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38화
사람이 상정 외의 일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어떤 사람은 당황해서 아무런 대응을 못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당황한 상태로 발버둥이라도 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당황하더라도 냉철한 판단력을 발휘해 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물론, 아예 당황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그들은 논외로 치겠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위의 세 가지 분류 중 마지막에 속한다는 점이었다.
‘생각하자, 생각해. 방법이 있을 거야.’
당황했어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의 장점이었다.
그렇기에 나의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판단력으로 현 상황을 판단한 결과…….
‘X됐다.’
아무래도 X됐다.
그것이 포대 자루 속의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X됐다.
“저와 함께 가시죠. 공자님.”
포대 자루를 들고 다가오는 만독연주가 심상치 않아 빠르게 도망치려 했으나, 될 리가 있겠는가.
‘인생…….’
도저히 도망칠 가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화성에 간 어느 우주인 아저씨는 움직일 수 있는 행성에라도 갇혔지, 나는 아예 몸을 가누기도 힘든 포대 자루에 갇혔다.
‘누구는 먹고살려고 감자를 키우던데, 나는 그냥 감자랑 같은 신세가 됐네.’
정말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
그래도 순순히 끌려갈 수만은 없어서 압박이라도 해보려 했다.
“야!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가주님께 허락 맡았습니다.”
“어, 어? 그래? 그러면 안 되는데…….”
이런 미친 아재를 봤나.
도대체 세상 어느 아버지가 제 아들을 납치하겠다는 데 허락을 해줘?
그래도 순순히 허락해 줬다는 건 위험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어디까지나 만독연주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무슨 소란입니까.”
그 소리는 다름 아닌 나의 영원한 호위무사 천일염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평소에 지겹게 듣던 목소리지만 오늘만큼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목소리처럼 맑고 청아하게 들렸다.
“오오! 믿고 있었다고 일염아! 만독연주가 미쳤어! 나 좀 구해줘!”
포대 자루 속에서 환희에 찬 구조 신호를 열심히 보냈다.
역시 마지막 순간에 믿을 사람은 멀리 있는 가족이 아니라 호위무사뿐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런 기대와 달리 일염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을 포대 자루에 넣기 전에 입부터 점해야 하는 건 상식 아닙니까?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자칫하다간 일이 새어 나갈 뻔했잖습니까.”
“죄송합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연한 걸 잊어버렸군요. 그래도 새어 나가지 않아서 천만다행입니다.”
“에?”
이쯤 되니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가주야 그런 인간이니까 그렇다 쳐도, 천일염마저 배신하고 심지어 망을 보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아, 여기 약속드린 금액입니다. 요구하신 대로 전부 전표로 가져왔습니다.”
만독연주가 전표를 건네주자, 금액이 맞는지 한 장, 한 장 확인하는 천일염.
“맞군요. 그럼.”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전각을 떠나갔다.
“어, 어째서…….”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한들 아예 날 팔아넘겨?
가족 같은 나를?
내가 그렇게 인망이 없나?
‘아니야, 잘 생각해 보자. 아무리 그래도 일염이가 위험한 일에 날 팔겠어? 분명 위험한 일이 아니니까 돈 받고 협조를 한 거겠지.’
암, 그렇고말고.
명색이 호위인데 위험한 일을 당하게 놔둘 리가 있나.
“……근데 결국에 팔아넘긴 건 맞잖아! 야! 천일염! 돌아와!”
저 밑에서 끓어오르는 배신감에 망연자실하고 있자, 안타깝다는 듯 날 바라보는 만독연주.
“공자님. 지금부터 공자님을 점혈할 겁니다. 위험하니 반항하지 마십시오.”
그러면서도 할 건 하는 모양새였다.
“혹시 점혈하기 전 남기실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남길 말이 있냐고?
뭐, 유언도 아니고 그걸 물어봐야 하나?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날 배려해 주는 만독연주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해 작은 부탁을 하나 했다.
“서러우니까 이왕이면 그냥 정신을 잃게 해줘.”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정신줄을 놓았다.
* * *
당지천이 정신을 잃고, 어디론가 이송되고 있던 때.
가주전에서는 당기룡과 백호단주가 얼굴을 굳힌 채 초조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유철이가 잘하고 있겠지? 독물학 총회가 끝나고부터 한숨도 안 자서 일을 그르치는 건 아닐지 모르겠구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연주님이 조금 피로하다고 일을 대충 하시는 분은 아니시잖습니까.”
“그렇겠지?”
백호단주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당기룡.
“백호단의 배치는?”
“예, 말씀하신 대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 그럴듯한 이유와 함께 곳곳에 배치했습니다. 은폐도 또한 각기 달리해 잠시간의 교란으론 충분할 겁니다.”
“알았다.”
백호단주가 꼼꼼히 보고함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당기룡.
