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29화
보법을 전속력으로 펼쳐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을 속도로 도망 다닌 일염이.
“추격전을 조금 더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벌써 도착했군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도착한 곳은 신화문이 아니었다.
“헥, 헥, 야, 여기는 도박장이잖아.”
날 선 눈으로 일염이를 흘겨보자, 일염이가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원래 나무는 숲에 숨기고, 사람은 인파에 숨기는 법. 세상에 어느 정보 단체가 대놓고 영업을 한단 말입니까?”
맞다.
뇌에 산소가 공급이 안 되니 당연한 사실조차 망각했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어서 숨을 고르고 말했다.
“크흠, 오해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네가 도박장에 들어오니까 영 신빙성이 떨어져서 말이지…… 아, 그래서 너한테 안내를 시킨 건가?”
“쓰읍, 봐드리는 건 이번뿐입니다.”
일염이가 인상을 빡 쓴 채로 도박장 안으로 안내하자, 살살 웃으며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뭐야, 아무도 없네?”
중원에 온 지는 꽤 됐지만, 도박장에 들러본 적은 없었기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건만,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래 아침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가?”
“예, 그렇습니다.”
도박장에 자주 오는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일염이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 한 5분 정도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더니 웬 형형색색의 종이 여러 개 달린 문 앞에 섰다.
“여기가 신화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날짜에 따라서 변하는 암호 체계에 따라 맞는 색깔의 종을 쳐주면 됩니다. 오늘은 백색 1번, 백색 3번, 청색 1번이군요.”
“그거 그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는 거야?”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건 확인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딸랑.
일염이가 흰색 종을 울리자, 맑은 종소리가 작게 울렸다.
“아,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무서운 경험을 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암호를 잊어버렸을지언정 틀리게 입력하면 안 됩니다.”
-딸랑, 딸랑, 딸랑.
“해치지는 않겠지만, 신화문의 문파원들은 하나같이 잘 벼려진 칼과 같아서 그 살기는 공자님이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계속 전음을 보내오면서 파란색 종을 잡으려던 일염이.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중간에 멈춰서 하늘색 종을 잡는 게 아닌가?
“일염아, 그거 하늘색…….”
-딸랑.
막으려 했지만 일염이가 종을 치는 게 더 빨랐고…….
“누구냐.”
나는 순식간에 쏟아지는 살기에 정신을 잃었다.
* * *
삽시간에 쏟아진 살기에 당지천이 쓰러지자, 곧장 문이 열리며 흑의인 한 명이 튀어나오며 명령했다.
“그만.”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증발해 버린 살기.
“끄응. 이걸 어쩌냐.”
허나, 당지천은 이미 쓰러진 상황이었기에 흑의인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이참, 당가의 소가주를 데려왔으면 제대로 안내할 것이지 왜 일부러 틀려서 기절하게 만들어? 아, 혹시 그건가? 담력을 키우는 훈련이라든가?”
흑의인이 말을 검에도 반응이 없는 천일염.
흑의인이 당지천에게 다가가 들쳐 메는 그 순간까지도 그 자리에서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조용히 열리는 천일염의 입.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순간 흑의인은 당지천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다행히 땅에 닿기 전에 당지천을 잡아내었다.
“휴, 우리 공자님 머리 나빠질 뻔했네…… 가 문제가 아니라, 설마 색이 옅어지기 시작한 거야?”
“그렇다. 지금은 오락가락하는 거 같지만.”
오늘의 암호는 백색 1번, 백색 3번, 청색 1번.
그리고 지금은 청색을 울리려다 하늘색을 울린 상황.
“큰일 났군, 큰일 났어.”
단박에 무슨 일인지 파악한 흑의인은 큰일 났다는 입과 다르게 흥겨운 발걸음으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꿈나라로 떠나 버리신 공자님은 잠깐 옆에 치워놓고, 저번에 부탁한 정보부터 줄게.”
“알았다.”
흑의인이 당지천을 업은 채 안으로 들어가고, 천일염이 그 뒤를 따라 문 안으로 사라지자, 문밖은 다시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고요해졌다.
* * *
‘여긴 어디지?’
분명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샌가 누워 있는 내 몸.
귀를 간지럽히듯 웅웅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그래서 중원의 동태가…….”
“……그 부분은 대비를…….”
“……천화제일미 남궁연화 소저가…….”
“관심 없다. 그거 말고…….”
