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35화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밥을 먹는데도 답답한 속 때문인지 물을 마실 때마다 반사적으로 한숨이 먼저 나왔다.
“크으, 인생…… 쓰다…….”
“공자님. 고작 물을 드시면서 뭘 그렇게 주접을 떠십니까.”
“에휴, 네가 뭘 알겠니…….”
“……적어도 공자님보단 많이 알 것 같습니다만?”
어제 곡노를 찾아갔을 때, 쉽게 갈 수 있을 거란 생각과 달리 문전박대를 당했다.
도대체 왜 나를 거부했을까?
당가에서 제일 유능한 사람 중 한 명이자, 남들이 모르는 광물독의 비밀도 파헤치고, 사천 최고의 녹주석 광산까지 보유한 나를?
“공자님의 소식이 밖에 퍼진 것도 아닌데, 곡노가 보기엔 그저 어린애로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네.”
생각해 보니 간단한 이야기.
당가는 폐쇄성이 짙다 보니 안의 이야기가 바깥으로 잘 새지 않는다.
독학관같이 가볍고 가문에 직접 해를 주지 않는 내용이라면 모를까, 그게 녹주석같이 이익과 관련된 거라면 철저하게 통제되었을 거다.
즉, 곡노가 내 정보를 안다고 해도 기껏해야 조금 뛰어난 인재에 불과하다는 거다.
‘전보다 조금 복잡해졌지만, 그래도 다행히 쉽게 해결되겠네.’
이유를 모른다면 모를까.
이제는 대처할 방법을 떠올렸기에 더는 물이 쓰지 않았다.
“그나저나 공자님. 어제 하시던 현철의 연구는 끝나신 겁니까?”
“아, 그거? 어. 딱 예상대로더라고.”
현철.
어쩌면 티타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역시나 예상대로 니켈합금강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시간이 될 때 따로 니켈을 추출해 내면 될 듯했다.
현대에서라면 모를까, 여기서 니켈의 용도는 굉장히 제한적이어서 급한 일은 아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예상과 같아서 다행입니다.”
마치 주접떠는 걸 더 안 봐도 돼서 다행이라는 듯 물병을 매만지는 일염이.
거, 한 번 장난친 거 가지고 너무 그러네.
그때, 혼란한 밥상 앞에 남궁공자가 와서 착석했다.
“아이고, 머리야.”
어제 거하게 한잔 걸쳤는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물을 들이켜는 남궁공자.
원래 고수들은 술에 잘 안 취하지 않나?
“뇌의 님 정도 되시면 숙취는커녕, 취하지도 않을 텐데 왜 이렇게 힘들어하십니까?”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다. 다음 날 숙취가 없다면 그건 술을 마신 게 아니란 말이다.”
“숙취가 없는 술도 있잖습니까.”
“그런 건 술이 아니다.”
취향 참 확고하네.
이래서 오늘 일이나 제대로 할런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름깨나 날리고 다니는 고수인데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뇌의 님. 혹시 오늘 시간 좀 있으십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
“그럼 저랑 같이 환자나 보러 가시겠습니까?”
“환자……?”
멍한 얼굴로 반문하던 남궁공자가 이내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소리를 질렀다.
“뭬야?!”
식탁을 부술 듯이 박차고 일어나는 남궁공자.
그 기세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일염이가 반응하고, 장하가 반사적으로 식탁으로 기어 들어갈 정도였다.
“그, 그렇게 놀라실 일입니까?”
“크흠,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머쓱한 듯 뒤통수를 몇 번 긁적이던 남궁공자가 물을 몇 모금 들이켜고 물었다.
“그런데 환자 보러 간다는 게 무슨 소리냐. 혹시 의술에 관심이 생긴 것이더냐.”
“아, 그게…….”
내가 녹주석 광산을 가졌기에 곡노의 도움이 필요하단 점을 제외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뇌의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중독된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라…….”
“맞습니다.”
“어제는 문전박대를 당했다면서 왜 굳이 치료를 해주러 가는 것이냐? 어차피 정오쯤이면 알아서 찾아올 게 뻔한데.”
“독이 어떤 독인지는 모르겠으나, 시간 끌어서 좋을 건 없잖습니까.”
사실 그 정도로 급한 독이었으면 곡노가 어제 도착하자마자, 지체 않고 당가로 찾아왔을 거다.
그러지 않았다는 걸 보면 별로 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이야기.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순순한 선의로 포장해 답변했다.
“물론, 개인적인 친분을 쌓고 싶은 바람도 있습니다만, 곡노께서 정식으로 치료해 줄 것을 요청한다면 가문에선 이것저것 얻어내려고 저울질을 계속할 테고, 또, 그러다 보면 환자의 상태가 악화될 것이 분명하니…….”
