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42화
당지천이 뇌의를 따라 진료를 보고 있던 시각.
“컥…….”
곡노는 관도에 쓰러진 채 홀로 죽어가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원한을 산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적혈문이 나섰단 말인가…….’
지금 주변에 널린 시체들.
전부 자신의 곡괭이질에 쓰러진 적혈문의 살수들이었다.
보통 문파나 무림세가에 속해 지킬 것이 없는 이들과 달리, 곡노는 지킬 것이 많았다.
일인전승인 문파의 유일한 제자와 자신의 가족들.
그리고 은혜는 항상 갚는다는 자신의 신념까지.
그렇기에 어딜 가나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은원을 만들지 않으려고, 어디에도 얽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는지 갑급 살수들이 5명이나 자신을 찾아왔다.
‘여기서 죽을 순 없다. 아직 증손주도 못 봤거늘…….’
“켁…….”
곡노가 있는 힘을 다해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오직 피뿐이었다.
절망에 물들어가는 곡노의 두 눈.
그러나 그 노력이 헛되지만은 않았는지 멀리서 곡노를 보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바로 삿갓을 쓴 무인과 이유 모를 눈웃음을 짓고 있는 흑의인이 말이다.
“살릴까?”
“그러고 싶으면.”
삿갓을 쓴 무인의 대답에 흑의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눈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어려운 대답을 하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개입하지 않는다.”
“왜?”
“그편이 더 도움이 될 테니까.”
“냉혈한이네.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말이야.”
흑의인이 장난스럽게 농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우리 공자님은 괜찮으시려나 모르겠네. 딱 보아하니 정 많으신 분 같던데.”
“조금 침울해하겠지만, 놔두는 게 낫다.”
“녹주석 광산을 캐고 돌아오는 길이어서 그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무인.
갑자기 암기 하나를 꺼내더니 흑의인 머리 위로 날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 한 마리.
“전서구잖아? 이건 왜?”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은?”
“사라졌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자리를 비우자고.”
흑의인이 태평하게 말을 늘어놓는 것과 달리,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삿갓을 쓴 무인의 모습도 같이 사라졌다.
그렇게 곡노는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누구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 * *
1일 차 진료가 끝나고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천금상단 한구석에서 마련된 약제실에서 당지천이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랑…….”
이미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지 연신 혼잣말을 해대며 과정을 이어나가는 당지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궁공자는 추억에 잠겼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면…… 완성됐습니다. 스승님.
-음, 훌륭하구나. 성분 배합부터 제약까지 완벽하게 됐어.
-감사합니다. 이게 다 스승님의 귀한 가르침 덕입니다.
-허허허, 내가 한 거라곤 네가 만드는 걸 지켜보는 것뿐인데 어찌 내 덕이겠냐. 이게 다 환자를 생각하는 너의 마음이 고스란히 나타난 결과다.
과거 신의의 밑에서 수학할 때, 의원에겐 하나의 실수가 환자의 생사를 가르기에 참 많이 혼났는데, 약을 만들 때만큼은 신의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다 됐습니다.”
“훌륭하구나.”
지금의 자신처럼 말이다.
“……아직 확인 안 하셨잖습니까?”
“약을 대하는 진솔한 네 태도가 훌륭하다는 의미로,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였다.”
“아, 예…….”
당지천은 남궁공자가 왜 이러나 싶었지만, 자주 있는 일이라 무시하고 제조한 약을 내밀었다.
“일단 약효가 강하게 나오도록 만들었습니다.”
“부작용은 어떤 게 있지?”
“장기간 복용하면 사람이 우울해지고, 몸에 근력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만, 무인에게도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확인해 보마.”
당지천이 건네준 약을 조금 먹어보는 남궁공자.
“흠, 약효는 확실하고…….”
일부러 기의 순환을 빠르게 해 약효와 부작용을 확인하고는 약재 몇 가지를 꺼냈다.
“약효가 강한 양기를 억제해 기가 흐트러지는 것이니 그걸 안정시켜 주기만 하면…….”
그러고는 약재를 합쳐 약을 만들어 입안으로 삼켰다.
“됐군.”
뇌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당지천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뇌의를 쳐다봤다.
