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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44화 (44/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44화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든 전후 관계가 존재한다는 뜻.

솔직히 나는 이유 없는 일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백화상단이 화약을 옮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대량의 화약을 보게 된 건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뭐지 도대체?’

허나, 쉬이 이유를 찾을 리가 만무.

끙끙거리면서 고민하고 있자, 천일염이 나지막이 말했다.

“공자님, 실수로라도 화약 밭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왜?”

“왜긴 왭니까. 지키기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별 해괴한 질문을 한다는 듯 뚱한 얼굴로 보는 천일염.

왠지 모르게 튀어나온 정상적인 답변에 내가 어이가 없었다.

“호위가 할 법한 말을 하니까 그렇지. 너라면 ‘거름 냄새 풀풀 풍기는 사람이랑 같이 다니기 싫습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지.”

“아니, 호위가 할 법한 말이라뇨. 저 말고 공자님 호위가 또 누구 있습니까? 거기다. 화약을 만드는 데 거름은 또 웬 말입니까?”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일염이가 날 쳐다보자, 난 그제야 뭘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러네.”

그건 다름 아닌 초석 광산.

과거 사용하던 흑색화약은 주로 초석과 숯과 황, 이 3가지로 만들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초석인데, 숯과 황의 경우는 수급이 크게 어렵지 않았으나, 초석의 경우는 수급이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그렇기에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에서 초석을 수입해 오는 한편, 온갖 거름으로 초석을 만드는 염초밭을 만들어 아득바득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것 때문에 내가 거름을 언급한 것인데, 생각해 보니 이곳 사천 면양시에도 큰 규모의 초석 광산이 있었다.

초석을 대량 생산할 만큼 큰 규모의 광산이 있다면, 더러운 냄새를 뿌리며 관리도 힘든 염초밭을 만들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 초석만 채굴해서 썼을 테니 일염이의 반응도 이상한 건 아니었고, 여기서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건 백화상단에 공급되는 화약을 여기서 생산하기 때문일 거다.

‘그나저나 초석 광산이라니…… 내가 이걸 왜 까먹고 있었지?’

초석은 현대에선 그 용도가 다양해 하버-보슈법이라 불리는 공기 중의 질소를 암모니아로 합성하는 질소 고정법이 존재했다.

내가 화약을 만들 수 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고, 그래서 초석이 딱히 귀한 물질은 아니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광산 크기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무리 고수에게 화약이 통하지 않는다고 한들, 아직 약한 나한테는 한없이 무서운 곳이었기에.

‘일염이의 말대로 화약 밭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잘못하다간 일염이가 지켜주기도 전에 비명횡사할 거란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천천히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갑자기 일염이가 앞을 막아섰다.

“멈추시죠. 공자님.”

동시에 쏟아지는 날카로운 기세.

일염이가 앞에서 받아넘겨 줬기에 별다른 느낌은 없었지만,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는 것이 적대적인 시선인 듯했다.

“용건이 있다면 모습을 드러내라.”

잠시간 기다렸음에도 서로 초읽기에 들어가자 일염이가 나올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멀리서 걸어오는 한 노인.

조금 거리가 있지만 신화문에서 보여준 초상화와 비슷하게 생긴 걸 보니 곡괭이를 전해달라던 친우인 듯했다.

“이곳은 황가의 소유지로 관계자 외 출입 금지다. 당가의 직계가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만 돌아가거라.”

본디 화약이란 황가에서 엄중히 금하는 물건.

당연히 그 화약 제조에 필수적인 물건이 초석인 만큼 노인은 심한 경계심을 내비쳤다.

“너무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가 온 건 다름이 아니라…….”

그렇기에 싸울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며 발을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챙!

갑작스레 날아오는 암기 하나.

‘어우씨, 뭐야?’

미처 반응도 하지 못했는데, 일염이가 순식간에 쳐냈다.

“경고는 이번 한 번뿐이다. 네놈들이 이 노부의 목을 쉬이 가져갈 수는 있겠지만, 그 이후엔 황가가 나설 것이라는 걸 명심하고 경거망동하지 마라.”

일촉즉발의 상황.

나는 노인을 공격할 생각도, 그리고 그럴 능력도 없는데 도대체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경계심이 아주 극에 달한 모습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저희는 단순히 물건을 전달하러 왔을 뿐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괜히 말을 이리저리 돌리기보단 노인을 자극하지 않게끔, 조심스레 곡괭이부터 꺼내 들었다.

“그건…….”

곡괭이를 꺼내자마자,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곡괭이를 쳐다보는 노인.