몽롱한 정신 속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
한쪽은 일염이인 것 같고, 다른 한쪽은 누구지?
“……독사파는 정리…….”
“……상단의 건…….”
“……반란…… 추정…….”
“……화약을 산더미…… 막을 거냐?”
“……생각 없다. 5년 전 일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아 귀를 기울였다.
“그거라면…….”
갑자기 말을 하다 멈추는 사람.
왜 말을 멈추나 싶어 더 귀를 기울이고 있자, 일염이가 나를 불렀다.
“공자님, 일어나셨으면 눈을 뜨시지요.”
크흠, 대충 눈치를 주면 알아서 일어날 텐데 그렇게 직설적이게 말할 필요가 있나?
머쓱하게 몸을 일으키자, 정체불명의 흑의인이 인사를 건네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공자님. 신화문의 13대 문주인 무정검, 십칠호라고 합니다.”
무정(無情)이라는 별호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상당히 경망스러워 보이는 모습.
그럼에도 천하십대고수의 위명 때문인지 결코 쉬이 볼 수 없었다.
“사천당가의 당지천이라고 합니다.”
예를 취하며 인사를 하자, 신기하다는 듯 나를 찬찬히 살펴보는 십칠호.
“기절했다 깬 와중에도 남의 대화를 엿듣다니 공자님은…….”
“아니, 제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엄연히 실례되는 상황이라 해명하려고 하자,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위아래로 흔들었다.
“정보원으로서의 재능이 보이는군요. 혹시 저희 신화문에 입문하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예?”
“하하하, 반쯤 농담입니다.”
그럼 반은 진담이라는 건가?
뭐야, 이 사람 무서워.
“우리 공자님. 저희 신화문에 오신 건 오늘이 처음이시죠? 그럼 이거 받으시죠.”
그러거나 말거나 십칠호는 자기 할 말만 하면서 검은색 패를 하나 쥐여줬다.
“이건 신화문의 고객임을 알리는 증표. 무려 현철로 만든 물건이니까 잘 간수하시길 바랍니다.”
“혀, 현철 말입니까?!”
현철(玄鐵).
운석에서 추출한 미지의 금속으로, 장인들만 다룰 수 있는 귀한 금속.
약간만 섞어도 그 강도가 평범한 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지기에 같은 무게의 금보다 몇 배는 비싼 물건이었다.
물론, 그 위에 백련정강이나 한철도 존재하긴 했다만, 내가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니켈합금강이잖아!’
현철이 현대에선 니켈합금강으로 추정하고 있는 물질이기에.
원소 번호 28번 니켈(Nickel).
주기율표 10족 철족에 속하는 원소로 강자성을 가지는 물질로 이곳저곳에 많이 쓰이는 물질이다.
거기다, 채취 시 유독가스가 발생하여 한때 악마구리라고 불렸던 적이 있는 약한 독성 물질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니켈이 바로 형상기억합금.
니티놀의 재료라는 점이었다.
내 암기술이 아직 새로운 암기를 필요로 할 만큼 뛰어난 수준은 아니다.
허나,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장인을 찾아가 공밀레를 해야 하는 만큼 빨리 가져다주는 게 좋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구하려고 노력해 봤는데, 현철이 값이 원체 비싸고, 아미파와 청성파가 이권 다툼으로 인해 싹쓸이하고 있는 실정이라 개인으로는 구할 수가 없었다.
‘가문에서도 암기를 만들기 좋은 물건이라 내주질 않아서 구할 방법이 없었는데…….’
여기서 보게 된 건 가히 운명이라 부를 수 있었다.
“그,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현철이 그렇게 귀한 물건은 아닌데?”
“제가 연구하고 싶은 물건인데 구하기가 까다로워서 말입니다.”
“하긴, 요즘은 개인이 구하기엔 힘든 물건이긴 하죠.”
다른 가문이라면 이게 왜 필요한지 설명하기가 난해하겠지만, 당가는 그저 ‘연구에 필요합니다’라고만 하면 다들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참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놀라시는 걸 보면 연구에 꽤 중요한 물건인가 봅니다?”
중요하다면 중요하긴 하다.
예상과 다른 물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만약 니켈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지.’
사실 니켈합금강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추정이었다.
현대에선 니켈합금강으로 추측하고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다를 수도 있었다.
아무리 현대와 같은 과학 상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상상 속의 물질들도 존재하는 세계이니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현철의 특성 때문.
