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31화
당지천이 자신의 방에서 비급을 보고 있던 시각.
집무실에 있던 남궁공자는 연명부를 살펴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해 물었다.
“기룡아, 이거 틀린 거 아니냐? 이 연명부에 지천이의 이름은 없는데?”
“없긴 하지.”
“아까는 이상 없다메?”
“이상은 없다.”
“…….”
도대체 뭔 말을 해도 제대로 설명을 안 해주니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칠까 고민하는 남궁공자였지만, 그래도 일하는 중이니까 봐주기로 했다.
“지천이가 그 짧은 사이 녹주석 광산을 처분했을 리는 없고, 더군다나 총회에서 녹주석 연구를 발표했으면 아직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지 않아?”
“하아.”
일하는 데 계속 거슬리게 말을 거는 남궁공자.
당기룡은 만족할 만한 답변이 나올 때까지 귀찮게 굴 게 뻔하단 생각에 한숨을 쉬고는 답을 해줬다.
“팽가 놈들처럼 하라고 한 건 너였잖느냐.”
“그건 맞다만, 무슨 상관인데?”
“앞으로 당가는 지천이의 광산과 독점 계약을 체결할 거다. 꽤 비싼 가격으로 말이지. 지천이에게 심부름을 시킨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원래라면 돈 몇 푼에 정보를 위조하지는 않는 신화문.
설령 그것이 의뢰비의 열 곱절에 달한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건네줬기에 확실한 정보가 필요하면 무조건 신화문의 정보를 샀다.
‘신화문의 정보는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라고 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세간에는 정보 단체로 알려졌지만, 원래는 오직 한 사람만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파이니, 문주의 명이면 다 해결되는 법이지.’
바로 신화문은 사실 정보 단체가 아니었다는 점.
본디 문파란 무도의 수양을 중시하는 곳.
문하생을 받아 무공을 가르치며 무공을 발전시키는 곳이다.
허나, 신화문은 그런 문파들과 달리 처음부터 문주인 무정검을 보필하기 위해 만든 문파.
다른 문파들과 그 궤를 달리했다.
거기다. 정보상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무정검을 보필하며 모은 정보를 이용하는 것뿐.
딱히 무슨 목적의식을 가지고 정보를 파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문주와의 친분이 있다면 신화문의 정보라도 조작할 수 있었다.
단지, 문주랑 친해질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내가 연명부를 가져오라 명하면 지천이가 연명부를 조작할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가 이거고? 허 참. 그럴 거면 아예 알려주고 하는 게 좋지 않았겠냐?”
남궁공자의 물음에 당기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천이는 나이에 맞지 않는 영특함과 현명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내가 대뜸 광산을 준다고 하면 지천이가 뭐라 생각하겠느냐?”
분명 당지천이라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에 잠 못 이루고 고민하게 될 거다.
그 점을 남궁공자 또한 알아차렸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당가 놈들. 하여간 귀찮은 녀석들이야. 순수한 선의가 있을 수도 있지, 뭘 그런 거 하나하나에 일일이 이유를 찾고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해도 반평생 봐온 당가인들의 성향을 모르겠는가.
남궁공자는 그저 안쓰럽다는 듯 말끝을 흐리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듯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앞으로 지천이의 전각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아라.”
“지천이의 전각에서 말이냐?”
당기룡이 의뭉스러운 눈으로 남궁공자를 쳐다보길 잠시, 이내 그 눈은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뀌었다.
“나는 지천이와 끼니를 한번 같이하려면 온갖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데 네놈은 매 끼니를 같이하겠구나.”
부러움을 넘어서 적의까지 내비치는 당기룡의 눈빛에 남궁공자는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그 녀석 창고에 뭘 바리바리 쌓아놨더라고. 근데 어떤 놈이 훔치려 들더라.”
“어떤 놈이 말이더냐?”
“모르겠다.”
남궁공자가 모르겠다고 하자, 당기룡의 얼굴이 굳었다.
비록 자신의 상대는 안 된다고 하나, 남궁공자 또한 중원에 널리 알려진 고수 중 한 명.
의선문 소속이기 전에 남궁세가의 사람인 만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진 이였다.
그런데 그런 남궁공자가 모른다고 하니…….