언제나 무표정을 짓고 있던 당기룡이 이렇게 한눈에 봐도 알 수 있게끔 감정을 내비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백호단주는 당기룡이 얼마나 초조해하는지 느꼈고,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마하니 직계를, 그것도 가문 내에서 포대 자루로, 거기다가 그걸 옮기는 사람이 연주님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허나, 그런 백호단주의 노력에도 당기룡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계획이란 언제든 뒤틀릴 수 있는 법. 지천이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도 유능하기에 언제나 보는 눈이 따라다닐 것이라 상정해야 한다. 그러니 계획이 뒤틀어지는 경우도 고려해야…….”
“아, 그렇습니까.”
당기룡이 무어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대충 대답하고 마는 백호단주.
잠깐 사이에 급조한 계획이지만, 동원되는 인력들이 워낙 출중하기에 실패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헌데, 그것보다는 삼 공자님이 더 큰 문제 아닙니까?”
5년 전, 당지천에게 금독령을 내렸던 이유.
그건 당지천의 속 깊은 곳에 뿌리내렸을 인간 불신 때문 아니었던가.
그 어린 나이에 제 어미가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해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래서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사람 그림자만 봐도 기겁을 했기에 격리 조치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그걸 극복하고 사람을 들인 지금.
가주의 명으로 당지천을 납치했으니…… 다시 인간 불신이 생긴다 하여도 할 말이 없을 거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당기룡의 가슴은 죄책감에 찢어지는 듯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지천이는 필시 이겨낼 것이다.”
그렇기에 당기룡은 당지천이 잘 이겨낼 거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대공자님 때문입니까?”
당기룡은 긍정도, 그렇다고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지만, 백호단주는 그것이 긍정을 의미한다는 걸 알았다.
“안타깝습니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겪지 않아도 됐을 일인데…….”
바로 어제, 청성의 장로가 당지천과 마찰을 빚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지천을 핍박했는데 당기룡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 청성에 따지려고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당지독이 분노를 참을 수 없다며 자신이 직접 가서 따지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단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
청성에서는 곧장 사과와 함께 적절한 보상을 보내왔다.
당지독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당기룡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신화문에서 보내온 몇 가지 정보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청성파 내부의 반발이 심함에도 일방적으로 결정된 사안입니다. 삼 공자님께 보복이 생길지 모르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당지독이 아무리 협상과 압박을 잘한다고 한들, 장로의 대다수를 구워삶을 능력까진 못 됐다.
거기다. 그 기간이 단 하루라면 당기룡 자신조차도 못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단박에 일 처리를 끝냈으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더냐.’
너무 유능한 게 오히려 이상해졌다.
순전히 당기룡의 망상일 뿐이지만, 어쩌면 청성을 이용해 당지천을 배제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기에 당기룡은 일단 당지천에게 세력을 붙여주기로 했다.
아니, 엄연히 따지자면 그들이 먼저 당지천을 찾아온 것이지만.
“굳이 이런 형태로 해야 했나 싶기도 합니다.”
눈앞의 백호단주는 잘 모르겠지만, 당지천을 납치한다는 계획.
그건 사실 당기룡이 아닌 오늘 아침 찾아온 만독연주가 냈던 계획이었다.
총회로부터 일주일이 넘게 지난 지금.
그간 광물독이라는 난제에 부딪혔던 연구원들이 당지천의 연구를 수도 없이 복기해 보며 왜 이런 결론이 도출됐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허나, 대대로 내려오던 난제를 답만 안다고 해서 풀 수 있을 리가 만무한 법.
만독연주를 비롯한 연구원들은 끝내 과정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고, 이내 당지천은 사실 인간이 아니었기에 난제를 해결했고, 그러니 당지천을 섬겨야 한다는 결론만 내놨다.
-그리하여 저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은 삼 공자님의 휘하에 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삼 공자님을 모셔가려는데 허락 좀 해주십시오.
-포대 자루를 들고서 말이냐?
-저희가 오늘 당장 연구에 대한 해설을 듣지 못한다면 내일부턴 당가에 없을 터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늘부턴 당지천을 섬길 테니 뛰쳐나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내놓으라는 만독연주의 협박.
지금 다시 그 협박을 떠올려 보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역시 당가 최고의 기재들이 모이는 만독연의 연구원들다운 뛰어난 결론이야.’
자고로 배움에는 나이가 없는 법.
당지천의 유능함을 본 연구원들이 스스로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는데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다, 만독연주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연구원들뿐만이 아닌 믿음직스러운 장로들까지 함께한다고 했으니 필시 당지천이 세력을 갖춘다면 지금이야말로 적기였다.
‘그러니 부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여전히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걱정하는 당기룡.
그런 당기룡의 염려가 통했는지 때마침 백호단원 한 명이 집무실로 들어와 보고했다.
“만독연주가 배송을 마쳤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