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34화
잠시 전만 해도 당지천을 기세로 찍어 누르려던 벽곡단.
이제는 신화문주의 등장으로 인해 찍어 누르긴커녕, 오히려 자신이 눌림을 당하는 중이었다.
“크흠, 일단 진정부터 하지.”
“진정이라…….”
벽곡단의 말에 코웃음을 치는 신화문주.
이내 대화하기 싫다는 듯 왼손으로 등에 찬 중검을 역수로 쥐자, 생글생글 웃고 있는 신화문주의 눈과 대비되게 벽곡단의 눈은 잿빛으로 변해갔다.
신화문의 문도를 건드렸기에 신화문주가 올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화를 낼 것도 예상했다.
허나,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극심한 분노를 표출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고작 문도 한 명 다쳤다고 나설 사람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이리도 화를 낸단 말인가.’
신화문을 주저 없이 건드릴 수 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신화문주가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을 알아서였다.
정파와 사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신화문.
신화문은 언제나 실리를 추구하며 문도가 사망한 게 아닌 이상.
아니, 문도가 사망하더라도 합당한 보상을 제시한다면 일을 키우지도, 적개심을 분출하지도 않았다.
그 합당한 보상의 규모가 사람 하나 죽은 것치고는 조금 과하긴 했다만 말이다.
어쨌든 사람이 죽더라도 협상부터 나서는 게 신화문이었다.
그래서 신화문을 건드리는 데 주저함이 없던 것이었는데…….
“전 처음부터 차분하게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만?”
신화문주는 극명한 분노를 드러내듯 서서히 검을 뽑았다.
티끌조차 묻지 않아 보이는 순백의 검을 말이다.
“…….”
갑작스럽게 등장한 흑의인과 그를 보고도 제지하지 못하는 벽곡단.
그 둘의 모습을 보던 사람들은 자연스레 흑의인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저자는 누구지? 혹시 자네는 아는가?”
“글쎄……. 딱히 모르겠네. 허나, 기세를 보아하니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군.”
바깥이 소란스럽자 나와본 대장장이 덕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무정검…….”
“무, 무정검?! 천하십대고수인 무정검을 말하는 겐가?”
“맞네! 저 왼손에 역수로 들린 중검을 보게나! 예전에 무정검은 만년한철로 된 중검을 사용한다고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네. 거기다, 저 색을 보게나. 만년한철은 순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새하얀 형상을 하는데, 저자의 검은 티끌 하나 없는 그야말로 순백이 어울리는 검이잖나.”
“그런 무정검이 여기엔 대체 왜 온 건가?”
“글쎄, 그것까지는 잘…….”
어떤 사람이 호기심에 물었지만, 그 물음에 답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알 수 있는 건 무정검이 꽤 화가 난 듯한 모습이라는 점뿐.
“그런데 저 모습을 보면 무정검이라는 별호가 전혀 어울리지 않잖는가. 다른 이와 착각한 것은 아닌가?”
“내가 듣기로는 감정을 내비치는 게 마지막 경고라고 하더군. 그 이후부터는 무정이라는 단어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무정검이라는 별호가 붙은 것이고 말일세.”
“허어, 그렇군.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모두가 의문에 찬 눈으로 벽곡단을 쳐다보고 있자, 벽곡단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방도가 없군…….’
일이 꼬여도 너무 꼬였다.
어떻게든 제자의 명성만큼은 지켜주고 싶었으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거기다, 대외 활동이 전무하다시피 한 신화문주가 사람들 면전에 나타났으니…….
‘신화문을 건드릴 순 없으니 이만 물러나야겠어.’
다른 고수들보다 무정검이 무서운 점은 단지 사람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
작정하고 정보에 손대기 시작하면 상상 그 이상의 결과가 나온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손을 써놨다고 해도, 신화문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예측할 수 없으니 말이지.’
자신은 단순히 청성의 일원이 아닌, 대의를 함께하는 조직의 일원.
흔적을 지웠다고 하나, 만에 하나라도 조직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안 됐으니 말이다.
“미안하오. 결례를 범한 것을 사죄하겠소.”
벽곡단이 예를 갖추며 사과함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무정검.
그 모습을 본 벽곡단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 일에 대해선 차후 문파에서 보상하겠으며 개인적으로도 보상하겠소.”
기분이 나쁘지만 아쉬운 건 자신이라 생각해 더욱이 예를 취했음에도 무정검은 그 자세 그대로 꼿꼿이 서 있었다.
“사과할 사람이 저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눈짓으로 당지천을 가리키는 무정검.
‘당지천에게도 사과를 하라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 눈짓에 벽곡단은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당지천이 비무에서 쓴 화약 암기.
그건 당가에서 사용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는 물건이었다.
