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32화
당군성의 개인 연구실.
마치 야명주 같은 은은한 빛을 내는 수정구 앞에서 당군성이 입을 열었다.
“……예, 창고의 방비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나, 뇌의가 끼어드는 바람에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그거 안타깝게 됐네.
“죄송합니다. 제가 좀만 더 유능했더라면…….”
-괜찮아, 뇌의는 불가항력이잖아. 그리고 군성이 네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너무 괘념치 마.
“감사합니다.
-그것보다 다른 건은? 현철은 맞았어?
“예, 예상하신 대로 당지천이 신화문에 현철을 요청한 듯합니다.”
-역시,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 녀석, 없어서 못 쓰는 게 많아서 그런지 기회만 되면 득달같이 달려드니까 신화문 상대로도 얻어낼 거라 예상했다니까? 아, 그래서 어떻게 됐어?
“신화문에서 배송하던 현철은 당가에 도착하기 전에 청성파의 인원을 움직여 탈취했고, 가문 내에 있는 현철 또한 모두 발주를 낸 상태입니다.”
-하하하, 잘했어. 현철이 눈앞에서 아른거릴 거다. 그 녀석.
“하지만 어떻게든 금방 대안을 찾지 않겠습니까? 멀리 가지 않아도 신화문에서 새로 내줄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런 건 상관없어.
“…….”
-왜인지 궁금하구나?
“궁금하긴 하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의를 위한 일에 의문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니 말입니다.”
-역시 군성이야.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한다니까?
잠시간 웃음을 터뜨린 이가 궁금증을 풀어주겠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그거 알아? 빙궁의 사람들은 남들보다 양기에 민감해서 화가 계속 쌓이면 앓아눕게 되어 있어. 그래서 빙궁에선 뜨거운 화가 아닌 냉철한 분노를 하게끔 가르치는 거야.
“그럼 지금 이러는 건 화를 돋워 스스로 앓아눕게 하시겠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지. 그거 고치러 빙궁에 가야 하거든.
당지천의 곁에 뇌의가 있음을 앎에도 빙궁을 언급한다는 건 뇌의가 못 고친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일을 벌이기만 하고, 굳이 마무리할 이유가 없겠군요.”
-그래. 오히려 머리 좀 돌아가는 녀석이니까 뒤가 더 찝찝할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5년 남았거든.
“5년…….”
그토록 염원했던 대의가 머지않았다는 이야기에 당군성은 환희에 찼지만, 이내 곰곰이 생각하고는 물었다.
“일부러 5년을 언급하신 건 당지천을 빙궁에 보내고 일을 벌이시려는 겁니까?”
-어. 맘 같아선 같이 처리하고 싶은데 변수는 최대한 줄이는 게 좋으니까.
변수.
이전에 당군성은 명에 따라 천일염에 대한 뒷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오는 것이라곤 당지천의 어머니와 친밀한 사이였다는 것뿐, 나머지 정보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너무 강하지도, 그렇다고 또 너무 약하지도 않은 실력.
그리고 평범한 유명세.
정보가 너무 깔끔해서 의도적으로 조작된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어떤 방법으로 구하든 모두 같은 정보가 나와서 그저 평범한 호위라고 결론 내 보고했다.
그런데도 굳이 변수를 언급하는 건 필시 당지천의 호위가 걸린다는 것이었다.
-군성아, 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녀석에게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적어도 우리의 대계를 망칠 만큼 큰 뭔가가.
“그렇습니까…….”
머리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감 덕분에 대계가 이렇게 빨리 진행되고 있기에 당군성은 금방 수긍했다.
-안 그래도 요즘 당가주가 작정하고 쑤시고 다니고 있으니까, 우리는 안전하게 가자고.
“예, 알겠습니다.”
-그럼 뒤는 잘 부탁해.
의문의 사람과 대화를 마친 당군성이 수정구에 암막 천을 씌우고 홀로 연구실에서 나가자, 연구실 안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해졌다.
* * *
현철이 도난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한 건 바로 현철을 가져오던 신화문의 문도를 찾는 일이었다.
“이쪽입니다.”
소식을 가져온 하인의 안내에 따라 당가 내의 의약당으로 가자, 쥐 죽은 듯 누워 있는 신화문도의 모습을 보고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현철을 가져다주는 임무에 생각보다 어린 문도가 와서였고.
