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26화
뻘쭘하게 단상 위에서 벌을 얼마나 섰을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배가 묵직해져서 말입니다.”
뛰지도 않고, 태연하게 걸어 들어오는 일염이의 모습에 속이 터질 뻔했다.
“부탁한 건? 확실하게 갖고 왔어?”
“예, 하늘색 병 맞잖습니까?”
품에서 하늘색 병을 꺼내 주는 일염이.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니 다행히도 내가 만든 시약이 맞았다.
“그럼 시약도 도착했으니 지체할 것 없이 시작하겠습니다.”
서론은 아까 당지독이 충분히 설명했던 만큼 건너뛰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녹주석을 효용성 있는 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무려 극독으로 말이죠.”
“극독으로 말이냐?”
극독이라는 술렁이는 내부.
안 그래도 양산을 하려 찾고 있는 게 광물독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광물독을 극독으로 가공할 수 있다면…… 당가에 다가올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지금 듣기만 하셔서는 반신반의하실 겁니다. 그러니 세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시연부터 하겠습니다.”
독공이 약한 나는 중독될 수 있기에 입 주변에 천을 둘러싸고, 곧장 시연 준비를 했다.
녹주석을 극독으로 만들려면 시약이 필요하다.
허나, 시약만 있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진 않는다.
현대에서도 까탈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물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겐 아주 훌륭한 연구 장비가 있었으니…….
“뇌의님.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바로 ‘무인’이라는 이름의 연구 장비였다.
“그래, 알았다.”
저번과 같이 군말 없이 도와주러 오는 남궁공자.
성격이 좀 모나 보여도 내게는 잘 대해주는 게 참으로 좋은 분이었다.
“내가 무얼 하면 되냐?”
“녹주석 좀 빻아주십시오. 단, 응축시켜 버리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
녹주석을 건네받자마자, 감자 자르듯 뭉텅뭉텅 조각내는 남궁공자.
그 상태로 마늘 다지듯 손으로 꾹꾹 눌러 으깨자, 순식간에 녹주석이 가루가 되었다.
“여깄다.”
“감사합니다.”
녹주석 가루를 건네받아 아까 가져온 시약과 함께 골고루 섞어준 뒤 병째로 남궁공자에게 맡겼다.
“내기로 태우듯 구워주십시오. 단, 너무 강하면 안 됩니다.”
“이 정도면 되겠느냐?”
“예, 딱 좋습니다.”
현대라면 수많은 안전 장비와 연구 장비들이 필요했을 번잡한 과정들이 너무나도 순조롭게 이뤄지는 상황.
섭씨 700도에서 가열하는 것마저 무인의 손에서 해결되는 광경을 보니 꼭 고수가 되어서 연구를 편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지.
귀찮게 내가 할 것 없이 고수를 한 명 들이면 되잖아?
“언제까지 하면 되느냐?”
“잠시 주시겠습니까?”
이 정도면 다 됐겠다.
플루오린화 베릴륨이 성공적으로 완성됐으니 몇 개의 과정을 추가로 거치기만 하면…….
“다 됐습니다.”
물에 녹지 않고, 섭씨 2,000도에서도 안정성을 유지하는 산화베릴륨이 완성된다.
마치 셰프가 완성된 요리를 선보이듯 하얀 가루들을 내놓자 당황해하는 인원들.
당가주와 원로들, 몇몇 장로들만이 먼저 다가와 독을 감별하기 시작했다.
“냄새는 없고…….”
무취임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입으로 향하는 산화베릴륨.
와, 저 자신감들 봐라.
원래 독극물을 맛으로 구분하는 건 여기에서나 현대에서나 목숨을 내놓지 않은 이상에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실험실에서 쫓겨나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역시 원로들이라 그런지 맛부터 봤다.
“달군……. 독성 또한 옅은 편이지만, 극독이라 부르기엔 모자람이 없어.”
