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41화
들뜬 발걸음으로 성도로 향하는 길.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천일염은 자리를 비웠다.
-어차피 뇌의 님이랑 가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저는 제 일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명색이 호위라는 녀석이 이틀 연속으로 자리를 비운 게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그냥 휴가를 준다는 느낌으로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뇌의 님하고 같이 있는 걸 피하는 것 같기도 하니까 말이지.’
아무리 노름을 좋아한다고 한들, 때와 장소를 구분하던 녀석이 갑자기 그러는 건 이유가 있어서 아니겠는가.
“저기 보이는구나.”
남궁공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자, 웬 마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장원 하나가 보였다.
“저기는 천금상단 사천지부 아닙니까?”
천금상단.
천하오대상단 중 하나로 사천에 있는 백화상단과는 경쟁 관계인 상단이었다.
“맞다. 너도 알다시피 원래는 진료를 보러 오면 항시 백화상단에서 자리를 내줬었는데, 이번엔 무슨 일인지 백화상단에서 자리를 내주지 못하겠다고 하더구나.”
백화상단이 자리를 못 내준다.
평소라면 이상하게 느꼈을 일이었지만,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졌다.
‘거, 백화상단은 당연히 자리를 못 내주겠죠.’
그쪽은 장원에 화약을 산더미처럼 쌓아놨는데, 어떻게 대놓고 자리를 주겠는가.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대장로님.”
“오랜만이구나. 석곤아. 오는 동안 문제는 없었느냐.”
“예, 이상하리만치 순탄하게 왔습니다.”
마차 근처에 다가가자 뛰어나와 인사하는 한 사람.
젊은 사람임에도 약재를 옮기는 이들과 달리 옷 상태가 깨끗한 걸 보면 높은 사람인 듯했다.
“혹시 뇌의 님 제자분 되십니까?”
“어휴, 저 같은 게 대장로님의 제자라니요.”
제자냐고 물어보자, 자신에게는 과분하다는 듯 손사래 치는 석곤.
“지금 맡은 직책도 과분해 죽겠는데, 대장로님의 제자로 들어가면 부담스러워서 못 살 겁니다.”
겸손을 떠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심약한 사람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하하하,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지 말 거라. 너는 그만한 실력이 있으니까 말이다.”
남궁공자가 호탕하게 몇 번 웃고는 석곤의 등을 두들겨 주더니 이내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게 제자는 없다. 뭐, 그래도 제자 삼고 싶은 녀석은 있지만 말이다.”
말을 마치고는 지긋이 나를 바라보는 남궁공자.
그 반응을 보아하니…….
‘심약한 심성과 다르게 능력이 뛰어난가 보구나.’
석곤이라는 사람의 재능이 여간 뛰어난 게 아닌 듯했다.
아마도 제자로 삼고 싶었으나, 심약한 성정 때문에 번번이 거절당했을 터.
필시 나중에 유명해질 터이니 인맥을 터놓으라는 남궁공자의 눈짓에 일이 끝나기 전에 석곤과는 친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러고 보니 백화상단에서 죄송하다고 전해달라 했습니다. 도착하기 전에 잠시 들러보니 내부가 워낙 혼잡하고 인력을 대거 동원할 일이 있어서 자리와 사람을 내어줄 수 없는 상황인 걸 확인했습니다.”
“사정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거기다, 백화상단 또한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니.”
돈을 밝히는 상단.
동전 한 문조차 공짜로 주지 않는 상단이 의선문이 온다고 해서 왜 이유 없이 장원을 내어주겠는가.
어디까지나 장원을 내어주는 이유는 의술에선 의선문이 천하제일이고, 그들에게 진료를 받으러 올 부유한 이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매출을 올리려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상하네. 아무리 백금현이 통제를 잘한다고 해도 이 정도 일이면 상단주가 알아차렸을 텐데?’
“백화상단에 들르셨을 때 화약 냄새는 못 맡으셨습니까?”
“화약 냄새 말입니까? 그런 건 전혀 못 맡았습니다.”
화약 냄새가 안 나?
하긴, 상단이니 많은 사람이 오가는 만큼, 며칠이라면 몰라도 오랫동안 쥐고 있진 않겠지.
필시 인력을 대거 동원한다는 일이 화약을 옮기고 나서 흔적을 지우는 일이었을 거다.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대장로님. 진료 준비 끝났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얼른 진료를 시작하자꾸나.”
하지만 진료를 시작한다며 앞서 들어가는 남궁공자를 보며 애써 기우라 생각하고는 불안감을 털어냈다.