솔직히 내가 말하면서도 어설픈 변명거리라고 생각했다.
급조한 만큼 말의 논리가 굉장히 빈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허나, 뇌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지 대견스럽다는 듯 나를 봤다.
“마음씨가 참으로 곱구나. 왜 하필 이런 귀한 인재가 하필이면 당가에서 나와서…….”
하늘이 개탄스럽다는 듯 한숨을 쉬는 남궁공자.
그 모습을 보니 부정적인 반응은 아닌 듯하여 재빨리 동정심도 유발했다.
“따로 일이 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비록 부족한 실력이지만, 가벼운 독이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도와주마. 같이 가자꾸나.”
풀이 죽은 얼굴로 혼자 가겠다고 하자, 곧장 같이 가겠다는 뇌의.
역시 동정표를 사는 건 어린애의 특권이라 그런지 효과가 직빵이었다.
“그런데 지천아.”
“예. 뇌의 님.”
“잘 생각했다. 자고로 의원이라 함은 그깟 재물 몇 푼에 사람 목숨으로 장난치는 장사꾼이 아닌, 오직 환자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자임을 명심하거라.”
“예? 아, 예.”
“또한…….”
갑자기 귀신에 홀린 건지 의원의 마음가짐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하는 남궁공자.
‘아니, 관심 없어서 굳이 설명 안 해줘도 되는데.’
내가 의원이 될 것도 아니고 의원의 마음가짐에 대해 들어서 도대체 뭐에 쓴단 말인가.
차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데도 남궁공자는 나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는 듯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니 언제나 마음에 새겨두고 잊지 말도록 하여라.”
속사포처럼 쏟아지던 남궁공자의 가르침에 정신이 대략 멍해질 때쯤, 남궁공자의 설명이 끝났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언제나 잊지 않고 꼭 명심하겠습니다.”
반쯤은 진심이었다.
적어도 설명을 끝내줘서 감사한 마음은 있었으니까 말이다.
“시장하실 텐데 얼른 식사하시죠.”
행여나 남궁공자가 다시 설명을 시작할까 봐 모두가 부랴부랴 젓가락을 들었고, 나 또한 옆에 있는 병을 들어 내 밥 위에 부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지천이 너는 뭘 그리 부어 먹느냐?”
“아, 이거 말입니까? 백각기린을 정제한 것입니다.”
“백각기린 말이냐?”
“예.”
사실 엄연히 따지자면 백각기린에서 추출한 레시니페라톡신이다.
극미량만 먹어도 대부분 매운 걸 느끼기 전에 쇼크사할 만큼 매운 물질로 독학관 졸업 시험에서 발견한 물질.
무려 불닭 라면의 400만 배인 160억 스코빌이라는 괴랄한 독성을 가진, 매운맛의 결정체인 물건으로 지금은 내가 먹을 수 있게끔 희석해 놓은 것이다.
물론, 레시니페라톡신을 먹는 이유가 독공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인 만큼, 매 끼니 혀가 얼얼해질 만큼 맵게 유지하고 있긴 했다.
“쓰읍, 조금 맵습니다. 한번 드셔보시겠습니까?”
맵다는 소리에 가소롭다는 듯 웃는 남궁공자.
“허허, 내가 사천에 몇 해가 넘도록 있었는데, 겨우 그거 하나 못 먹겠느냐? 줘보거라.”
“쓰읍, 두 바퀴만 돌리면 적당할 겁니다.”
“날 너무 얕보는 게 아니냐.”
두 바퀴면 된다는 걸 아예 다섯 바퀴나 돌리는 남궁공자.
자기 과신이야말로 최대의 적이라는 소리를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럼…….”
얼마나 매울지 상상도 안 가는 밥을 입에 넣는 남궁공자.
양이 양이다 보니 그 여파는 곧장 찾아왔다.
“끄아아악!!!”
젓가락을 집어 던지며 비명을 지르는 남궁공자.
당황한 나머지 혀를 부여잡고 손 부채질하다가 이내 빠르게 기를 운용해 독기를 중화시켰다.
“미, 미친 거 아니냐! 도, 도대체 뭘 먹는 거냐!”
“이전에 설명해 드렸듯이 백각기린입니다만.”
태연하게 다시 밥을 먹자,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는 남궁공자.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얼굴이었다.
“저…….”
그런 난장판 속에서 뭔가 궁금한 것이 있는지 갑자기 손을 드는 장하.
“만독불침이 되면 어떠한 독도 통하지 않고 고수들 또한 그렇다고 들었는데, 뇌의 님께 공자님의 독이 통합니까?”
아무래도 뇌의에게 레시니페라톡신이 통한 게 이상해 보였나 보다.