“곡노 님의 곡괭이입니다.”

이 곡괭이가 곡노의 것이라는 걸 알려주자, 한순간 만감이 교차하는 듯 이런저런 표정을 얼굴에 띄우더니 이내 수긍했다.

“그런가…….”

얼추 상황이 예측됐는지 노인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면서도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기에 일단 자기소개부터 했다.

“소인은 사천당가의 당지천이라고 합니다. 장소산 대인 맞으십니까? 곡노 님 손녀분의 부탁으로 인해 곡괭이를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일부러 곡괭이를 가져다준 건 고맙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누구지?”

“제 호위입니다.”

“호위 말이냐?”

호위라는 단어에 노인은 눈가를 좁혔다.

딱 보아하니 염탐꾼이 호위로 위장해 들어오려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 듯했다.

평소라면 더럽게 깐깐하게 군다고 무어라 했을 법도 하지만, 지금 서 있는 곳이 하필 초석 광산이 있는 곳이다 보니 그 경계심이 이해가 갔다.

“일염이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저를 지켜왔고, 무엇 하나 가지지 않았을 때도 우직하게 옆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곡노 님과 연이 닿은 것도, 곡괭이를 운반하게 된 것도 우연에 지나지 않았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배신할 거였으면 진즉에 했을 거란 말에 장소산은 복잡한 눈으로 천일염을 쳐다봤다.

그러자, 천일염이 전음을 보내는지 입술을 달싹이는 천일염.

“……내키지는 않지만, 명백히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니니 뭐 됐다.”

다행히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는지 장소산은 천일염과 전음을 몇 번 나누더니 경계를 풀었다.

“잠깐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은데, 차라도 한잔하겠느냐?”

곡노의 일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은지 일단 자리를 옮길 것을 종용했다.

원래라면 일부러 곡괭이를 운송해 준 만큼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었으나, 이 주변은 초석이 차고 넘치는 곳.

만약 폭발이라도 일어나게 된다면 나머지 둘은 몰라도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분명한 곳이라 선뜻 발걸음을 옮기기가 꺼려졌다.

“죄송합니다만…….”

그래서 거절하려는 찰나, 장소산이 한마디를 더했다.

“이걸 빼돌리지 않고, 정직하게 전해준 만큼 약소하지만 제대로 된 보상도 해주고 싶으니 말이다.”

뭐?

보상?

“……실례 좀 하겠습니다.”

이왕이면 한 일.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도 챙길 건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관통하자, 손바닥 뒤집듯 답변을 바꿨다.

‘화약 밭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뭔 일 있겠어.’

그리고 설령 터지더라도 일염이의 곁에 붙어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일염이의 옷깃을 붙잡은 채 장소산을 따라갔다.

* * *

초석 광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집 한 채.

공방으로 봐도 좋을 만큼 수많은 잡동사니가 널려 있는 방에 안내를 받은 나는 곡노의 일에 대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다.

“살수라…… 지킬 것이 많으니 얼른 발을 빼라 했거늘,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은원 때문에 갔구나.”

이해는 가지만 씁쓸하다는 듯 혀를 차는 장소산.

한동안 감정을 추스리는 듯 적적하게 찻잔을 보다가 이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일부러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다. 곡괭이도 백련정강으로 만든 것이라 눈독 들일 만했을 텐데 가져와 줘서 고맙고.”

백련정강(百鍊精鋼).

실력 좋은 대장장이가 백 번 이상의 담금질을 거쳐 정련한 철.

현철과 같이 특이한 특성 없어 그저 평범한 일반 철의 상위 호환이지만, 오히려 그 특성 덕에 무림인의 제식무기라 불릴 정도로 범용성이 뛰어난 무기다.

그래서 그런지 현철보다 배는 비싼 물건이었다.

“아닙니다. 귀물이라고 한들, 남의 것인데 어찌 탐하겠습니까.”

솔직히 돈 생각하면 나도 백련정강이 탐나긴 했지만, 그렇게 절실하지 않아서 그냥 가져다줬다.

왜냐면 백련정강은 니켈을 추출해 낼 수 있는 현철과 달리, 순전히 제련을 통해 순도 높은 철을 만들어 낸 것이기에.

“그리고 탐한다고 한들, 지키기도 어렵거니와 제 실력으로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따로 없을 겁니다.”

거기다. 설령 백련정강을 탐했다고 한들, 현철조차 제대로 쓰지 못할 내 실력으로는 영 쓸모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구나.”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장소산.

