠…….”
알려주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단순히 코닝 정도라면 알려주기로 맘을 먹었고, 과정 또한 복잡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다만,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기에 금방 가르쳐 드릴 수 있다만, 한 가지 약조해 주셔야겠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백화상단에는 제가 알려 드린 화약을 공급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백화상단에 말이냐?”
내가 예상했던 대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화약은 백화상단을 통해 운반되었는지 의문을 표하는 장소산.
그러다가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별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뭐, 그러마. 원래 생산되는 화약은 백화상단이 운반하기로 했지만, 이건 상등품의 화약이니 기별을 넣어서 따로 운반할 인원을 보내달라고 하마.”
다행히도 별다른 고민 없이 쉬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백화상단과는 연줄이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화약을 조금만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알겠다.”
잠깐 기다리자, 화약을 가져온 장소산.
나는 그 화약을 건네받아 코닝하는 방법을 손수 알려줬다.
“처음엔 화약과 물을 잘 섞어서…….”
코닝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화약을 통째로 물로 잘 반죽한 다음, 균일한 작은 알갱이로 만들면 된다.
그렇게 되면 브라질 땅콩 효과가 나타나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
입자가 다르기에 벌어지는 일이라 입자를 똑같은 크기로 만들면 된다는 발상.
누구나 한 번쯤 할 법도 하지만, 물에 닿은 화약은 못 쓰게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그런지 이 방법이 고안되기까지는 화약이 개발되고 대략 2세기 정도 걸렸었다.
“……해서 이렇게 하면 화약이 못 쓰게 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시연을 마치자 넋을 놓은 채 그 과정을 보기만 하는 장소산.
“대인? 듣고 계십니까?”
동상처럼 굳어버린 장소산의 앞에서 손을 흔들자, 장소산은 그제야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고작 12살짜리가 이걸 만들었다길래 내심 순전히 우연 덕이라 생각했거늘, 반평생 연구한 걸 이리도 쉽게 해결하다니 정말! 정말 대단하구나!”
별거 아닌 일임에도 감탄을 연발하는 장소산은 이내 나를 붙잡아 들어 올리고는 비행기를 태웠다.
“화약을 물로 반죽했어야 할 줄이야…… 화약과 물을 상극이라 절대 닿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 생각이 연구를 방해하는 것이었어. 네가 아니었다면 평생을 몰랐겠지.”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듯 비행기를 태운 채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장소산.
왠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라 방해하고 싶진 않았는데 하도 빙글빙글 돌아대니까 멀미가 나서 장소산의 얼굴에 토할 것만 같았다.
“대인…… 어지럽습니다…… 내려주시죠.”
“크흠,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내려주는 장소산.
눈앞이 핑핑 돌아 그대로 주저앉는 와중에도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이게 이렇게 흥분할 일인가?’
화약의 개량이 기쁠 수는 있긴 한데, 엄연히 수만 냥을 주고서 배우는 일.
작은 철광산의 반이나 살 수 있는 돈을 내고 받는 건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애초에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과정만 거치면 되는 상황.
내가 반평생 연구했던 연구를 남이 손쉽게 풀어내면 허탈함부터 들 만도 했는데 장소산에게서는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화약을 개량했다고 좋아하시는 걸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만, 대가로 수만 냥을 지불했는데 그렇게 좋아하실 일입니까?”
“쯧, 쯧, 쯧.”
질문을 듣자마자 혀를 차는 장소산.
도대체 왜 그런가 싶어서 보고 있자니 나한테 훈수를 두는 게 아닌가?
“연구도 좋지만,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기르지 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거다. 비록 지금은 화약이 무기로밖에 쓰이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양민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 되지 않겠느냐? 그때가 오면 너는 이 개량법을 고작 몇만 냥에 넘긴 네 아둔함을 원망하게 될 거다.”
그것도 돈 관련 문제로 말이다.
‘아니, 딴 사람한테 들으면 몰라도 영감님한테만큼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분명 돈이 든 목함을 건넨 건 장소산인데, 자신부터가 얼마인지 정확히 모르는 눈치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이 개량법이 수십만 냥의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하면 말하지나 말든가, 그걸 내게 주지시키는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속내를 곧이곧대로 내뱉을 순 없었기에 화제를 돌렸다.
“화약이 일상생활에 도움이 된다니, 대인께선 어떤 방식으로 쓰일 거로 생각하십니까?”
“연구하고 있긴 한데 아직은 모른다.”
주변을 둘러보자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잡동사니들의 정체.
이것들은 다름 아닌 장소산이 화약을 이용하려고 만든 발명품들이었다.
“허나, 언젠가 내가 아니더라도 후대에서 쓸 방법을 만들지 않겠느냐? 그리고 혹시 모르잖느냐. 언젠가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강한 무기를 만들게 된다면 사람들이 서로가 무서워 싸움을 멈출지.”
‘강한 무기로 인해 서로가 무서워 싸움을 멈춘다라…….’
어디서 참 많이 들은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듣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어떻게 해보지도 않고 그리 단언하는 게냐?”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시간에 튀어나온 답변에 장소산이 성을 냈지만, 장소산의 바램과 달리 현실은 냉혹하기 짝에 없었다.
공포의 균형.
공포를 이용해 상대방과의 전쟁을 막는 현상을 이르는 말.
대부분의 무기 개발자들이라면 한 번쯤 꿈꿔봤던 현상이었다.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했던 노벨도.
개틀링 건을 개발했던 개틀링도.
그리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던 한 화학자도.
모두가 공포의 균형을 이루리라 생각하며 강력한 무기들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건 한참 뒤에 깨닫게 됐지만 말이다.
노벨과 개틀링이 원했던 공포의 균형은 비로소 핵무기가 개발되고서야 모습을 드러냈으나, 핵무기조차도 잠시간의 평화를 가져다줬을 뿐, 완벽한 평화는 이뤄내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균형이란 언젠가 깨지기 마련이었고.
무엇보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보다 강한 이가 보여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무를 확인하겠다며 달려드는 것이 무인입니다. 공포를 잃은 이들에게 강한 무기란 그저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동물이었다.
“허, 그러더냐…….”
평생을 연구해 온 사람이 면전에서 의견을 반박당했으면 싸울 법도 하건만, 장소산은 어린애와 드잡이할 생각은 없는지 그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뭐, 사실 겪어보기 전까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선의를 행하는 일이 악행이 된다는 건, 직접 느껴보기 전까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괜히 언쟁을 벌이지 않고 입을 다물려고 할 때, 문득 잡동사니의 산에서 광택이 나는 금속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저건? 설마 티타늄인가?’
황가의 지원을 받으며 이것저것 만들어내는 장소산.
발명을 위해 여러 금속을 일일이 찾아봤을 테니 티타늄이 잡동사니 안에 섞여 있어도 무리는 아니겠다는 생각에 곧장 물었다.
“대인, 혹시 은백색의 가벼운 철인데, 단독으로 쓰면 무르다가도 철과 같이 쓰면 강해지는 그러한 철을 알고 계십니까? 그것만 찾으면 제가 생각하는 암기를 만들 수 있는데…….”
티타늄에 대해 설명하자,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장소산.
대충 반응을 보아하니 내가 상상 속의 광물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대인께서도 모르시는군요.”
어쩌면 한꺼번에 두 개의 일을 처리할 수 있었기에 실망을 했지만, 인생사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아니다. 신기해서 웃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장소산이 뜻밖의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보아하니 뭔지도 모르고 말하는 것 같은데,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게 바로 오철이잖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