‘지천이의 안위가 걱정되는군.’
그럴 리 없지만, 혹여 당지천이 해코지 당하진 않을까 걱정되는 당기룡이었다.
“그놈이 역용술도 아니고, 뭔 요상한 주술 같은 걸 쓰는지 외형이 흐릿해서 잘 안 보이더라고.”
남궁공자는 그때를 떠올리자, 다시금 불쾌해진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걸 보고 있던 당기룡이 의뭉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너조차 얼굴을 볼 수 없는 고수라…… 지천이를 보호해 주려는 건 고맙다만, 네 일을 하기 불편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어차피 네가 가더라도 창고지기밖에 안 되는 거 알잖느냐.”
순순한 선의임에도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자, 남궁공자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여간…… 귀찮은 놈이야.’
분명 당기룡의 머릿속에는 당지천의 연구를 훔쳐 승승장구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을 터.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상황을 태연히 생각하는 친구의 모습에 남궁공자는 순간 짜증이 확 솟구쳤지만, 하나의 병이라고 생각하고 불쾌하지 않을 만한 이유를 대줬다.
“난 네 친구이기 이전에 의선문의 대장로다. 떡잎이 남다른 인재도 없어서 못 데려가는데, 이미 나무가 되어버린 아이를 두고 보고 있겠느냐.”
솔직히 빈말은 아니었다.
고작 12살에 새로운 독을 척척 만들어내는 당지천.
용독술과 의술은 엄연히 다르지만, 그렇다고 멀기만 한 사이도 아니었다.
‘모든 약은 독이고, 모든 독은 약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약과 독은 사이가 깊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당지천이 독에 대해 통달한 지금 나이에 약제술을 익히기 시작한다면 약성(藥聖)이란 별호 정도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스승님의 뒤를 이어 신의의 별호를 이어받을지도 모르지.’
만약 의술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면 필시 신의의 별호를 이어받을 거다.
“혹시 아냐? 의술에 매력을 느낀 지천이가 용독술 때려치우고 의선문으로 들어올지.”
할 말을 마친 남궁공자가 더 귀찮아지기 전에 몇 가지 서류를 챙겨 집무실을 떠났다.
“의선문에 들어간다라…….”
하염없이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당기룡은 이내 실소를 흘리고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단호히 말했다.
“그럴 리는 없을 거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한 당기룡은 집무실 왼편의 책장을 지긋이 바라보며 한 마디 더 보탰다.
“지천이에겐 이미 당가의 모든 것을 주었거든.”
* * *
내 방에서 처음으로 비급을 마주한 지 일각.
그간 비급과 눈씨름하며 왜 이 비급을 줬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전혀 답이 나오질 않았다.
“흠……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무형지독(無形至毒).
단순히 무형이라고 적었지만, 그 특성은 무색무취무미무형(無色無臭無味無形)의 독을 말한다.
사천당가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만독불침의 고수라도 단번에 보내 버릴 수 있는 독.
중독되더라도 중독된 줄 알 수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해독제가 존재하지 않는 독.
천금보다 귀하며 다루기가 까다로워 당가에서 오직 당기룡뿐이 쓸 수 없는 이 독은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은 상상 속의 독일 듯하지만, 실제로 존재했다…… 아니, 존재했었다.
이제는 없지만.
“……존재해선 안 되는 물건이었지.”
그때를 생각하니 축 가라앉는 기분.
사실 독성이 강한 무형지독은 없지만, 현대에선 무색무취무미무형의 독은 꽤 많았다.
예를 들면 순질소라든가, 일산화탄소라든가.
그러나 하나같이 독성은 약한 수준이라 무인은커녕 일반인에게도 쓰기 힘든 물건이었다.
기체 상태의 물건이라 중독시키거나 보관하기도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래서 무형지독이라고 부를 만한 건 그것뿐이었었다.
‘이 생각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내가 있는 곳은 무림이지 현대가 아니잖아.’
현대라면 모를까.
이미 중원에 온 이상 양산이 불가능하고, 천금보다 귀하다는 무형지독을 얻을 수 있다면 대환영이었다.
‘이 책은 무형지독의 제조법을 다루는 책인가?’
그래서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기자 나오는 문구.
『진정한 독은 무게를 가지지 않았다.