원로 한 명이 무표정한 얼굴로 감상을 내뱉자,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장로들도 다 같이 맛을 보기 시작했다.
“오오…… 이 맛은?”
“달면서도 톡 쏘고, 입안 전체가 저릿한 게 확실한 극독이군요.”
역시 독에 한해서 미식가들이다 보니 맛 표현이 섬세한 게 괜히 내가 뿌듯해졌다.
장로들도 먹고서 극독이라고 인정하자, 다른 이들도 하나씩 산화베릴륨을 맛보기 시작했고, 당지독도 아주 극소량이지만, 산화베릴륨을 맛봤다.
“지천아, 정말 대단하구나. 그런데 과정이 꽤 복잡한 것 같던데 다른 특성은 없느냐?”
연구가 뺏겨서 화를 낼 법도 하건만, 그건 안중에도 없는지 순수한 연구자의 눈을 한 당지독.
그 눈빛을 보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독성만 높이려면 가공 과정을 두어 번만 거치면 되지만, 그 이후에 과정들은 물에 녹지 않으며, 쉬이 타지 않게끔 가공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내 폭탄 발언에 웅성대기 시작하는 회의장.
일반인들에게 설명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고자 하는 바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사람들.
그런 이들이 저마다 호기심을 가지고 앞으로 나오자, 당군명이 소리를 빽 질렀다.
“거짓입니다!”
일순간 당군명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당기룡이 당군명에게 물었다.
“무엇이 거짓이라 생각하지?”
“방금 광물을 정제한다는 과정에서 들어간 시약이 있었습니다. 그것 또한 독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잖습니까? 실제로 녹주석에서 나온 독성은 미미하고 그저 시약의 영향으로 독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에 녹지 않는 것은?”
“밖의 모래를 가져와 물에 탄다고 해서 소금도 아닌데 녹을 리가 없잖습니까? 분명 시약으로 만든 겉면의 독들은 씻겨 나가 독성이 약해져 못 쓰게 될 게 분명합니다.”
“화기에 내성을 지녔다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그것 또한 광물이기에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독들은 타버리기에 독성이 약해져 못 쓰게 될 겁니다.”
우발적으로 외친 듯한 것치고는 꽤 논리적으로 보이는 반박.
나는 저게 다 모두 틀린 사실임을 알았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은 어디까지나 현대의 화학을 안다는 전제하에 가능했기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근데 다행히도 그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그렇다면 직접 해보마.”
당기룡이 가루를 한 움큼 쥐고 물에 씻은 뒤 먹어보고, 내기로 한번 태운 뒤 먹었다.
크, 저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다니.
반박이 들어오자마자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직 내가 연구를 할 때면 무인임을 까먹는 듯했다.
“이상 없다.”
가주의 확인 사살에 당군명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원로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물었다.
“녹주석이 이런 특성을 가졌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당가에 광물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기존부터 독성이 있던 녹주석을 연구했습니다.”
“광물독을? 처음부터 광물독을 연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내가 현대인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잘 참아내고 잘 말했다.
“모든 것은 독이고, 독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에게 광물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까도 묻고 싶었지만, 어찌 그리 생각하는 게냐?”
“어…….”
왜긴 왜냐고?
그게 현대 화학의 절대 진리라서?
도대체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끄응…….”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이걸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내 편을 들어주는 당지독.
“무인에게 통하지 않는 독이 있다고 하여도, 양민에게 통하는 독이라면 그것도 엄연한 독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양민들에게 통하지 않는 물질은 독이라 부를 수 없잖느냐.”
하지만 조금 부실한 논리로 내 편을 들어줘서 금방 파훼되었다.
‘흐음.’
대충 떠오르는 건 있어도 다른 이들을 설득할 만한 명명백백한 논리는 없는 상황.
그렇다고 감이라고 둘러댈 수도 없는 게 당가의 사람들은 모두 독학자다.
학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이니 감이라는 소리를 했다간 ‘안 하느니만 못하다’라는 말을 몸소 체감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아!”