다른 한 번은 습격을 받아서 몸이 성치 않을 거란 생각과 달리 상처 하나 없어 보였다는 점 때문에 놀랐다.
설마 고수에게 당했나?
“으으…….”
그 생각이 맞다는 듯 연신 신음을 뱉기 바쁜 신화문도.
기혈이 뒤틀린 것인지 상당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오셨군요. 공자님. 잠시 조치 좀 하겠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의원이 돌아와 약을 먹이자, 신화문도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졌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지금은 속이 진탕이 되긴 했습니다만, 기혈이 뒤틀린 건 아닙니다. 사흘 정도 정양하면 쉽게 회복될 겁니다.”
“사흘이라…… 내상이 아니어서 다행이군요.”
“예, 아무래도 실력 차가 많이 나다 보니 쉽게 제압당한 것 같습니다.”
“쉽게 제압당하다니, 현철을 가져간 사람이 누군지 안답니까?”
“정확히 이름은 모르지만 청성파의 장로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청성파에서 말입니까?”
청성파.
아미파와 함께 사천에 있는 구파일방의 한 축으로 존재감이라곤 눈코 빼기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옅은 도가 계통의 문파다.
당연하게도 나 또한 청성파에 관심도 없었기에 원한 살 일도 없었는데, 왜 내 것을 탐하는 거지?
거기다 아무리 현철을 끌어모으고 있다고 한들, 신화문도에게 손을 쓴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처음에는 현철을 팔라고 하다가, 삼 공자님께 드릴 물건이라고 하니 폐…… 크흠, 삼 공자님보단 자신의 제자에게 주는 게 더 낫겠다며 강제로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이런 썩을 놈이 뭐?
심지어 당가의 물건인 것도 아는데 건드려?
‘미친놈인가?’
청성파와 아미파의 아귀다툼이 한창인 시점.
아무리 당가와 대립한다고 한들, 지금 당장 당가를 건드릴 여유 따윈 없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수준 낮은 별명을 떼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감히 날 보고 폐품이라 불러?
‘넌 연명부행이다.’
장로라 지금 당장 건드리진 못하겠지만, 나중에 꼭 잊지 않고 복수해 주겠다.
“공자님. 청성파에는 따로 대장장이가 없어 검을 만들려면 성도의 대장장이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가면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지금 가면 볼 수 있다는 일염이의 말에 망설일 것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그 잘난 청성파 놈들 면상 보러 가보자고.”
* * *
드넓은 중원에 비하면 아주 작게 보이는 사천의 성도.
그러나 그 작은 성도에도 수십이 넘는 대장간이 있었기에 단번에 청성파 인원들을 찾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좋은 재료를 다룰 수 있는 대장장이는 한정된 법이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저기가 청성파에서 주로 이용하는 대장간입니다.”
일염이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대장간.
현철을 다루는 장인이 있는 만큼 번잡한 번화가에 으리으리한 규모였다.
“그런데 공자님. 진짜 들어가실 겁니까?”
“당연하지.”
직접 부딪치는 걸 만류하는 일염이.
그놈이 또라이라 혹시 나한테 해코지 하진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현철의 일은 장로 한 명의 결례로 사과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면 직계에게 해꼬지를 하는 건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니 청성파의 장로도 경거망동하진 않을 거다.
피는 피로 씻는 것이 무림의 불문율이었으니까.
그리고 값진 귀물도 귀물로 씻어야 하는 법.
감히 내 물건을 건드리고도 순순히 넘어갈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들어가자.”
그렇게 청성파의 인원들을 찾으러 안으로 발걸음을 들이려 하던 그때.
“허허, 능력도 없는 폐품이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가지려 들기에 가르침을 내려줬건만, 무지몽매하게도 재물에 눈이 멀어 이리 찾아온단 말인가.”
대장간 문을 열고 나오는 푸른 의복의 사람 둘.
다름 아닌 청성파의 사람들이었다.
“그쪽이 제 현철을 훔쳐가셨다던 청성의 장로님 되십니까?”
“어허! 훔쳤다니! 예의를 모르는 당가 놈다운 언사구나.”
도둑놈 주제에 예의는 개뿔.
“거 부처님이 남의 재물을 함부로 탐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나 봅니다? 어설픈 변명으로 재물을 그리 탐하는 것도 모자라 이리 뻔뻔하게 나오는 걸 보니 말입니다.”
