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20화
오랜만의 외출.
활기차면서도 사천 특유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거리를 걷자, 꿀꿀한 기분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코를 찌르는 향긋한 냄새에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보니 보이는 닭꼬치 집.
사천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소문난 맛집이었기에 맛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일염아, 오랜만에 저기 닭꼬치나 먹을까?”
“아침 드신 지 얼마 안 되셨습니다만…… 뭐, 한창 클 나이니 상관없겠죠. 다녀오겠습니다.”
일염이가 인파를 뚫고 닭꼬치를 사 오길 기다리는 동안, 느긋하게 사람 구경을 하던 와중.
저 멀리서 왠지 모르게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이를 발견했다.
이제 막 10살은 됐을까 싶은 허름한 옷차림의 아이.
한 눈만 뜬 채로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두 눈을 몇 번 끔뻑이고는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구걸하러 오는 건가?’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당가의 직계를 의미하는 자색의 무복.
고풍스러운 옷감에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져 있으니 아무리 무인을 모르는 아이라고 한들, 부잣집 도련님으로 보기엔 충분했을 거다.
‘어림도 없지.’
초라한 행색과 때 묻은 얼굴을 보면 한 푼이라도 던져주고 싶긴 했다.
하지만 내가 주고 싶고, 안 주고 싶고를 떠나서 거지가 구걸할 때 한 푼 준다면 곧장 거지들이 몰려들 게 뻔했다.
상상만 해도 귀찮은 상황.
그런 건 딱 질색이었기에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가오던 아이는 내 예상과 달리, 내게 부딪히고는 저 멀리 달아나는 게 아닌가?
‘소매치기?’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하…… 어이가 없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그 상황을 보고 있었는지 잽싸게 달려오는 일염이.
행여나 내가 다친 곳이 없는지 잠시 살펴보고는 손에 닭꼬치를 쥐여줬다.
“보고 있었어? 왜 안 막았냐?”
“살기가 느껴지지도 않았고, 너무 황당해서 몸이 굳어버렸습니다.”
“아니, 호위가 몸이 굳는다는 게 말이 돼? 역용술을 쓴 살수였을 수도 있잖아.”
“명색이 호위인데 살수였다면 제가 못 알아봤을 리가 있겠습니까.”
뭐,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나 또한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내줬을 정도니까 말이다.
“아니,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길래 당가의 사람에게 배수 짓을 하지?”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사천의 배수에게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었다.
그건 바로 ‘죽고 싶지 않다면 당가의 사람에겐 시도조차 하지 말 것’.
당가의 무인들은 다른 무인들과 달리 품속에 최소 수 가지, 많으면 수십 가지의 주머니를 들고 다닌다.
거기서 돈이 든 전낭을 찾는 것도 요원한 일인데, 다른 주머니들의 내용물은 잘못 다루면 골로 가는 독들이었으니, 목숨 걸고 건드리다간 이승에서 하직하는 지름길이 되는 거다.
그런데 배수 짓을 해?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상상도.”
황당함에 아직도 머리를 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었다.
가끔 당가를 모르는 다른 지역에서 배수 짓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당가의 앞마당인 사천에서 배수 짓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아마도 내가 최초가 아닐까.
“공자님. 그런데 뭘 훔쳐갔습니까?”
일염이의 물음에 품속을 뒤져보니 배수가 노렸을 전낭은 그대로 있고, 가루 형태의 독 하나가 없었다.
“독을 훔쳐갔네?”
옥살산.
이전에 만든 질산에 설탕을 더하면 나오는 맹독성 화합물로 표백제로 많이 쓰이는 물질.
현대에선 양봉업자들이 꿀벌의 응애를 방제하기 위해 쓰기도 했다.
사실 맹독성 화합물이라고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인 기준이고 무인을 죽이기에는 택도 없는 물건이었다.
“쓰읍, 일단 쫓아가 보자.”
양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독은 엄연히 독.
사람 두세 명 정도는 죽일 수 있는 양이었다.