좋은 무기를 쓴다면 잠깐은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무기에 기대 수련이 게을러지는 법.
검을 쓰는 문파조차 그러할진대, 암기를 다루는 당가는 더욱이 심했다.
본디 무공이란 투로를 익히는 것이고 암기술 또한 그러했는데, 화약 암기는 투로가 정해져 있고, 던지는 방향만 정하면 올곧게 알아서 나갔다.
물론, 그 단순함은 강한 편이었으나 어디까지나 하류 잡배들에게나 통하는 것이지, 고수들에게는 그런 삿된 물건이 통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연유로 당가에서 쓰이지 않는 물건이었는데, 그걸 버젓이 들고나와 비무에서 이긴 게 반칙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거기다, 잘잘못을 떠나서 새파랗게 어린 놈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다.
“미안하다.”
허나, 그걸 무정검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어디까지나 무정검 스스로 모욕하는 것보다 당지천에게 사과하게끔 하는 게 더 치욕스러운 일이라 판단해서 그런 걸 거다.
그렇기에 내색하지 않고 짧게 사과하자, 당지천이 앞으로 나와 대뜸 손을 내밀었다.
“현철과 곤옥은 지금 주시죠.”
“그거라면 나중에…….”
“어허.”
감히 새파랗게 어린 놈이 훈계하듯 으름장을 놓자, 벽곡단의 얼굴이 심히 일그러졌지만, 결국엔 이를 갈면서도 순순히 현철과 곤옥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지천 네 이놈. 운 좋게 신화문주가 뒤를 봐줬다고 세상이 우스워 보이더냐. 이 일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벽곡단이 속으로 당지천의 이름을 되새기고 있든 말든 당지천이 현철과 곤옥을 받아가자, 무정검은 검을 도로 집어넣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사과하신다니 저도 일을 키우고 싶진 않으니 여기서 자중하도록 하죠. 그리고 공자님은 잠깐 저 좀 보실까요?”
당지천이 무정검의 뒤를 따라 흥겨운 발걸음으로 떠나가는 그 순간에도 벽곡단은 그저 복수를 다짐하며 이를 갈고 있어야만 했다.
* * *
신화문주의 도움으로 쉽사리 현철을 되찾고 신화문으로 온 나는 심히 들뜬 상태였다.
‘키야, 역시 인생은 인맥빨이라니까? 지가 장로면 어쩔 건데? 천하십대고수 앞에선 말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데 말이야.’
장로급을 건드리기엔 아직은 부족했기에 나중을 기약하려 했는데 이렇게 쉽사리 면박을 줄 수 있어서 참으로 호쾌했다.
“아주 후련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참 다행이네요.”
“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십 년 묵은 체증까지 다 내려가는 기분입니다.”
거기다, 면박은 줄 대로 주고, 곤옥까지 얻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감사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요즘 안 그래도 마땅한 인재를 구하기가 힘든데 하필이면 우리 유망한 인재를 건드렸지 뭡니까.”
“저런…… 화가 많이 나셨겠습니다.”
“뭐, 그래도 더 특출난 인재를 영입할 기회가 생겼으니 그리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음흉한 눈으로 나를 보는 신화문주.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어느샌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입당할까 봐 애써 말을 돌렸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보자고 하신 겁니까?”
“별건 아니고, 녹주석 광산에 대한 건입니다.”
“녹주석 광산 건 말입니까?”
“당가에서 녹주석 광산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걸 보면 녹주석을 채굴할 생각인 것 같던데, 공자님은 아직 별도의 행동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말이죠.”
현재 녹주석 광산은 신화문을 통해 바지 사장을 구해서 조작해 둔 상태.
내가 지금 당장은 돈이 없었기에 당기룡이 전서구를 보내오면 선금을 요구하고, 그걸로 인부들을 모집해 채굴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멀리 있는 광산이라면 모를까.
사천에서 제일 가깝고 규모도 큰 광산이 내 광산이라서 가능한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공자님이 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 곡노가 사천에 왔다는 연락을 받았거든요.”
“곡노 말입니까? 그게 누구입니까?”
곡노라…… 전혀 못 들어본 별호인데…….
“아, 못 들어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일신의 무력이 강하신 분은 아니라서 말이죠.”
“그럼 그분과 제 녹주석 광산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곡노는 중원에서 유일하게 곡괭이를 무기로 쓰는 고수거든요.”
“예? 곡괭이 말입니까? 그 돌을 캘 때 쓰는 곡괭이?”
“역시 공자님. 척하면 척이군요. 제가 점찍은 인물다워요.”
“허허허…….”
아니, 아무리 무림에 다양한 무기들이 있다고 한들, 곡괭이가 웬 말인가 곡괭이가…….
