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39화
언젠가 느껴봤던 것 같은 몽롱한 정신.
“……아.”
그 속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부름에 눈을 뜨자, 익숙한 내 연구실이 보였다.
수십 가지의 플라스크와 비커들이 난잡하게 널브러져 책상.
뭔가를 열심히 끓이고 있는 알코올램프들.
햇빛에 닿지 않게끔 갈색 병에 담겨 있는 화학물질들.
여기저기서 받은 상금과 왠지 모르게 급격하게 늘어난 정부 지원금으로 산 수십 가지의 장비.
마지막으로 사방에 흩뿌리듯 퍼져 있는 연구 자료들까지.
참으로 애착이 가면서도 한편으론 역겨운 모습이었다.
“준일아, 왜 그래?”
다시금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자, 보이는 한 남자.
첫째 형인 당지독과 비슷한 얼굴의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 성수 형.”
“갑자기 왜 그래? 너 어디 몸이 안 좋아?”
매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던 날 찾아와 친구가 되어준 형.
모두가 연구 결과에 집착할 때 언제나 쉬라며 날 걱정해 준 형.
가족이라곤 없던 내게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였던 따뜻한 형.
그리고…….
“어디 아프면 꼭 말하고. 일도 좋지만 무리하면 안 된다.”
“명심할게요.”
실상은 정부의 개로 내게 연구를 강제하고, 끝내 내 숨통을 끊은 놈.
“그래서 하던 이야기가 뭐였죠?”
“준일아, 형 말 잘 들어. 만약 너는 네 손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요. 당연히 세상을 구하지 않을까요? 물론, 가능하다는 전제하겠지만.”
이때만 해도 나는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어린애 같은 사람이었다.
과학은 언제나 위대했기에 남을 돕겠다는 선한 마음으로 연구한다면 과학이 내게 기적을 가져다줄 거라고, 진실되게 그렇게 믿었었다.
물론, 그 끝은 누구나 예상하는 대로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너는 구할 수 있어. 네가 만든 HBL-VX를 조금 개량하기만 한다면 말이야. 그러니 형한테 만드는 법 좀 알려주겠니?”
“이거요?”
성수 형이 가리킨 HBL-VX를 한 번 슥 보고는 연구실에서 자료를 찾는 듯 바닥을 둘러보다가, 대충 바닥에 있는 아무 연구 자료나 들어 보였다.
그러자 환희에 젖는 성수 형의 얼굴.
“어, 그래. 그거.”
표정 관리에 도가 튼 사람들을 봐오다 보니 저 정도는 속이 훤히 보였지만, 그 당시 나는 저 얼굴을 보고도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참으로 불쾌한 꿈이야.’
내가 아무리 바보였어도, 비록 꿈일지라도 그 일을 다시 반복할 리가 있겠는가.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봐.”
곧장 연구 자료를 가져가려는 성수 형의 손을 쳐내고, 무언가가 끓고 있는 책상 앞으로 향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무슨 문제가 있냐고?
당연히 있지.
“어, 빠진 과정이 있어서.”
바로 소각이라는 과정이 빠졌거든.
“뭐 하는 거야!”
가까운 알코올램프로 연구 자료를 태우자, 악귀처럼 일그러지는 성수 형의 얼굴.
마치 무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날아와 재빨리 나를 밀치고 연구 자료를 덥석 잡았다.
허나, 연구 자료는 그런 손이 무색하게 한순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아아…… 소중한 내 연구 자료가…….”
허탈한 채 주저앉은 성수 형.
이내 끈 풀린 인형처럼 기괴하게 일어나 내 목을 부여잡았다.
“저거 하나뿐은 아닐 거 아니야! 새로 가져와! 가져오라고!”
“켁, 케흐흐…….”
당장에라도 목이 부러질 것만 같은 고통이 엄습해 오고, 숨이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죽어가고 있었지만, 웃음이 나오는 건 막지 못했다.
그래, 진작에 이랬어야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봐야 뭐 하겠는가.
이미 남은 건 없는데 말이다.
“없어? 없으면 다시 만들어! 다시 만들란 말이야!”
다시 만들라고?
어림없는 소리.
설령 내가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한대도.
내 목숨이 위태로워져 경각에 이르렀다고 하여도.
누군가에게 배신당하여 세상을 무너뜨리고 싶어졌다고 해도.
절대.
절대로 다신 만들지 않을 거다.
그러니…….
“꼬우면 네가 만들어 자식아.”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오직 중지 손가락 하나뿐이다.
* * *
불쾌한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낯선 천장.
주변을 둘러보니 지하실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조금 어두운 강당이었다.
“어, 어? 공자님?”
“공자님이 깨어나셨다!”
“뭐?! 공자님이?!”
무슨 말을 물어보기도 전에 내가 깨어난 걸 보고 우르르 달려드는 사람들.
분명 내가 아는 익숙한 복장의 연구원들인데, 행색을 보면 그냥 좀비나 다름없어 보였다.
아니, 여긴 중원이니까 강시라고 해야 하나?
“저, 여긴 어딥니까?”
내가 운을 떼자, 한순간 정적이 흐르는 내부.
마치 말해선 안 될 사람이 말을 한 것처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에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세상에나! 공자님께서 말씀하셨어!”
“가짜가 아니었단 말이야?! 연주님께서 진짜 공자님을 모셔온 거야! 아아…….”
“자네 이런 기쁜 날 쓰러지지 말게나. 오늘이 지천님 오신 날 아닌가.”
“허나,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고 고운 목소리를 들으니 나 또한 기절할 것만 같군.”
“와…….”
아주 옘병을 떤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거의 신 취급하는 연구원들.
