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30화
일염이와 장하를 대동하고 창고 앞에 도착하자, 몰려드는 불안감.
대충 예상했던 일이고 대비를 해놨다지만, 막상 현실로 닥쳐오니 심장이 막 두근거렸다.
‘제발 안쪽만 털리지 않았길.’
이전부터 창고 방에는 왠지 모르게 기관진식으로 감춰진 비밀 공간이 존재했다.
당연하게도 예전부터 제일 중요한 물건은 그 비밀 공간에 보관했는데, 그게 털리면 내 밑천이 털리는 거다.
즉, 몇 년간의 내 노력이 허사가 된다는 의미.
‘괜찮겠지. 일부러 바깥에도 이것저것 많이 놔뒀잖아?’
물론, 중요한 만큼 대비를 해놨고, 개폐 장치도 숨겨놨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다.
그걸 알아도 불안한 건 여전하지만 말이다.
“열겠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일염이가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찬찬히 살피는 일염이.
잠시간 창고를 지긋이 바라보고는 별 이상이 없었는지 경계를 풀었다.
“일단 사람은 없습니다.”
일염이의 허가가 떨어지자, 곧바로 나도 창고를 찬찬히 살펴봤다.
“일단 사라진 건 없는 거 같은데…….”
아침에 나설 때와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창고.
사진을 찍어서 비교한다고 해도 틀린 점 하나 찾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어디야?”
“이쪽입니다.”
묻자마자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장하.
하필이면 밖에서 사 온 물건들이 아닌, 내가 직접 만든 물질들이 있는 진열장으로 향했다.
“이 병, 이 병, 그리고 이 병입니다.”
“병들만? 나머지는 안 건드렸어?”
“예, 나머지는 그대로입니다.”
“다른 곳에는 없는 게 확실해?”
“음…….”
장하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흔적을 열심히 찾았지만, 하나도 못 찾았는지 고개를 저었다.
“예, 멀쩡합니다.”
병들만 건드렸다라…….
병에 뭔 수작을 부려놓은 건가?
“알았어.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일단 나가 있으렴.”
“예.”
장하를 내보내고 곧바로 입가에 천을 둘렀다.
“일염아, 네가 보기엔 어때?”
“일단 외관상으론 아무 문제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열어보겠습니다.”
“부탁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병을 여는 일염이.
“…….”
잠시간 기다려도 독기가 나오거나, 별다른 게 튀어나오진 않았기에 뚜껑을 닫고서 내려놓았다.
“이 병에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다음 병 열어보겠습니다.”
일염이가 차례로 나머지 병들을 열어봤으나, 멀쩡하기 짝에 없는 병들.
“흠…… 왜 아무 문제가 없지?”
창고에 들어왔으면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아무 짓도 안 해놨기에 찝찝한 상태가 되었다.
‘설마 비밀 공간을 발견한 건가?’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야 하니 창고 한편에 놓인 투명한 유리 수조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염아, 혹시 이 주변에 흔적이 있어?”
유심히 살펴보던 일염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기도 아무 흔적 없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의뭉스러운 눈으로 유리 수조를 쳐다보는 일염이.
전각 내 비밀 공간을 알고 있던 만큼 유독 이것만 콕 집어 봐달라고 한 거에 이상함을 느꼈을 거다.
“궁금해?”
“별로 궁금하지는 않습니다만, 말씀해 주시면 못 들어드릴 것도 없겠지요.”
짜식.
지도 궁금하면서 앙칼지기는.
저번에 도움받은 것도 있으니 특별히 선심 써서 알려주마.
“여기에 든 건 설탕물이야.”
“설탕물 말입니까?”
“어.”
일염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설명은 딱 여기까지였다.
도움받은 것과 달리 험한 꼴도 봤으니까 말이다.
‘다행히 이상 없는 것 같네.’
내가 도대체 왜 창고에 설탕물을 가져다 놨을까.
그건 다름 아닌 여기에 유리로 된 개폐 장치가 숨겨져 있어서다.
인간의 눈으로 어떤 물질을 볼 수 있는 건 빛의 반사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반사가 안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사람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설탕물 속 개폐 장치처럼.
“아, 저번에 연구실에서 보여주셨던 것의 연장선입니까…….”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유리 수조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염이.
허나, 일염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다
왜냐면 수조 안의 농도 80% 설탕물과 유리 개폐 장치의 굴절률이 같기에 반사가 일어나지 않아서 그렇다.
언뜻 보아도.
그리고 자세하게 보아도.
투명하게 짝이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자 안.
이 안에는 분명히 개폐 장치가 들어 있었다.
나조차도 눈으론 볼 수 없는 개폐 장치가 말이다.
“좀 크게 보면 보일지 몰라서. 어때? 혹시 오늘은 설탕 알갱이가 보여?”
“……알갱이는커녕 물밖에 안 보입니다.”
“그래? 아쉽네.”
혹시 무인의 눈에는 달리 보일까 싶어 과거 일염이에게 보여줬지만, 일염이 또한 안 보인다고 했길래 대충 설탕의 알갱이가 보이냐고 둘러댄 적이 있다.
그런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는지 태연스럽게 답했다.
기억력도 참 좋아.
“그나저나…….”
수조에 작은 흔적조차 없는 건 다행이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침입자의 목적.
“아무것도 안 건드릴 거면 왜 들어왔을까?”
침입자가 왜 기껏 들어와 놓고 아무 짓도 안 하고 갔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던 찰나.
-공자님! 공자님!
장하가 급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범인을 찾았습니다!
“범인?!”
-누구보고 범인이라는 게냐!
재빨리 창고 밖으로 나가자, 고함을 지르는 한 남자.
“뇌의 님?”
다름 아닌 남궁공자였다.
