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33화
본디 삶이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한다.
허나, 그 속에도 예측이 가능한 일들이 있는 법.
그런 의미에서 당지천이 비무를 받아들인 건 청성의 장로, 벽곡단으로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합시다. 비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비무하자는 당지천.
“단, 판돈을 조금 높이시죠.”
자신이 질 가능성은 아예 없다는 듯 확언을 하는 모습에 벽곡단은 생각에 잠겼다.
‘아니, 도대체 뭘 믿고 저리 까분단 말인가? 분명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용독술에 특출난 재능을 보일지언정, 무재는 그리 특출난 수준은 아니라고 하였는데…….’
자신의 임무는 당지천에게 현철을 빼앗는 일.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심히 의심스러워 보이게 된다면 순순히 돌려줘도 좋다는 다소 이상한 내용의 임무였다.
그래서 만에 하나 제자가 지더라도 현철을 뺏기는 건 상관없었지만, 문제가 되는 건 지금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
“저기 봐봐. 청성파랑 당가 아니야?”
“맞네. 당가 쪽은 직계인 걸 보면 그 유명한 삼 공자인 거 같은데?”
어느샌가 자신들을 보고 모여든 구경꾼들에 의해 청성의, 그리고 제자의 명성이 떨어지는 게 큰 문제였다.
‘당가 놈들은 항상 꿍꿍이가 있으니…….’
어리다고 한들, 당지천 또한 당가의 사람.
근거 없는 자신감 따윈 없을 거란 생각이 벽곡단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거기다 백현이가 큰 충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정말 불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백현이 앞으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걸 알기에 벽곡단은 조금 신중해졌다.
아무리 조직을 위해선 제자의 목이라도 바칠 수 있다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면 지켜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그런데 당지천이 너무 쉽게 받아들이니 오히려 이쪽이 찝찝해졌다.
‘설마 숨겨둔 한 수가 있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만약 숨겨둔 수가 있었다면 정보원이 미리 알려줬을 터, 당지천이 조직의 눈을 피했다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도대체 이 불길한 예감은 뭐란 말인가.’
당연하게도 이겨야 할 이 비무.
백현의 패배로 끝날 것만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스승님. 무얼 그리 고민하십니까? 저 백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스승님의 가르침을 실천해 왔습니다.”
고작 저런 놈한테 질 만큼 허투루 수련하지 않았다며 백현은 몸이 달아오른 듯 벽곡단을 재촉했다.
“스승님이 친히 가르침을 내려주시는데도 스스로 귀를 막는 어리석은 녀석에게 강호의 선배로서 몸소 가르침을 내려주겠습니다.”
당지천과 마찬가지로 질 것이라고 상상조차 안 하는 백현.
사실 백현이 보기엔 당지천이 비무하자고 한 것은 분에 못 이겨 우발적으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남들이 띄워줘서 분수를 모른다거나 말이지.’
벽곡단은 언제나 정보는 도움이 되니 산속에서 수련할 때도 밖의 소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기에 당가의 소문에 딱히 귀를 기울이지는 않아도 무시하지도 않았기에 당지천이 당가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지.’
삼 공자가 독학관의 비무에서 이 공자를 꺾은 것도.
그리고 그게 실전성이라곤 쥐꼬리만큼 없는 수면독이라는 것도.
심지어 이 공자가 진 가장 큰 원인이 방심해서 암기를 맞아줘서라는 점도.
다 안다.
이 공자가 마지막에 분전하긴 했다만, 이미 중독된 상황이라 손쓸 새도 없이 지고 폐관에 들어갔다는 건 아주 유명한 이야기.
반대로 말하면 암기만 맞아주지 않으면 질 일도 없다는 이야기다.
‘거기다 수면독에 대한 해독제도 있으니.’
가까이서는 독을 멀리서는 암기를.
그게 당가의 신조인 만큼, 같은 사천에 있는 청성파에선 당가를 상대하는 방법을 교육시켰고, 해독제 또한 가지고 있었다.
즉, 수면독이든 뭐든 간에 독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소리.
그렇다면 누가 이길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아니겠는가?