그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 하나.
이는 내가 처음으로 화학을 공부할 때 들었던 농담이었는데, 지금 상황에서 설명하기에 이만한 게 없을 듯했다.
“설명 대신에 제가 문제를 하나 내 보겠습니다. 다들 한번 풀어보시지요.”
눈짓으로 원로에게 허락을 구하자, 어디 해보라는 눈빛을 보내왔기에 곧바로 문제를 냈다.
“이것에 장시간 노출될 경우 영구적인 피부 손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첫마디를 떼자, 곧바로 화골산을 비롯한 산(酸) 종류를 떠올린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어지는 문장에 그 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이것을 허용량 이상을 섭취한다면 두통을 비롯한 경련, 환각 등을 볼 수 있고, 끝내 사망하기도 합니다.”
슬슬 뭔가 감이 오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는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아마 그들의 생각은 전부 틀렸을 거다.
원래 낚이기 쉬운 그런 문제니까.
“이것은 강한 부식성으로 대부분 금속과 물질을 부식시킬 수 있습니다.”
다시금 입을 열자, 대부분 생각했던 답이 아니었는지 오리무중에 빠진 듯했고, 단 몇몇만이 생각하는 게 맞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혼동할 만한 특징을 말했다.
“그런데도 이것을 일정 이상 섭취하지 않는다면 사망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섭취해야 하는 독.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할 거다.
“무엇보다, 지고의 경지에 달한 무인이 아닌 이상.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든 무조건 중독됩니다.”
“그게 나라도 말이더냐?”
“예, 뇌의님도 예외는 없습니다.”
화경이라면 모르겠는데, 그 이하라면 시간이 흐른다면 결국 중독될 수밖에 없다.
남들보다 조금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말이다.
“아시는 분은 제게 정답을 알려주시면 됩니다.”
솔직히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다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문제.
여태껏 통념상 생각되어 오던 ‘독’에 대한 생각을 깨지 않는 이상 맞히기 힘든 문제였다.
그러니 많아 봤자, 10명이 안 되지 않을까.
그러나…….
“자, 잠깐 원로님들. 조금 여유를 두고 말씀해 주십시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뇌의와 당기룡을 비롯한 거의 모든 원로가 답을 보내왔다.
“예, 지금 제게 전음을 주신 분들. 모두 정답입니다.”
“허허허, 그렇군. 그랬어…….”
“삼 공자가 기가 막히다 던데 진짜였구나.”
정답을 맞히곤 태연하게 미소를 짓는 원로들.
딱히 얕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어딜 가더라도 연륜이라는 건 무시 못 하나 보다.
“이제 다른 분들은 모르시겠습니까?”
그렇게 잠깐 원로들의 답안을 받다 보니 뚝 끊긴 전음.
장로급에선 몇몇 인원을 제외하면 아무도 답을 맞히지 못했다.
“에잉, 쯧쯧, 요즘 애들이 우리 때보다 머리가 굳었다니까?”
“우리가 연구하던 시절만 해도 절실하지 않으면 연구를 못 해서 그렇지. 요즘 애들은 돈이 많아서 생각이 유연하지 않아도 연구비가 따박따박 나오잖아.”
“그래도 뭐, 문제를 낼 정도로 영특한 아이가 있으니 당가의 미래가 밝지 않겠어?”
원로들이 정답을 맞힌 건 의외였지만, 나머지는 전혀 갈피를 못 잡는 듯했다.
하긴, 현대에서도 농담으로 하긴 했지만,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었기에 혼동 방지를 위해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금지될 정도였으니 맞춰낸 원로들이 대단한 거다.
“답을 아시는 분이 더는 없는 것 같으니, 정답을 공개하겠습니다.”
정답을 공개하겠다는 말에 나에게 쏠리는 시선들.
호기심 반, 살벌함 반이 섞인 시선들이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천천히 답을 발표했다.
“정답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