* * *
세상에 그 어떤 누구든 보통 무슨 일을 하기 전엔 계획을 세운다.
하다못해 다섯 살짜리 아이도 용돈을 쥐여주면 어디에 쓸지 계획부터 세우지 않던가?
당연히 나 또한 그럴듯한, 아니, 아주 훌륭한 계획이 있었다.
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음 환자분.”
“콜록, 콜록.”
상단 직원의 안내를 받아 진료실로 들어오는 노인 한 명.
“폐렴이군.”
남궁공자는 그를 보자마자 그의 병명을 단언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어르신.”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곧장 노인을 눕히고는 기를 불어넣었다.
“……이틀간 정양하시면 금방 나으실 겁니다.”
그러고는 여러 설명과 함께 노인을 돌려보냈다.
“…….”
가히 범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그간 뇌의라는 별호와 의선문의 대장로라는 게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단시간에 수십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보니 이제야 좀 실감이 났다.
‘심지어 단순한 사람도 아니고, 의선문의 문도들이 1차로 보고서 넘기는 환자들이니…….’
내가 의료 체계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대단하다는 것만은 알았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 때문에 내 계획이 뒤틀어졌다는 것.
‘약을 써야지 뭐 좀 알아보겠는데, 약을 안 쓰네.’
이 병은 기 치료.
저 병은 침 치료.
일단 무슨 약이 필요한지 알려면 무슨 약을 쓰는지 알아야 하는데, 도무지 뇌의는 약을 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뇌의 님. 혹시 약은 안 쓰십니까?”
“약 말이냐?”
약에 대해 물어보니 남궁공자는 좋은 질문을 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해줬다.
“양민들이 돈이 어딨어서 약을 처방받겠느냐. 정 필요하다면 약을 써야겠지만, 약을 쓰지 않고도 치료가 가능하다면 굳이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러면 의선문은 계속 적자를 보지 않습니까?”
“돈은 부유한 이들에게 받으면 된다.”
“그렇습니까…….”
나쁘진 않지만, 아쉬운 답변.
어떻게 선의를 베푸는 일이 나쁜 일이겠는가.
그러나 돈 벌 생각이 가득한 내게는 별로 희소식은 아니었다.
‘그나마 폐렴은 걸려봐서 무슨 약이 쓰이는지 알았었는데 이렇게 가버리네.’
폐렴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페니실린은 만드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행복할 뻔했는데, 간단하게 치료되면 별 쓸모 없어 보였다.
애초에 돈이 별로 안 될 거 같기도 하고.
‘나도 의선문처럼 비싼 약만 팔아먹고, 간단한 약은 몇 개 넘겨주고 말까…….’
어차피 싼 약은 양산을 해야 하는데, 그건 내가 못 하는 것이니 아예 의선문에 넘겨서 호의를 사는 방안도 고려해 보던 찰나, 문득 드는 의문.
“뇌의 님. 예전에 의원은 환자를 보기 전까지 단언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어찌 보자마자 확신하시는 겁니까?”
“용케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뿌듯한 미소를 짓는 남궁공자.
이번에도 잘 새겨들으라는 듯 목을 가다듬고 답했다.
“부유하지 않은 양민들은 의원에게 진찰받을 기회가 많지 않다. 그러니 무인이 아니라면 문지방을 밟는 순간, 기로 진맥을 해서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더 많은 기회를 주는 방법이지.”
고수들은 멀리서도 수준을 알아보는 게 가능하다고는 하나, 진맥도 된다고?
의선문의 대장로는 역시 급이 다르구나.
“그리고 폐렴은 감염성 질병이다. 주로 폐에서 폐로 병균이 옮겨 다녀서 생기는 것인데, 폐의 병균만 없앤다면 나머지는 질환은 저절로 사라진다. 물론, 여기서 환자의…….”
앞의 설명이 부족했는지, 당연하다는 듯이 설명을 이어가는 남궁공자.
거, 설명충도 아니고 적당히 좀 하지 맨날 하나를 물어보면 수십으로 돌려주려 하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가뜩이나 생각할 게 많아서 머리도 아픈데 말이야.’
“뇌의 님. 귀한 가르침은 감사하지만, 설명은 나중에도 들을 수 있으니 지금은 일단 환자를 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이런,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설명은 나중에 하자꾸나.”
조금 무례하더라도 설명을 더는 원치 않는다는 의지 표명을 한 것인데, 어째서인지 남궁공자는 대견스럽다는 듯 날 보며 다음 환자를 불렀다.
