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9화
과산화수소.
산소계 표백제의 원료로 많이 쓰는 물질.
이산화 이수소라고도 불리는 이 물질은 H2O2라는 화학식을 가지고 있다.
수소의 화학식인 H.
그리고 산소의 화학식 O2.
그래서 그런지 과산화수소를 만들 때 단순히 수소(H)와 산소(O2)만 합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허나, 모두가 할 만한 간단한 생각임에도 아무도 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
수소와 산소를 반응시키는 데 필요한 매개가 비싼 문제도 있긴 했지만, 제일 큰 문제는 두 개를 합치면 대부분 폭발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바로 이렇게.
-펑!
연결하자마자 굉음을 내며 폭발해 버리는 유리관.
만약 현대에서 그랬다면 다들 혼비백산하며 뛰쳐나갈 만한 일이었다만, 이들이 누구인가.
연구원이기 이전에 총알 같은 암기를 던지는 무인이었으며 코끼리도 잡는 독을 사발로 마시는 당가의 무인들이다.
이런 귀여운 폭발이 아니고, 한 줌의 독수로 녹아내려야 비로소 산업재해라고 부르며 무서워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강당 안에 있는 연구원 중에서 뛰쳐나가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혹시 실패한 겁니까?”
단지, 실험이 실패했는지 물어볼 뿐.
“아닙니다.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나 또한 이제는 익숙해져서 태연하게 유리관에 묻은 과산화수소를 모을 뿐이었다.
수소와 산소를 합칠 때 폭발이 일어나며 물이 되는데, 손을 조금 쓰면 과산화수소가 된다.
그래서 아예 시원하게 폭발을 상정하고 실험을 진행했다.
“이렇게 기를 강제로 합치는 과정에서 화기가 방출되고, 이렇게 독기가 정제됩니다.”
참고로 아까부터 한 기에 대한 설명은 나도 잘 모른다.
그냥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을 뿐.
실험 시작할 때 말했던 수기가 어쩌고, 뇌기가 어쩌고도 당연히 개소리였다.
그런데 기의 형태가 변한 게 느껴진다고 대답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조금 무서워졌다.
“자, 이제 이 독을 이용해 한 번 더 독을 정제하면…….”
여기서부터는 이전에 했던 실험과 같은 내용.
과산화수소를 이용해 질산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독기를 정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질산을 연구원들에게 내보이자, 호기심이 동했는지 다들 몰려들었다.
“허어, 독기가 강하지 않지만, 고작 물만 있으면 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참으로 참신한 연구구려.”
“뇌기를 매개로 수기와 천기에서 독기를 추출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화기는 배출하며 그것을 한 번 더 정제해 내다니 누가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단순한 칭찬부터 전혀 알아듣기 어려운 말까지.
저마다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이자, 당군명이 와서 초를 쳤다.
“그럼 뭐 합니까. 쓰지를 못하는데.”
“무어라?”
“아무리 생각지 못한 연구를 한다고 해도, 응용이 가능한 연구를 해야지. 써먹지도 못할 연구를 성과로 인정하긴 어려울 듯합니다.”
“옳소!”
대놓고 반기를 드는 당군명과 그의 동료들.
말하면서도 조금씩 몸서리를 치는 게 자신들도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걸 알긴 하나 보다.
그리고 누구나 예상했던 대로 앞으로 나서는 장로들.
“허허허, 어찌 저리도 우매한지…… 연구의 기본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구나.”
“어찌 저 아이의 잘못이겠는가. 이게 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스승의 잘못이지.”
안타까운 듯 이야기하는 말본새와 다르게 얼굴에는 극심한 분노가 드리우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앞을 가리는 훈육을 하려는 듯한 모습.
그런 장로의 행동을 당군성이 막아섰다.
“장로님들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 군명이가 한 말은 도저히 연구원이 할 말은 아닙니다.”
엥?
네가 왜 갑자기 내 편을 드냐?
“하지만 삼 공자님의 연구 또한 연구 성과로 보기 힘들군요. 군명이의 말처럼 실용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뇌기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비보를 가진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그럼 그렇지.
당연하다는 듯 내 성과를 깎아내리는 당군성.
“아무리 연구를…….”
“거기까지.”
무어라 좀 더 약을 치려 하는 와중에 만독연주에게 제지당했다.
“당군성. 언제부터 3급 연구원의 연구 증명이 그리 빡빡해진 거지?”
“단순한 3급 연구원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겁니다. 허나, 가문의 직계는 언제나 남들보다 뛰어나야 하는 법. 누군가의 도움으로만 성장한다면 제 몫을 하기 어려울 겁니다.”
누군가의 도움.
이는 내가 남궁공자의 도움을 받았고, 만독연주가 날 두둔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그런지 안색을 굳히는 만독연주.
“내가 공정치 못하다고 생각하느냐.”
“꼭 그렇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신경을 살살 긁는 당군성의 대답에 만독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투표에 부치도록 하마. 3급 연구원 당지천이 적법한 연구 성과를 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수해라.”
만독연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과반수가 손을 들어 올렸다.
“실용성이 떨어진다고, 효율이 떨어진다고 하여 의미 없는 연구가 아니지.”
“애초에 뇌기로 독기를 정제한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하긴 해.”