거기다. 당가의 존재를 모른다고 보기에는 손놀림이 능숙했던 게 석연치 않았었기에 배수의 뒤를 밟기로 했다.
* * *
드넓은 평야를 가졌으며 제염, 제철업이 발달하고 질 좋은 비단이 나오는 사천.
해마다 풍년이 이어지며 풍요로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으나, 그런 사천에도 여전히 빈민가는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빈민가를 누비는 한 아이.
“헥, 헥…….”
뭐가 그렇게 급한지 숨 한 번 안 고르고 골목을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렸을까.
자신의 집에 도착한 아이는 문을 닫고는 소리 없는 환호를 질렀다.
‘해냈어! 해냈다고!’
고작 10살의 나이지만, 배수로 살아온 게 3년째.
보통 5년 차부터 무인에게도 손을 뻗기에 그간 무인에게 배수 짓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긴장을 많이 해서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성공했다.
‘옷에 뭔가를 많이 묻히고 다니는 허술한 사람이라 다행이었지.’
당가의 직계임을 의미하는 자색의 무복 이곳저곳에 묻은 얼룩들.
그 모습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운 좋게 호위가 자리를 비워서 손쉽게 할 수 있었다.
“후우…… 후우…….”
잠시 주저앉아 있자, 진정되는 숨.
이제는 보상을 확인할 때라 생각해 천을 가져와서 입과 코를 막았다.
“흡.”
숨까지 멈춘 채 주머니를 열어보자, 보이는 하얀색 가루들.
당연하게도 독일 것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배수 짓을 한 지가 3년째.
이 바닥의 불문율이 ‘당가의 사람은 건드려서 안 된다’라는 걸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걸 아는데도 이런 미친 짓을 벌인 이유는 단 하나.
‘이것만, 이것만 있으면 형을 구할 수 있어.’
독사파에 끌려간 형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전, 갑자기 빈민가에 들이닥친 수십 명의 장정.
한눈에 봐도 흑도 무리로 보이는 이들은 자신들을 독사파라고 칭했으며 젊은 남자라면 죄다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유일한 혈육인 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이 순순히 따라가지는 않았으나, 빈민가를 이 잡듯이 뒤지며 강제로 데려간 상황.
그때 형은 무덤덤하게 ‘별일 없을 테니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지만, 그 말을 순순히 믿기엔 세상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혹시 관아가 도와줄까 싶어 가서 말해봤지만, 힘없는 빈민을 위해 흑도 무리를 칠 관아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무리 못 배웠다고 한들, 양민을 해치는 무인 정도는 잡아가는 건 안다.
그런데도 관아에서는 그저 ‘관무불가침’이라는 변명만 반복할 뿐 도움은 전혀 주지 않고 종장에는 내쫓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형을 구하려면 스스로 행동했어야 했고, 목숨을 걸고 독을 훔친 것이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써야 하는 거지?’
훔쳐 온 주머니 속에 든 가루 형태의 독.
자신이 독사파에 대항할 수단이 독밖에 없기에 훔쳤는데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도 안 왔다.
‘보통 가루 형태는 공중에 뿌린다고 들었는데…… 만약, 그렇게 중독되는 거였으면 숨 쉬면 중독되겠지?’
점점 가빠져 오는 숨.
주머니의 입구를 밀봉하고 다시 숨을 쉴까 싶었다가도, 어차피 쓸 줄을 모른다면 형을 구하기도 요원했기에 그냥 숨을 쉬었다.
“후우…… 후우…….”
숨을 쉬어도 전혀 중독되는 느낌은 없었다.
“다, 다행이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기를 잠시, 이게 무슨 독일까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하면…… 아닌데, 차라리 물에 타볼까?”
독에 관한 지식은 없지만, 여기저기서 귀동냥했던 지식으로 가루를 물주머니에 부어보자, 뭉치기만 하고 전혀 섞이지 않는 독들.
“뭐야, 왜 안 섞여?”