“부작용을 해결하신 겁니까?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하지만 이내 고요하기 그지없는 남궁공자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마치 그런 걸 묻는 거 자체가 바보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시기로는 약값은 부유한 이들에게만 받는다고 하였는데, 뇌의 님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복용해야 하니 의선문의 고정적인 수입이 될 거 같은데 관심 있으십니까?”
당지천이 화제를 돌릴 겸 꺼낸 말은 돈 문제.
언제 나오나 싶었는데, 뜬금없는 때에 튀어나오자 남궁공자는 작은 미소를 띠었다.
“아, 물론 제가 돈을 밝히긴 합니다만, 이건 엄연히 다른 환자들을 위해 의선문이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제조법을 판매한 대가로 돈을 받고 말이냐?”
“하하하.”
당지천이 멋쩍은 미소로 머리를 긁적이자, 남궁공자도 같이 멋쩍게 웃어줬다.
“그래, 그럼 약재의 원가도 있으니 원가를 제외한 금액으로…….”
당지천의 손바닥에 남궁공자가 비율을 적어주자 화등잔만 해지는 당지천의 눈.
“왜, 마음에 들지 않느냐?”
“아닙니다. 생각보다 후한 조건이라 그랬습니다.”
당지천은 눈을 뻐끔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남궁공자에게 물었다.
“왜입니까?”
좋은 조건으로 대우해 주자, 오히려 반문하는 당지천.
남궁공자 또한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곧장 답변했다.
“왜긴 왜겠느냐, 명색이 대장로나 되는 사람이 뒷주머니 하나 안 차겠느냐?”
“뇌의 님이 말입니까?”
그런 성정은 아니지 않냐며 반문하는 당지천의 말에 남궁공자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여간 당가 놈들……. 뭐 하나 그냥 집어먹는 법이 없구나.’
한 번은 예상했건만, 두 번이나 의심할지는 몰랐기에 남궁공자는 대충 떠오르는 대로 지어냈다.
“돕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의선문의 이름으로 호의를 베풀면 나중엔 그게 당연한 줄 알게 된다.”
“아, 그래서 뇌의 님의 이름으로…….”
“그래, 그렇다고 또 대놓고 할 순 없으니 뒷주머니에 돈을 채우는 거다. 물론 술값도 하겠지만 그건 자비로운 스승님께서도 눈감아주실 거다.”
“술값까지 말입니까? 하긴, 보통 싼 술만 드시니…….”
“그러니 의선문의 몫 중 3할은 내가 챙길 거니까, 어디 가서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딱히 납득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넘어갈 정도는 됐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당지천.
그 모습을 보던 남궁공자는 한숨을 푹 쉬다가 물음을 하나 던졌다.
“그런데 이 약의 이름은 무엇이더냐?”
* * *
피나스테리드(Finasteride).
FDA가 승인한 2개의 탈모약 중 먹는 탈모약으로 성능이 확실한 물건.
탈모의 원인이 신체 내 5-알파 환원효소(5AR)가 남성 호르몬을 변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이를 막으면 탈모의 진행을 막을 수 있기에 5AR을 억제하는 약이었다.
현대에선 주로 약의 이름은 프로페시아(Propecia)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상표명이라면 몰라도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이름은 딱히 없고, 산공독을 만들려다가 나온 부산물입니다.”
산공독.
군자산과 신선폐처럼 내공을 흩뜨리는 독.
중독되면 내공을 쓸 수 없기에 고수들이 극히 주의를 기울이는 독을 말한다.
원리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남궁공자는 기를 흐트러뜨리는 부작용이 있는 거로 아니까 대충 산공독의 실패작이라고 둘러댔다.
“저는 마땅히 생각나는 이름이 없으니 뇌의 님이 하나 지어주시죠.”
“흠…….”
이름을 지어달라는 요청에 잠시 고민에 빠진 남궁공자.
그러다 문득, 좋은 이름이 생각났는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바람이 세더라도 붙잡고 있고, 비가 쏟아져도 굳세게 싹이 튼다는 의미로 푸로패시아(䬌撈霈偲芽)라고 하자꾸나.”
뭐?
푸로패시아?
“푸흡.”