진정한 독은 한낱 물질 따위가 아니었다.
진정한 독은 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진정한 독은 작용 기전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진정한 독을 무형지독이라 부르기로 했다.』
“아니, 이게 뭔 개소리야?”
제조법을 예상했건만, 첫 장에는 뜬구름 잡는 소리만 가득했다.
“서문인가?”
본디 비급이란 두루뭉실한 이야기가 많은 법.
단순히 머리말로 여기고 곧바로 다음 장을 읽어봤다.
『그 무엇으로도 느낄 수 없으며.
그 무엇으로도 붙잡지 못하고.
그 무엇으로도 쉽게 변질되는.
한 송이의 눈꽃처럼 쉽게 바스러지는 것.
그것이 무형지독이다.
그런데도 누구나 느낄 수 있으며.
그런데도 누구나 가질 수 있고.
그런데도 누구도 변질시키지 못하는.
만년한철조차 무른 철로 보이게 하는 단단함을 가진 것.
그것이 무형지독이다.』
“진짜 의미를 모르겠네…….”
혹시나 싶어서 뒷장을 넘겨보니 보이는 건 똑같이 의미 모를 글귀뿐.
다음 뒷장도.
그다음 뒷장도.
그 뒤로도 쭉.
비급에는 오직 이해 못 할 글귀만 적혀 있었다.
아무리 깨달음을 중시하고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아니, 제조법 아니었어? 시원하게 제조법부터 읊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건 너무 나갔나?”
암튼, 뭘 제대로 알려줘야 배우기라도 할 텐데, 당기룡은 무슨 생각으로 이걸 가져가서 익히라고 한 걸까?
“끙.”
머리를 부여잡은 채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자, 갑자기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접니다. 공자님. 신화문에서 지금 현철을 보냈다고 합니다.”
“현철을?”
그래, 우리 현철이가 오고 있구나?
그럼 이런 쓰잘데기없는 시집은 던져 버리고 빨리 보러 가야지.
처음에는 귀한 비급이라 생각되어 애지중지하며 보관할 예정이었지만, 그 실체를 보고 나니 그럴 맘이 싹 사라졌다.
애초에 미친 것도 아니고 고작 12살짜리에게, 대공자도 아닌 막내에게 턱하니 무형지독의 제조법을 주겠는가.
비급 같던 책을 대충 침소 위에 이불로 감춰준 뒤 곧바로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가서 녹여야 하니까 바로 대장간으로 가져오라고 해줘.”
* * *
당가 내부의 대장간.
-땅! 땅!
대장간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철을 때리는 쇠망치 소리가 머리를 때렸다.
“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많네.”
많아봤자 몇 명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최소한 열 명이 넘어 보이는 대장장이들.
원래 대장장이를 고용하는 문파가 없지는 않지만, 무기 자체가 소모품인 만큼 당가는 유독 그 수가 많았다.
거기다, 몇십 년간 암기만 다룬 사람들인 만큼 그 경력 또한 대단한 사람들.
암기를 워낙 다양한 걸로 만들다 보니 형상기억합금을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가문 내 사람이라는 점이 내 발목을 잡았다.
‘여기다 맡기면 좋겠지만, 그러면 가문 내에 제조법을 풀겠다는 소리와 마찬가지니까 말이지.’
형상기억합금만은 오직 나만의 무기.
절대로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됐다.
그래서 이전에 만든 화약 암기도 성도의 대장장이를 이용해 만들었잖는가.
뭐, 그래도 단순히 현철을 녹이는 것 정도만으로 소문이 나진 않을 테니 부탁하러 왔다.
‘드디어 현철이 니켈합금강인지 티타늄인지 알아볼 시간이 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현철을 가져다줄 하인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문을 쳐다보고 있자, 때마침 열리는 문.
그런데…….
“삼 공자님. 현철을 도난당했답니다.”
빈손으로 온 하인이 내게 전해준 건, 현철이 아니라 도난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뭐?”
절로 뒷목을 잡게 만드는 소식.
아니, 도대체 어떤 간 큰 녀석이길래 감히 내 현철을 훔쳐 가?
“어떤 놈이든 걸리기만 해봐라!”
빛의 속도로 이승에서 하직시켜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