‘드디어 당지혁 그 녀석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겠어.’
당지혁을 이긴 당지천.
그리고 그런 당지천을 이긴 자신.
그 모습을 상상하니 백현은 가슴이 웅장해짐을 느꼈다.
세간에선 항상 같은 나이의 당지혁과 백현 중 누가 더 강한지에 대해 화두가 되곤 했다.
그렇기에 혈기가 들끓는 나이인 백현은 당연히 당지혁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지만, 어째서인지 스승과 문파에서 막았다.
기의 수발이 자유로워지기 전까진 안 된다나 뭐라나.
그런데 이렇게 간접적이나마 증명할 기회가 오다니…… 이걸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허어, 이를 어쩔꼬…….’
이미 백현은 혈기가 들끓어 막을 수 없는 상황.
지금 제자를 만류한다면 한동안 원망을 살 걸 알고, 또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하는 것이 되기에 벽곡단은 애써 불안감을 떨쳐냈다.
“좋다. 네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재미겠지만, 한순간의 재미를 위해 큰 걸 포기할 순 없죠. 적어도 현철에 상응하는 물건을 내놔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러면 네놈이 지면 뭘 더 내놓을 거냐?”
“저희가 지면 현철의 값만큼 돈을 드리죠.”
“좋다. 만에 하나라도 네놈이 이긴다면…….”
벽곡단이 품속을 뒤져 검은색 광택이 나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이 곤옥을 네게 주마.”
곤옥.
곤륜산에서 나는 검은 옥으로 다른 무기로 만들긴 힘드나 암기를 만들 때만큼은 현철과 같은 취급을 받는 물건이었다.
당연하게도 당지천은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오오, 곤옥이라…… 좋습니다.”
“비무의 규칙은 알고 있겠지?”
혹여나 극독을 써 제자를 죽이려는 속셈이 아니냐고 묻자, 당지천이 호기롭게 말했다.
“만약 제가 극독을 써 제자분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여기서 직접 제 목을 치시죠. 여기 있는 수많은 사람이 장로님의 증인이 되어드릴 테니 뒷감당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당지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벽곡단.
당지천이 벽곡단이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벽곡단 또한 당지천이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둘 다 자리로 가거라.”
벽곡단이 손짓하자, 적당한 거리를 벌리는 당지천과 백현.
그들이 움직임에 따라 주위에 있던 관중들 또한 조금 멀찍이 떨어진 채로 비무할 자리를 만들어 줬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갑자기 백현이 당지천에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네가 얕은 수작으로 당지혁을 꺾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당가의 수법 또한 모두 알고 있지. 그러니, 그런 어설픈 수작으로 나를 이길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진심으로 달려들 거라.”
강호의 노선배가 후기지수에게 큰 가르침을 선사하는 모양새.
고작 3살밖에 차이가 안 나면서 온갖 생색은 다 내는 백현을 보고 당지천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백현은 그걸 못 봤는지 한술 더 떴다.
“일초지적도 안 되는 상대지만, 나도 최선을 다하겠다. 그러니 비록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다곤 하나, 무림의 선배로서 삼 초를 양보하도록 하지.”
백현이 호기롭게 제안하자, 당지천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차피 암기를 안 맞으면 질 일이 없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입꼬리를 말며 태평하게 비수를 꺼내는 당지천.
“그런데 이건 아시려나 모르겠네. 본디 알고도 못 피하는 게 우리 당가의 암기라는 걸.”
이때까지만 해도 당지천이 이길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천일염을 제외하곤 딱 한 명뿐이었다.
“잡담은 거기까지 해라. 그럼…… 시작!”
시작 선언과 동시에 당지천이 무심하게 비수를 뿌리자, 느릿하게 손에서 빠져나가는 비수.
벽곡단의 눈에는 정지한 듯 느릿하게 보이는 만큼 그 비수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홈이 파 있어……?’
당지천의 비수에는 조금 갈라진 홈이 있는 게 아닌가?
본디 특수한 암기가 아니라면 갈라진 곳 없이 매끈하기 짝에 없어야 좋은 암기로 평가받는다.