설명도 다 했겠다, 이제 슬슬 보상을 내올 때도 됐건만 일어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대인, 저는 슬슬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예를 차리면서도 빨리 보상이나 달라며 재촉하자, 장소산은 뭔가를 고심하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몸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걸 보면 화약으로 만든 암기를 쓰는 것 같던데, 한 번 보여줄 수 있겠느냐?”

잠시뿐이지만, 무인에게 무기를 달라고 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되는 일이다.

하지만 장소산은 그걸 아는 듯하면서도 도무지 호기심을 지울 수 없었는지 부탁해 왔다.

“여기 있습니다.”

원래라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에 단칼에 거절할 만도 했건만, 나는 품에서 무연화약으로 만든 거 말고 흑색화약으로 만든 걸 꺼내주었다.

사실 다른 이들은 무기가 하나뿐이기에 실례가 되는 일일지 몰라도, 당가의 경우는 비전암기나 독이 아닌 이상에야 딱히 실례까진 아니었다.

어차피 소모품이라서 말이다.

“기분 상할 만한 부탁인데 들어줘서 고맙구나.”

조심히 암기를 받아 들고서는 찬찬히 살펴보는 장소산.

한눈에 구조를 파악했는지 순식간에 분해하여 화약을 만져보더니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허어…… 이 화약은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이냐? 아, 유통망을 캐묻는 것이 아니라 순순히 화약의 질에 놀랐을 뿐이다. 어디 가서 말하지 않을 테니 알려주지 않겠느냐?”

“그거 제가 만든 겁니다.”

“네가 말이냐?”

믿기지 않는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장소산.

말하고 나서 보니 내가 화약을 어디서 구했는지 말하기 싫어서 말을 돌리는 거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네가 직접 만들었다니 참으로 놀랍구나.”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장소산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을 믿고서는 감탄했다.

“지천이라고 했느냐? 혹시 시간이 있다면 날 도와주지 않겠느냐? 물론, 대가 없이 부려먹겠다는 건 아니고 그에 맞는 보상은 하겠다만…… 산속에 틀어박힌 채 연구만 했기에 가진 것이 별로 없구나. 가진 것이라곤 이런 흔한 것들뿐이니.”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하는 장소산.

평소에 정리라곤 안 하고 사는지 산더미처럼 쌓인 잡동사니를 뒤적이며 근처에서 대충 손을 뻗자, 왠지 낯이 익은 물건이 딸려왔다.

다름 아닌 내가 구하려고 생고생을 했던 현철이 말이다.

“아니, 그건…….”

“역시 고작 현철은 좀 그렇지?”

그걸 달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반응을 오해한 장소산은 현철을 대충 아무 데나 던져놓고 잡동사니의 산에서 다른 걸 집어 들었다.

“그건 곤옥 아닙니까?”

“맞다. 암기를 만들 재료를 주자니 곤옥 같은 건 당가에도 차고 넘칠 만큼 있을 테고…….”

또다시 손에 든 걸 내팽개치는 장소산.

도대체 통이 얼마나 큰 건지, 현철이나 곤옥을 보고 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 가늠이 안 갔다.

‘그래도 저 정도 양의 현철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난 돈이 필요하다.

현철의 효용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결국 미래에 필요한 것.

그러니 필요한 건 오직 돈이었다.

‘의선문에서 탈모약 판매 수익을 받겠지만, 시간이 걸릴 테고, 지금은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니…….’

그런 의중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묵직한 목함을 열어 보이는 장소산.

“줄 만한 것이라곤 돈밖에 없는데…… 당가야 금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니 돈도 차고 넘칠 테니 마땅한 게 없구나.”

그곳에는 무려 황가에서 배부한 전표가 가득 쌓여 있었다.

‘도, 돈!’

아까 이야기했듯 난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뒷주머니에 챙길 돈이 아니라 공식적인 돈이.

그런데 지금 딱 보기에도 목함 속의 전표는 상당한 액수를 자랑했고, 심지어 황가의 것이라 떼먹힐 일이 없었으니 이건 당장 받아야 했다.

‘거기다. 잘하면 현철을 조금 더 확보할 수도 있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현철이나 곤옥이 땅바닥에서 먼지를 마시며 뒹구는 취급을 받는 곳이다.

갈 때 잘 이야기하면 몇 개 정도 더 챙겨주지 않겠는가?

“이것도 필요 없어 보이니 치우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목함을 던져 버리려는 장소산.

나는 잽싸게 장소산의 손과 목함을 낚아채며 말했다.

“대인, 제가 어느 것부터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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