물주머니를 들고 흔들어보아도 가루는 뭉친 채로 전혀 풀리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맘 같아선 손을 넣고 휘젓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형을 구하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죽겠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해보자.”
하지만 고민도 잠시.
자신이 망설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형이 고통받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손을 넣으려던 찰나…….
“거기에 손 넣으면 위험하다.”
팔을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다, 당가?!”
* * *
용독술.
독을 다루는 지식과 기술 전반을 아우르는 단어.
특성과 형태가 모두 다른 독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려주는, 독공의 기초가 되는 기술이다.
그런데 그런 용독술을 모른 채 독을 다룬다는 것은 가히 자살행위라고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손 넣으면 위험하다.”
대뜸 집어넣으려는 손을 잡아채자, 화들짝 놀라는 아이.
소매치기당한 내가 버젓이 뒤에 서 있으니 놀랄 만도 할 거다.
“다, 당가?! 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빈말로라도 길을 알아보기 힘든 빈민가.
미로처럼 판잣집이 얽혀 있는 모습을 처음 보곤 기겁을 했으나, 일염이가 추적을 시작하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자기 돈 들고 튀는 놈이 하도 많다 보니까 저절로 습득했다나 뭐라나.
“그건 알 거 없고, 그거 주인이니까 이리 내놔라.”
아이는 뺏기지 않으려고 저항했지만, 금방 물주머니를 뺏을 수 있었다.
“아이고, 이 아까운 거.”
그러고는 곧바로 뭉쳐 있는 옥살산을 꺼내 철침으로 찔렀다.
“어어?”
그러자 물에 젖었던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처음 상태로 돌아오는 가루들.
소수성(疏水性).
물 분자와 쉽게 결합되지 못하는 성질을 의미하며 이렇게 뭉텅이로 물에 쏟으면 서로 뭉쳐서 잘 섞이지 않게 된다.
정도는 약하지만, 현대에서 볼 수 있는 제일 흔한 소수성 물질이 코코아 가루라 누구나 한 번쯤 봤을 거다.
옥산살을 잘 갈무리해서 다른 주머니에 챙겨 넣자, 망연자실한 아이.
“보아하니 돈을 노린 것 같진 않고, 독을 훔치려고 했던 거 같은데 왜 훔쳤니?”
이유를 물어보자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인 만큼 다소 감정적인 언사가 섞였지만, 생각보다 말주변이 있는지 핵심만 요약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독을 훔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옷이 얼룩덜룩한 게 덤벙대어 보이는 사람이 있길래…….”
얼룩덜룩?
아이의 말에 내려 무복을 살폈다.
먼지가 조금 묻었지만, 깨끗하기만 한 자색의 무복.
“아니, 깨끗하기만 한…… 잠깐.”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분명 나오기 직전에 형광물질이 든 병을 옷에 쏟긴 했다.
만약 이 아이가 자외선을 볼 수 있다면 형광물질을 보고 그런 걸 수도 있을 거다.
“너 이게 보여?”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형광물질을 쏟은 자리를 가리키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
“예, 보입니다.”
마치 너는 그게 안 보이냐는 듯이 떨떠름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아…….”
내가 자외선 라이트는 만들 수 없지만, 햇빛에는 자외선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자외선을 볼 수 있다면 굳이 자외선 라이트가 없어도 형광물질을 볼 수 있다.
바로 눈앞의 이 아이처럼.
“우리 친구, 이름이 어떻게 되니?”
“장하라고 합니다.”
“그래, 장하야. 독사파가 어떤 곳인지 모르지만, 일단 그 독으로는 네 형 못 구한다.”
“그렇습니까…….”
시무룩한 얼굴의 장하.
안타깝게도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옥살산은 효용성이 높은 거지, 무인들을 죽일 만큼 독성이 강하진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내가 너희 형을 구해주마.”
“진짜입니까?!”
형을 참 아끼는지 삽시간에 환해지는 장하의 얼굴.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뭘 하면 되겠냐고?
“너, 내 눈이 되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