현철의 특성이 티타늄(타이타늄)과 매우 흡사했기에 티타늄으로 추정할 수도 있었다.
이전에 언급했다시피 니티놀.
형상기억합금을 만들기 위해선 니켈과 티타늄 두 개 다 필요하다.
즉, 현철을 얻으면 어느 하나라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야기.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현철 조금만 팔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현철을 말입니까?”
손을 턱밑에 받치고 잠시간 고민하던 십칠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우리 공자님이 신화문을 자주 이용해 주신다면야 못 팔아드릴 것도 없지요. 그리고 공자님은 모르시겠지만, 공자님에 대한 내적 친밀감도 꽤나 쌓여 있는 상태고요.”
내적 친밀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십칠호를 바라보고 있자, 십칠호는 자연스레 일염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돈.”
“없다.”
“에이, 공자님이 돈이 어딨다고 그래. 공자님 덕에 돈을 70배로 불린 사람이 내야 되는 거 아니야?”
“뭐? 70배?”
세간에서 내가 독학관을 조기 졸업할지, 못 할지에 대한 내기가 있었고, 내 배당이 70배인 걸 알고는 얼마나 속이 쓰렸었는가.
그런데 여기서 내 덕에 70배란 소리가 나온다는 건?
“그럼 그때 도와준 거도……?”
“아하하하.”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는 일염이.
“현철 정도는 제가 사 드리죠.”
얼마나 많이 땄으면 선뜻 현철 값을 낸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도대체 얼마나 땄길래? 선뜻 사 준다는 거야?”
“…….”
철옹성을 연상시키는 일염이의 두 입술.
어떤 고문을 하더라도 절대 내뱉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일 정도였다.
“저도 그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저한테 잃은 거보단 배는 많을 거란 겁니다.”
아, 일염이에한테 돈 뜯은 게 무정검이었냐…….
이제 보니 내적 친밀감이 쌓였다는 소리도 노름 친구라 내 이야기를 많이 들었나 보구나?
‘쪼잔한 자식. 그러고서 한 푼도 안 줬단 말이야?’
“그럼, 현철은 나중에 보내 드리도록 하고…….”
무정검이 자리에서 일어나 둘둘 말린 서류 하나를 가지고 왔다.
“자, 이건 당가에서 요청한 녹주석 광산주들의 연명부입니다.”
아, 맞다. 연명부.
현철에 눈이 멀어 잊을 뻔했네.
“신화문은 정보를 판매하고 구입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은폐도…….”
연명부에서 내 이름은 조작해 달라고 하려 하자, 갑자기 말을 끊는 신화문주.
“공자님,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딴 돈의 반만 가져갑니다’라는 말이요.”
예전에 일염이한테 들었던 말을 내게 해주며 연명부를 펼쳐 보여줬다.
“이 친구는 돈을 안 받고 그냥 공자님 이름은 빼달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요긴하게 쓰일 거라고.”
신화문주의 말에 연명부를 찬찬히 살펴보자, 진짜로 내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관아에도 눈속임을 해두었으니 공자님의 행적을 작정하고 판 게 아니라면 공자님이 녹주석 광산을 가졌다는 건 아무도 모를 겁니다.”
짜식.
안 그러게 생긴 놈이 이런 짓을 해?
괜히 눈물 날 거 같잖아.
“거, 남사스러운데 빨리 전각으로 돌아가시죠. 공자님.”
감동스러운 눈으로 일염이를 보자, 쑥스러운 듯 뺨을 긁적이는 일염이.
평소라면 무시했을 발언이었지만, 어차피 신화문에서 볼일은 다 본 만큼 곧바로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럼, 부디 다음에도 저희 신화문을 이용해 주십시오.”
그렇게 신화문주의 배웅을 받으면서 전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이름을 조작한 연명부도 받았고, 현철도 얻어왔으니 빠르게 성분 분석을 하려 전각으로 돌아오자, 장하가 안절부절추가한 채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쟤는 무슨 일인데 나와 있지? 영하 기다리나?”
의뭉스러운 눈으로 장하를 쳐다보고 있자, 장하도 나를 발견한 듯 뛰어오며 외치기 시작했다.
“공자님! 공자님!”
“왜 그래?”
“창고에! 창고에!”
창고?
설마…….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 없듯이 장하의 말이 이어졌다.
“창고에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