“왜 그러느냐? 이름이 맘에 안 드느냐?”
“아, 아닙니다. 단지, 예상치 못했는데도 너무나 어울리는 이름인지라…….”
어울리다 못해 아주 완벽한 이름이었다.
“그래, 마음에 든다면 다행이구나. 구영이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돈 문제는 일단 약부터 전해준 뒤에 나중에 마저 하자꾸나.”
남궁공자가 푸로패시아랑 남궁공자의 약을 챙겨 약제실 밖으로 나가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팽구용이 다가왔다.
“약은? 이놈 말이 진짜였어?”
“푸로패시아다.”
남궁공자가 약병을 내밀자, 지긋이 쳐다보는 팽구용.
그렇게 잠시간 긴가민가한 얼굴을 하다가 뭔가 내키지 않는지 인상을 빡 썼다.
“끙, 이게 맞는 거냐? 네가 만든 것도 아니고, 꼬맹이가 만든 건데 부작용이라도 나는 거 아닌가 몰라.”
“네놈이 머리 굴리는 놈들 싫다고 했잖냐. 지천이는 머리 굴리는 놈 중 제일 난 놈이다.”
“이놈이 그 정도야?”
“지금은 겨우 그 정도다.”
선문답이라도 하듯이 대화를 나누자, 마음에 들진 않아도 납득은 됐는지 곧바로 약을 복용했다.
“어떠냐, 느껴지긴 하냐?”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일단 이쪽의 부작용을 줄여주는 약을 같이 복용하고, 나머지는 오늘 술이나 한잔하면서 알려주마.”
“술? 좋지.”
원래 의사들은 약 먹으면 술 먹지 말라고 하던데, 대뜸 술부터 권하는 남궁공자.
역시 무인들이란 다른 족속이라서 그런지 별 상관없나 보다.
그렇게 혼자 속으로 궁시렁궁시렁대고 있자, 팽구용이 대뜸 나를 불렀다.
“당지천이라고 했느냐.”
“예. 대협.”
호기롭게 대답하자, 다시금 내키지 않는 듯 찌푸려지는 인상.
그러면서도 웬 작은 피리를 하나 꺼내 주는 게 아닌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만약 네 약이 쓸 만하다면 내 친히 도움을 주마.”
화경의 경지를 목전에 둔 고수의 도움.
평소라면 방방 뛸 정도로 기쁘고 환호할 만한 일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왠지 모르게 의심부터 됐다.
“혹시 이거로 약값을 퉁치시려는 건…….”
“그럴 리가 있겠냐! 하여간 그 재수 없는 놈 아들이라 그런지 성격도 뭐 같구나.”
“아이고, 그러면 네놈은 얼마나 싹수가 있길래 얘한테 성격이 뭐 같다고 하는 거냐? 그리고 약효가 확실한 건 내가 확인했으니까 잔말 말고 줄 거면 빨리 줘라.”
남궁공자가 팽구용의 뒤통수를 후리며 면박을 주자, 팽구용은 내 손에 피리를 쥐여주더니 한마디 보탰다.
“뭐, 어쨌든 한 두어 달은 사천에 있을 테니 도움이 필요하면 있는 힘껏 피리를 부르거라. 네가 도움이 간절한 만큼 멀리 울려 퍼질 거다.”
“감사합니다.”
범위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 무림이다.
성도 안이라면 몰라도 성도를 벗어난다면 목숨이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여벌 목숨이라고 생각하고 꼭 간직하고 다녀야겠다.
“그럼 우리는 이만…….”
그렇게 용건을 마친 팽구용이 남궁공자와 함께 술 한잔하러 가려는 찰나.
“대장로님! 대장로님!”
“무슨 일이냐!”
급히 남궁공자를 찾는 석곤의 목소리에 남궁공자가 뛰쳐나갔다.
“대체 뭔 일이래?”
남겨진 팽구용과 나도 덩달아 그 뒤를 따라가게 됐는데, 곧장 보이는 충격적인 광경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나가자마자 내가 보게 된 광경은 고개를 젓는 남궁공자의 모습과…….
“이런…….”
한눈에 봐도 차게 식어 있는 곡노의 얼굴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