* * *
연명부를 제출하러 가주전으로 향하는 길.
범인으로 몰린 남궁공자도 볼일이 있다며 동행하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래서 요약하자면 결국 호기심 때문에 들어오셨다고요?”
“그래, 창고 보안이 허술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창고를 둘러봤다는 남궁공자.
남의 창고에 멋대로 발을 들이고선 참으로 뻔뻔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알아본 게냐? 천리미향이 발려 있었다면 내가 진작에 알았을 터인데.”
천리미향(千里迷香).
천리추혼향으로도 불리는 이 향은 천 리나 떨어져도 향을 잃지 않는 당가 특유의 방향제다.
당가에서 외부 반출을 엄금하는 물질이며 보통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런데 왜 뇌의는 당연하다는 듯 천리미향의 냄새를 안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뭐, 당가에서 오래 있다 보니까 알게 됐나 보지.’
“손에 감각을 집중시켜 보시면 아실 겁니다.”
“손에 말이냐?”
잠시 눈을 감고서 자신의 손을 매만지는 남궁공자.
두어 번 손바닥을 만지더니 이내 옷 전체를 만져보고는 내기로 손바닥을 태웠다.
“아니, 눈으로 봤을 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도대체 무얼 이리도 잔뜩 묻혀놓은 것이냐?”
창고에 도포한 특수형광물질은 본디 범죄 방지용으로 만들어진 것.
당연하게도 한 번 손에 닿으면 잘 지워지지 않고, 여기저기 잘 묻어나기에 보이진 않아도 남궁공자의 옷에는 잔뜩 묻어 있을 거다.
그러니 장하가 한눈에 알아봤지.
“이번에 알려 드리면 다음엔 안 걸리게 들어오시게요? 절대 안 알려 드립니다.”
알려주려면 알려줄 수 있긴 한데, 역시나 설명하기가 까다로워 대충 넘기자, 남궁공자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거참, 알려줄 수도 있지…… 아, 맞다. 앞으로 네 전각에서 좀 지내려고 하니 그렇게 알려무나.”
“예? 제 전각에서 말입니까?”
집주인은 난데, 당연하다는 듯 통보를 하는 남궁공자.
“뇌의 님이라면 환영입니다.”
기분이 묘하긴 한데,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뒤숭숭한 요즘.
아무리 원로들이나 장로들이 찾아온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해가 떠 있을 때고, 그마저도 내가 없으면 안 오기에 내 창고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그런데 믿을 수 있는.
그것도 한 문파의 대장로나 되는 사람이 내 전각을 지켜주겠다는데 누가 싫어하겠는가.
“그럼 들어가자.”
제 방이라도 되는 듯 대뜸 집무실 문을 열어재끼는 남궁공자.
안에 있던 당기룡은 남궁공자와 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대뜸 책부터 내밀었다.
“가져가서 익혀라.”
“…….”
아니, 이 양반은 도대체가 적응이 안 돼요. 적응이.
사람이 인사도 없이 비급부터 주는 게 말이나 되나?
거, 붙임성 없기는.
그래도 일단 신분상 아버지와 아들이었기에 얼른 달려가 공손히 비급을 받아 들었다.
어쩌면 중요한 비급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감사합니다.”
눈대중으로 살짝 살펴봤으나 비급의 이름은 따로 보이질 않았다.
그저 고급스러워 보이는 자색의 겉표지를 제외하곤 평범해 보일 뿐, 내 전각에 있는 독물학 사전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비급이 평범하다니…… 이거 심상치 않은데?’
본디 비급이란 무공을 담은 물건.
귀하면 귀할수록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숨기는 물건이었다.
왜, 춘화도나 벽화에 고결한 무공이 담긴 이야기는 흔하지 않은가.
물론, 지금 주는 비급이 정말 평범한 비급일 수도 있다.
허나, 그런 거였으면 가주가 직접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가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만류귀원신공은 아니어도 급이 높은 비급이길 바랐다.
“연명부는?”
“여깄습니다.”
연명부를 건네받자마자 살펴보기 시작하는 당기룡.
잠시간 기다리자, 연명부를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이상 없구나. 나는 이만 광산주들에게 쓸 전서구를 작성해야 하니 이만 가보거라.”
“……예.”
말을 마치곤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붓을 드는 당기룡.
허나, 나는 그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관심하기 짝에 없는 사람이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고?’
단순한 확대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엄연히 가주쯤 되는 사람이라면 행동 하나하나에도 깊이가 있는 법.
이건 내가 광산주인 걸 알면서도, 또 연명부를 조작했음을 알면서도 넘어가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도대체 왜?’
당기룡이 대체 어떤 연유에서 그런 판단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이내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결국, 내게 이득을 주겠다는 의미인데.
그리고 무엇보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내가 과하게 확대해석을 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싶을 때도 있으니 저 양반도…….’
여전히 무표정하게 서류를 써 내려가는 당기룡을 보자, 그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급한 일이 있어서 대충 넘어갔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집무실을 빠져나오자마자 곧장 전각으로 전력 질주를 했다.
‘도대체 뭐가 나올까? 심법은 아닐 테고, 아무래도 보법이나 암기술이겠지?’
이왕이면 보법보다 암기술이 좋을 거 같다.
보법이야 나중에 소가주가 돼서 더 좋은 걸 익히면 되지만, 암기술은 여러 개를 할 줄 알면 좋으니까 말이다.
“후우, 후우.”
설레는 마음으로 전각에 도착하자마자 방에 혼자 틀어박혔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비급의 첫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제발 평범한 무공만은 아니기를…….”
그런데 웬걸.
첫 장에 적힌 비급의 이름을 보고서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내가 보법이나 암기술 같은 무공이라고 생각했던 비급엔…….
‘무형지독?’
너무나도 익숙한 독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