“다음 환자분.”
문이 열리자 들어서는 거구의 남성.
삿갓을 쓴 채 허리춤에 도를 찬 것이 무인으로 보였고, 한눈에 봐도 풍기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은 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나보다 한참 윗줄의 고수로 보였다.
“오랜만이군. 남궁공자.”
“아니, 네놈 소식이 뜸하더니 사천에 있었냐?”
“내가 사천에 볼일이 뭐 있겠냐. 대충 네놈이 여기 있을 거 같아서 와본 거지.”
당연하다는 듯 진료실 의자에 앉는 무인.
언뜻 보기론 남궁공자와 꽤 친한 사이인 듯했다.
“뇌의 님. 아는 분이십니까?”
“아, 인사하거라. 내 친우인 일도일협(一刀一俠) 팽구용이다.”
일도일협 팽구용?
그 이름을 듣자, 협객은 좋아하는 편이라 곧바로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화경을 목전에 둔 고수로, 대가 없이 사람을 돕고 홀연 듯이 사라지는 그의 수많은 목격담에 일도일협이란 별호가 붙은 사람.
동시에 하북팽가 현 가주의 동생인 만큼 인맥을 만들어놓으면 좋은 상대였다.
그래서 일어나서 인사하려는 찰나, 팽구용이 손을 저었다.
“보아하니 당기룡 그놈 아들인 거 같은데, 인사하지 마라. 나는 원래 머리 굴리는 놈들하고 상종 안 한다.”
거, 사람 섭섭하게. 인사 정도는 받아주지 말이야.
어린애한테도 그러고 싶나?
그런 팽구용의 모습이 창피했는지, 남궁공자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 거다. 지천이 네가 그러려니 하려무나.”
“저는 괜찮으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것보다 나중에 오셔도 되는데 지금 들어오신 걸 보면 진찰을 받으려고 하신 것 아닙니까?”
내 물음에 입을 꾹 다무는 팽구용.
나이가 몇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린애한테도 이러는 거 보면 신념 하나만큼은 참으로 확고해 보였다.
“그래, 진찰받으러 온 게 아니면 나중에 보자고.”
“진찰받으러 온 거 맞으니 잠시 기다려 봐.”
남궁공자마저 축객령을 내리자, 팽구용이 한숨을 쉬며 삿갓을 벗었다.
그러자, 보이는 건…….
‘탈모?’
다름 아닌 원형 탈모였다.
“이런…….”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젓는 뇌의.
팽구용 또한 예상했던 반응이었는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너도 다른 이들처럼 고개를 젓는구나. 너라면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안하지만 스승님께서도 못 고치는 병을 내가 고칠 능력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그걸 고칠 방법을 하나뿐이라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역시 환골탈태뿐인가…….”
중원에서도 워낙 유명한 불치병인지 이미 덤덤히 받아들이는 팽구용.
그러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다.
“내가 땡중도 아니고 대머리로 살 순 없어. 치료할 필요까진 없으니 어떻게 현상 유지라도 안 되겠냐?”
공청석유라든가 만년화리 같은 귀물을 찾아내지 못하는 이상, 벽을 부수는 것이 환골탈태의 유일한 길이었기에 남들은 포기했겠지만, 화경의 경지를 목전에 둔 팽구용은 달랐다.
“듣자 하니 땡중들은 환골탈태를 하면 아예 머리가 안 자란다고 했어. 그렇다면 나도 대머리가 된 상태에서 환골탈태하면 평생 대머리로 살아야 하잖아?”
팽구용이 대머리만큼은 안 된다는 듯 애절한 눈빛으로 남궁공자를 봤지만, 남궁공자는 그저 묵묵히 받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뇌의라고 한들, 이미 방법이 없다고 했으니 해답이 있을 리 만무.
현대에서도 탈모는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다.
이전의 기를 불어넣어 치료하는 것도 모발이 자라는 모공이 죽은 상태였기에 불가능했다.
아무리 기로 이것저것 치료한다고 한들, 죽은 부위를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저, 뇌의 님.”
하지만, 치료는 몰라도 더는 진행되지 않게끔 하는 약만큼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돈주머니를 채울 시간이지.’
“왜 그러느냐?”
“엄연히 부작용이 있고, 적정량 또한 잘 몰라서 뇌의 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만…….”
운을 떼자,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나를 보는 남궁공자.
나는 즉각 그 눈에 화답을 해줬다.
“치료는 불가능하더라도 현상 유지는 가능한 약이 있습니다.”
아주 긍정적인 화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