“그거? 얼추 맞는 말이긴 한데, 따지자면 엄연히 틀린 말이야. 모든 독은 작용기전이란 걸 가지고 있거든.”
“작용기전 말입니까?”
작용기전.
말 그대로 독이 사람 몸에 작용하는 과정, 메커니즘이다.
“네가 공부하고 있는 독들의 특성을 몇 개 떠올려 보거라. 암기에 발라 혈도를 타게 해야 하는 독이 있으면 음독해야만 하는 독도 있잖느냐?”
“방법이 다른 이유가 작용기전 때문이라는 이야기이십니까?”
“맞다. 몸 전체에 작용하는 독은 혈도를 따라 흐르게 하는 것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고, 내상을 입히는 독은 음독하는 게 빠르기 때문이다.”
내가 설명하기도 전에 장하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 주는 남궁공자.
확실히 나는 설명하는 데 젬병이다 보니 대신 설명해 주는 게 편했다.
“……해서 독이 작용하는 게다.”
“잘 이해하기 어려우면 독에 노출, 표적 부위로의 전달, 독의 작용, 이 세 가지 절차만 기억하면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사실 과학적으로 설명해 보라면 한없이 복잡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아직 어린 장하에게는 이른 내용이라 나는 그냥 한마디만 보태고 말았다.
아무래도 독성학이란 게 워낙 복잡하다 보니까 말이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궁금증을 해결해 줘서 고맙다는 장하.
나는 그런 장하의 감사를 받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곡노의 문제가 작용기전과 관련이 있었을 거라곤.
* * *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곡노의 장원을 방문한 당지천과 남궁공자.
“네가 말했던 곳이 여기가 맞느냐.”
“예, 맞습니다만…….”
“허허허.”
그런데 웬걸, 그들이 장원에 도착해서 보게 된 광경은 당군성과 한 장로가 곡노와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뭐야, 2장로 아니야? 저 사람도 당군성쪽이었어?’
천수나타(千手那咤) 당소예.
당가의 방계 출신으로 원래라면 가문의 비전을 배울 수 없는 여성임에도 어마어마한 무재와 스스로 발전시킨 암기술을 인정받아 2장로의 직위에 오른 인물.
일전에 당지천이 만독연에서 봤던 6~10장로들은 본신의 무력도 뛰어난 편이지만, 연구에 미친 장로들이었기에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 반해, 당소예 장로는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강호에 이름을 떨쳐왔던 만큼 사천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가문 내에선 후학을 기르느라 힘쓰기도 하고, 몇 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운 대장로를 대신해 장로원장의 직위를 맡고 있기에 영향력이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2장로가 당군성과 함께 있었으니 당지천은 언짢은 얼굴로 당소예를 볼 수밖에 없었다.
“삼 공자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런 당지천을 발견하자, 퍽이나 반갑다는 얼굴로 인사하는 당군성.
안색을 굳힌 채 생각을 이어나가던 당지천은 연이어 당군성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생각하며 조금 머리를 굴리더니, 이내 당군성을 무시하고 곡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대협. 소인은 사천당가의 당지천이라고 합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쥐뿔도 관심 없어 보이는 곡노.
하지만 당지천은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듣자 하니 친지분이 편찮으시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 옆에 계시는 이분이 뇌의, 남궁공자 님이십니다.”
뇌의라는 이름에 곧바로 남궁공자를 살피는 곡노.
아무리 해독을 한다고 한들, 회복을 위해선 의원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곡노도 잘 알고 있기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독에 중독되었다고 하여도 회복을 위해선 의원의 진찰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될 겁니다. 더군다나 당가와 교류를 많이 하신 만큼 독에 대해서도 박식하니 저희의 진찰을 한번 받아보시지요.”
당지천의 설득에 곡노가 혹하는 듯하자, 곡노를 만류하는 당소예 장로.
“아무리 뇌의 님이라고 한들, 독과 관련된 일에는 당가가 훨씬 유능합니다. 또한, 진찰 부위에 따라 수치심을 느낄 수 있으니 손녀분을 생각하신다면…….”
“그만.”
허나, 이미 마음이 동했는지 곡노는 귓등으로 듣고는 당지천과 당소예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네 녀석도 내게 원하는 게 있어서 날 찾아왔겠지. 뭐, 상관없다. 양쪽 모두에게 진찰을 받겠소. 하지만 손을 빌려주는 건 내 손녀를 고쳐주는 쪽뿐이라는 걸 명심하시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따라 들어오시오.”
당군성과 당소예 장로가 불쾌한 눈으로 당지천을 쳐다봤지만, 당지천은 비웃음을 흘리며 곡노의 뒤를 따라 들어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