저렇게 대놓고 홈이 파여 있다면 당연히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지 않겠는가?
-오른쪽이다! 피해라!
단번에 그 실체를 파악한 벽곡단이 반사적으로 전음을 보냈다.
“예?”
하지만 백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펑!
당지천의 비수는 예상대로 백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 * *
비수를 꺼낼 때만 해도.
백현이 삼 초를 양보해 준다고 할 때도.
그리고 백현의 반응을 볼 때만 해도.
백현이 가히 이 암기를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펑!
“와, 이걸 피하다니…… 청성파 최고의 기재라는 소리가 허언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런데 백현은 어떻게든 피해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말이다.
“이, 이게 대체…….”
아마 아직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이 안 될 거다.
나를 얕보긴 했으나 방심은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피할 수 있던 이유는 단 하나.
“…….”
소리 없이 열심히 움직이는 저 장로의 입 덕분일 거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제자를 훈계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 차리도록 돕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어떤 조언을 해주더라도 실천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는 법.
백현 그 자신이 내 암기에 반응조차 못 한 것이라면 피하지 못할 게 뻔하다.
왜냐면, 지금 던질 건 아까보다 더 빠른 친구라서 말이다.
“실력이 워낙 출중하신 분이니 저도 본심을 내도 내겠군요. 다음 갑니다.”
“자…….”
뭐라 하려는 백현을 무시하고 두 번째 암기를 던졌다.
-펑!
아까보다 더 큰 폭음을 내며 눈 깜짝할 새에 백현에게 날아가는 비수.
“윽.”
이번에도 장로의 입이 들썩였지만, 백현은 당황한 나머지 암기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맞아주었다.
그렇게 시작되는 초읽기.
“5, 4, 3…….”
“뭔지 모르지만, 고작 이딴 독에 쓰러질 내가 아니다.”
백현이 재빨리 해독제를 꺼내 먹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황.
“2, 1.”
-털썩.
숫자가 끝나자, 해독제를 입으로 가져가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니, 청성파의 자랑이라고 그렇게 홍보하던 백현이 이렇게 허무하게 진다고?”
“에잉, 쯧쯧. 도사 놈들이 거짓말이나 일삼고 말이야. 아무리 인재가 없어도 그렇지, 저런 실력으로 사천 최고의 기재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다들 진정하게. 그래도 일초지적도 안 된다고 하더니, 암기에 맞고 수를 다섯이나 셀 동안 버텼으니 오초지적은 되잖는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지는 대장간의 앞마당.
다들 내 유능함을 찬사하기보단 백현을 까 내리기 바빴지만, 뭐 어떻겠는가.
시원하게 밟아주기만 하면 됐지.
백현의 스승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제자의 명예가 실추된다고 생각하는지 갑자기 소리를 쳤다.
“갈! 이번 비무는 무효다! 비겁하게 화약을 쓰다니!”
“화약을 쓰지 말란 이야기는 없으셨잖습니까.”
“본디 화약은 관에서 금지한 물건! 그게 굳이 비무에서 쓰지 말라고 이야기해야 안 쓰는 물건이더냐!”
아이고, 정파 놈들은 이래서 안 돼요.
관무불가침은 어디다 갔다 팔았는지 이럴 때만 관부하고 무림을 엮는다니깐?
“장로님.”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썩소가 튀어나왔다.
“정말 추하십니다.”
그러자,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노기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기세로 찍어누르려는 청성의 장로.
“네 이놈! 감히 나와 제자를 능멸하려 드는 것이더냐!”
“능멸이라 분명 그건 제가 먼저 당한 것 같습니다만…….”
허나, 그 기세는 나에게 닿지 못했기에 아주 떳떳하게 서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저만 당한 것도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아무리 비무에서 시원하게 이긴다고 한들, 이렇게 얼굴에 철판 깔고 우겨 버리면 그만이란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당연히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어라라, 약속을 안 지키시는 건가요?”
청성의 장로가 검에 손을 올리자, 인파를 헤치고 나오는 한 흑의인.
“그럼 재미가 많이 없으실 텐데요?”
장로와 비견되는 것조차 실례인 진짜 고수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