‘내가 본 무협지에서 곡괭이는 없었다고!’
남이 쓰는 무기지만 왠지 모르게 용납이 안 됐다.
“혹시 곡괭이를 다루는 고수들이 많습니까?”
“아뇨. 제가 알기로는 무공을 익히는 조건이 까다로워서 그런지 본의 아니게 일인전승이라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그나마 한 명이라고 해서 다행이지, 만약 문파가 있었으면 기겁할 뻔했다.
“그래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공자님이 아직 채굴 계획을 세우지 않으셨다면 곡노에게 부탁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분께 말입니까?”
“예, 곡괭이질 한 번이면 산을 하나 밀어버린다는 분인 만큼, 녹주석 광산쯤은 곡괭이질 몇 번이면 쉽게 채굴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일신의 무력이 강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곡괭이질 한 번에 산을 하나 밀어버리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애초에 내가 광부 일은 모른다만, 수십 개의 원석을 캐내는데 그게 곡괭이질 몇 번으로 가능하다는 게 전혀 믿기지가 않았다.
거기다…….
“그걸로 신화문이 보는 이득이 뭡니까?”
이해관계가 일치하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신화문주가 일방적으로 제안을 한 상황.
당연히 무언가를 얻어가려고 할 거다.
물론, 아까 일을 도와준 만큼 나도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겠지만, 그 규모가 커진 상태.
녹주석의 판매금이 결코 적지 않을 터이니 일정 이상 내주진 않을 거다.
“녹주석 판매 순이익의 삼 할. 대신 녹주석 광산에 대한 관리는 신화문에서 일체 관리하도록 하죠.”
30%라…… 이건 너무 후한데.
누군가 보기엔 내 광산 캐서 30% 떼가는 거면 날강도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실상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많이 가져가는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녹주석 광산이 돈이 된다는 게 알려진다고 치자.
그러면 당연히 불나방들이 달려들 것이고, 그 규모가 한없이 커지면 청성과 아미에서도 군침을 흘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거다.
어중이떠중이라면 몰라도 일개 개인이 문파를 감당할 수는 없는 법.
따라서 나는 감당하기 힘든 시기가 오면 그제야 가문에 광산을 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가에서 녹주석에 대한 정보를 은폐한다고 해도 최대 몇 년이라고 보는 기간.
그런데 이렇게 아예 신화문이 관리를 해준다면 그 기간은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머리 아픈 일들은 모두 신화문주가 처리할 테니…….
‘나쁘지 않아.’
자고로 인생의 진리는 불로소득이랬다.
숨만 쉬어도 돈이 불어나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거기다, 만에 하나라도 신화문주가 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그럴 땐 내 쪽에서 광산에 연연하지 않고 당기룡에게 넘겨 버리면 문파 간의 문제로 번져 버리기에 신화문에서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그냥 믿고 맡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해도 내 처지를 잘 알 신화문주가 30%를 부른 건 상당히 후한 느낌이었지만.
그런 내 생각을 신화문주도 아는지 조건을 하나 더 달았다.
“그리고 하나 더, 곡노의 협조를 공자님이 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말입니까? 못 할 거까지는 없습니다만, 그 부분은 신화문이 나서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곡노가 사천에 온 이유가 당가의 진찰을 받으러 온 거랍니다.”
진찰?
의선문이 아니라 당가에?
“독입니까?”
“그거까진 모르겠네요. 하지만 유능하신 공자님이라면 충분히 해결하실 수 있으시겠죠?”
이미 계약을 하기로 맘을 굳힌 상황.
심지어 문제가 독에 대한 거라면 굳이 미룰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곡노가 없다면 성사되지 않을 계약이니 곡노의 문제 먼저 당장 가서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독에 대한 거라면 자신이 있었기에 앗싸리 해결하고 현철을 녹일 생각에 나는 곧장 곡노가 지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호기롭게 곡노가 지낸다는 곳으로 향하자, 웬만한 중소 상단이 가질 법한 큰 장원이 보였다.
“어후, 집이 으리으리한 걸 보면 생각보다 돈이 많은 사람인가 보네.”
곧장 문을 두들기자,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는 노인.
잠시간 문지기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신화문에서 보여줬던 초상화의 주인.
곡노, 본인이었다.
‘문지기가 있으면 귀찮을 뻔했는데, 일이 더 쉬워졌네?’
절로 떠오르는 미소.
다른 사람과 착각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았지만, 허리춤에 검 대신 있는 곡괭이를 보면 곡노가 확실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협. 소인은 사천당가의…….”
“관심 없다.”
-쿵.
“……당지천이라고 합니다만…….”
“공자님. 문은 이미 닫혔습니다.”
“……나도 보면 알아.”
하아, 역시 인생.
쉽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