도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아니, 이게 대체…… 허허.”
아무리 이해해 보려 노력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절로 헛웃음을 흘리자, 꺅꺅대는 여자 연구원들.
“꺅! 나를 보고 웃으셨어!”
“무슨 소리야! 나를 보고 웃으신 거잖아!”
“아아…….”
그 사이로 감격스러움의 눈물을 흘리는 연구원도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데도 누가 사이비 종교를 만들었단 죄목으로 나를 잡아간대도 할 말이 없을 지경.
분명 나는 포대 자루에 담겨 납치되었는데 어느샌가 사이비 교주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도 안 오는 상황.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연구원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물러나거라!”
다름 아닌 나를 이 사이비 소굴에 데려온 만독연주의 목소리가.
퀭한 얼굴로 꾀죄죄한 외관은 전각 앞에서 봤을 때와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허나, 이전과 달리 얼굴에 굳은 의지가 보이는 것이 그래도 이 양반은 정상으로 보였다.
만독연주가 모두에게 명령하자, 하나둘 뒤로 물러가는 강시 떼.
다행히 이성은 잃었어도 만독연주의 말은 잘 들었다.
‘좋아, 상황 파악은 나중에. 지금은 만독연주를 잘 구슬려서 여길 떠나야…….’
당장 만독연주를 방패로 세우고 달아날 계획을 머릿속으로 수립했으나, 그 기대가 잘못되었다는 듯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하는 만독연주.
“죄송합니다. 공자님. 공자님같이 고귀하신 분을 이런 미천한 곳에,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모셔야 했던 건 전부 다 제가 무능해서입니다.”
마치 오래된 친우를 잃은 것처럼 서럽게 우는 모습에 어이를 상실했다.
“거, 뭔지 모르겠지만, 저는 다 이해하니까 그만 우시죠.”
그래도 일단 상황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만독연주를 위로하자, 코를 한 번 풀고는 눈물을 닦아냈다.
“추한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공자님. 말씀은 아까처럼 편하게 하시죠.”
“아닙니다. 그거야 뭐,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랬고, 어떻게 연주님께 하대를 하겠습니까. 헌데 왜 저를 납치하신 겁니까?”
이유를 묻자, 시작되는 길고 긴 설명.
총회에서 있던 일부터 지금까지 있던 일을 설명하며 중간중간 나를 찬양하는 걸 듣고 있자니 심히 불편했지만, 꾹 참고 귀를 기울여 들었다.
“……해서 저희 일원들은 공자님의 밑에서 공자님과 같이 연구하고 싶습니다.”
만독연주가 휘하에 들고 싶다며 말을 마치자, 두 눈을 반짝이는 연구원들.
만약 전각 앞에서 들었다면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했을 만큼 환영할 만한 이야기였다.
소가주 경쟁에서 세력을 갖추는 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세력의 질 또한 중요하다.
당가에서 제일 중요시 여기는 만독연.
그런 만독연의 인재들은 유능하기에 누구나 포섭하려 했으나, 대다수는 별 관심이 없어서 딱히 누구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연구원들.
이들의 숫자는 물경 수십을 아우르고, 거기다. 일전에 나를 도와줬던 다섯 명의 장로들마저 같이 보였기에 내 휘하에 들인다면 필시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차라리 장하와 영하처럼 아무것도 모르면 쉽게 받아들였을 텐데…….’
내가 여태 그걸 몰라서 세력을 안 만들었겠는가.
솔직히 소가주가 되기 위해선 지지 세력이 필요한 것도 알고, 만들 기회도 많았다.
하다못해 총회가 끝나고 일주일간 찾아온 사람들의 반의반만 잡았어도 어엿한 세력 하나를 구축했을 거다.
하지만 그걸 못했던 이유는 연구원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나는 유능하다.
그것도 한때 세상을 파멸로 이끌어갔을 정도로 더럽게 유능하다.
그러니 아무리 착한 이라도 내 연구를 한 번 본다면 처음엔 경외심을 느끼다가도 어느샌가 내 연구를 훔치고 싶어질 거다.
아니면 내게 자신의 입맛에 맞는 연구를 시키려 할 거다.
……여태껏 그랬었으니까.
그런데 이들이 나의 연구를 훔치지 않을 거라, 혹은 나에게 입맛에 맞는 연구를 진행하게끔 강요하지 않을 거라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모두 믿을 만한 이들이라면, 반대로 내가 미쳤을 때 나에게 동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주님. 이상한 소리로 들릴 걸 알지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만약 제가 해독 자체가 불가능한 독으로 양민들을 학살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의 상황만큼이나 뜬금없는 질문임에도 만독연주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막겠습니다.”
“제가 죽지 않는 한 멈추지 않는다면요?”
“그땐 제 손으로 직접 공자님을 죽이겠습니다.”
“왭니까? 제 사람이 되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유는 공자님도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독은 우리 당가의 근간으로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우리를 지키는 수단인 동시에…….”
잠시 말을 멈춘 만독연주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수단입니다.”
“……그렇습니까.”
엉뚱한 질문이었음에도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정확히 핵심을 짚어낸 만독연주.
아직도 연구원들을 거두는 것이 두려웠지만, 날 죽이겠다는 그 대답 덕에 망설임은 사라졌다.
“좋습니다.”
호기심이나 출세욕에 인의와 윤리를 저버린 과학자들은 전생에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선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과 목숨을 바치던 과학자들도 많았다.
그러니 적어도 한 번은 믿어도 되지 않겠는가.
“까짓것 제대로 한번 해봅시다.”
그렇게 만독연주와 연구원들을 휘하에 거두기로 결정한 순간.
나는 이때로부터 정확히 두 시진 만에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