“뭬, 뭬야?”
-공자님. 청성파는 도가 계열의 문파입니다.
일염이의 지적에 나는 일염이를 쳐다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알아, 단순히 열 받으라고 한 거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청성의 장로.
그 모습을 보아하니 왠지 미친놈일 거 같아 한 발자국 물러나기로 했다.
내가 현철을 되찾으려고 왔지, 단순히 시비를 걸러 온 건 아니니까 말이다.
“뭐, 사사로운 건 넘어가시죠. 그렇지만 대충 지어낸 이유 따윈 알고 싶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현철이 귀하다고 한들, 이렇게 안하무인 하게 가져갈 만한 물건은 아니잖습니까?”
이전과 다르게 나름 예의를 차리며 묻자,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근엄한 표정을 짓는 장로.
“그래, 현철이 같은 무게의 금보다 귀할지라도 큰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지.”
동시에 똥폼을 잡으며 뒷짐을 지는 게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쳐 주고 싶었다.
“허나, 그렇다 하여도 너 같은 폐품에게 주기엔 현철이 너무 아깝지 않겠느냐.”
“그래서 그걸로 제자의 검을 만들어준다는 겁니까?”
“그럼. 폐품이라 불리는 너와 다르게 우리 현이는 청성의 미래라고 불리는 아이지. 필시 약관이 채 지나기 전에 절정의 경지에 이를 게 분명한데, 백련정강은 아니더라도 현철 정도 되는 검은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
“청성의 일대 제자인 백현이라고 한다.”
자기 스승과 똑같이 뒷짐을 지며 거만한 눈으로 깔보는 제자.
스물 전에 절정의 고수는 개뿔.
당가에서도 특출난 기재에, 후기지수로 지목되어 독룡이라는 별호를 받은 당지독도 약관에 겨우 절정 고수가 됐다.
당연하게도 그 전까지 당지독의 행보는 사천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폐쇄성이 짙기로 유명한 당가도 그러한데, 어디 잡스러운 문파에 그런 인재가 튀어나왔으면 아주 사방팔방으로 광고를 하고 다녔겠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백현이라는 이름은 내가 전혀 들은 적 없었다.
즉, 쩌리라는 소리.
“그렇습니까? 일염아, 네가 보기엔 어떠냐?”
일염이는 내 화약 암기를 안다.
절정 고수만 되어도 통하지 않을 암기라고 했지만, 다르게 말하면 절정 이하의 무인에게는 통한다는 소리.
“수준을 보아하니 30배 정도는 먹을 수 있겠군요.”
“30배라…….”
당지혁과 내가 비무했을 때가 70배라 그랬다.
그런데 30배?
이거 완전히 밥이라는 소리 아닌가?
‘에라이, 약관에 절정 고수는 개뿔. 지금 일류도 못 되는 수준이겠구만.’
고작 저런 놈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절로 굳었다.
“하하하, 네 호위부터가 30배나 차이가 난다고 이야기하는구나.”
지레짐작하고 비웃음을 흘리는 청성의 장로.
옆에 있는 백현이라는 놈도 썩소를 흘리는 게 슬슬 열이 뻗쳤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만.”
“호오, 그럼 비무라도 해서 증명할 테냐? 당연히 우리 현이가 이기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네가 이긴다면 내가 친히 현철을 주마.”
이 양반, 현철은 원래 내 건데 생색은 오지게 내내.
‘비무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순순히 줄 리가 없을 텐데.’
여기서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열심히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들려오는 전음.
-…….
그 전음을 듣고 나니 열심히 고민했던 게 우스워졌다.
“합시다. 비무.”
뒤가 구려서 그렇지 비무 자체는 문제가 될 것 없었다.
안 그래도 당지혁과의 비무 이후에 무인의 수준에 맞춰서 독들을 개량했던 나다.
지금 독으로는 당지혁조차도 눈 깜짝할 새에 쓰러뜨릴 수 있는데, 상대가 당지혁보다 약하다면 말 다 한 거 아니겠는가?
청성 최고의 기재라는 저 재수 없는 녀석이 폐품이라 불리는 열두 살한테 지면 아주 재밌을 거다.
“단.”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이길 싸움에 순순히 현철만 받고 끝낼 순 없지.
“판돈을 조금 높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