당군성을 위시한 인원들은 꿈쩍도 안 했으나, 만독연에는 파벌에 든 연구원보다 중립인 연구원이 더 많다.
대다수 연구원에게 성과를 보여준 시점에서 이미 끝난 이야기다.
“과반수 이상의 동의로 3급 연구원 당지천의 연구 증명을 마친다. 또한, 만독연의 불문율을 어긴 당군성을 현 시간부로 1계급 강등한다.”
만독연주의 결정에 당군성의 얼굴을 찡그리고, 당군명은 반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당군성이 당군명을 제지하며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선처에 감사드립니다.”
당지혁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덤덤한 모습.
만독연주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것을 원했으나 조용히 물러나는 게 아닌가?
“삼 공자님께도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
거기다, 나한테도 고개를 조아리고 가버리는 당군성.
시원하게 뒷목 잡고 쓰러지길 바랐는데 담담히 떠나는 모습에 영 뒤가 구렸다.
물론, 그렇다고 사과하고 떠나가는 놈 붙잡아다가 매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가만히 있었지만 말이다.
“저놈이 예전엔 저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그나저나 영 시원치 않겠구나.”
당군성의 성격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둘째치고.
남궁공자의 말대로 찝찝하기 그지없는 상황.
‘왜 이렇게 이상하지?’
그런데 나는 찝찝함보다는 왠지 모르게 서늘함이 느껴졌다.
후폭풍이 올 걸 알면서도 반발하는 당군명과 곧장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며 떠나는 당군성.
그 둘의 모습에서 짜고 치는 연극처럼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마치 이 모든 게 예상된 일인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이랄까.
“음……. 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단순히 기우라고 생각했다.
분명 당군성이라면 최악의 경우를 상정했을 테고, 그에 따른 대비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 * *
전각 내 연구실 안.
“공자님. 준비 다 되셨습니까?”
“거의 다 됐어!”
분주하게 밖에 나갈 채비를 하며 이것저것 챙긴 뒤, 마지막으로 계획서를 확인했다.
“나가서 해야 할 게 일단 백화상단을 방문하고…….”
그동안 가야지, 가야지, 했으면서도 바빠서 머리 한구석에 박아놨던 백화상단.
연구 증명도 해서 이제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겠다.
최대한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방문해야 하기에 시간이 난 지금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다음이 녹주석 광산 알아보기. 그리고 니켈하고 티타늄 찾아보고, 실력 있는 대장장이 찾는 게 끝인가.”
니티놀.
최초의 형상기억합금이라고 불리는 물질로 과거부터 만들기를 염원했던 물건이었다.
왜냐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강력한, 새로운 형태의 암기였기에.
그간 암기술을 익히면서 화약을 이용한 암기를 개량해 보는 건 어떨까란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만약, 그게 먹힌다면 굳이 구천현녀나 추혼비접 같은 암기술을 익히지 않아도 홀로 절정 이상의 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않겠는가.
큰 기대를 품고 일염이에게 시험해 보니 발을 떼지도 않은 상태에서 전부 다 피해 버렸다.
‘빠르긴 하나, 못 피할 정도는 아닙니다’라는 심심한 감상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 그날로 암기에 화약을 섞는다는 발상은 포기했다.
천하 십 대 고수도 아니고, 일염이 선에서 정리될 정도면 화약의 한계가 명확했으니까.
그렇기에 물리력보단 무력에 영향을 더 받는 암기가 필요했는데 니티놀이 딱 제격이었다.
“만들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만들기만 하면……. 재료도 못 찾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건 좀 그런가.”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이며 계획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나가려는 찰나, 병 하나가 눈에 밟혔다.
[특수형광물질]
“쓰읍, 라이트 만드는 법 정도는 알아둘걸.”
내가 장원 밖으로 나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 금독령이 내려졌을 때, 창고를 채우기 위해 꽤 자주 나갔었다.
잡동사니를 하도 모아대서 폐품이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이전과 다르게 다른 이들의 이목을 사버렸다는 점이다.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아 맘 편히 다닐 수 있었던 이전과 다르게 언제 염탐이 올지 모르는 상황.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야명주야 일염이에게 맡겼지만, 창고 안에 든 건 지킬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범죄에 대비하려 특수형광물질을 만들어 창고 주변에 도포했는데, 문제는 이건 자외선이 있어야 볼 수 있다는 거다.
“쓰읍, 일염이도 안 보인다고 하고, 자외선 라이트를 만들 줄 모르니…….”
왜, 무인들이란 양민들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본다는 묘사가 있지 않던가.
일단 만들어서 일염이에게 내밀어봤는데, 전혀 안 보인다고 했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모든 자외선은 발암 유발원.
눈과 피부에 나쁜 것이기에 해로운 것이 불침하게 되는 무인들에게 안 보이는 것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눈을 깎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인간이 자외선을 못 보는 이유는 각막에서 차단되기 때문.
각막이 깎인 사람은 자외선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긴 하지만, 고작 특수형광물질 하나 보겠다고 자해를 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라섹도 아니고 애초에 나는 눈이 좋아서 각막을 깎을 필요가 없다고.
“에휴, 보면 미련만 생기지 빨리 가자…… 웁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병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갑자기 깨져 버리는 병.
무인들이 있고, 극독을 마음껏 다룰 수 있으며 안전 문제에 자유로운 중원의 연구실은 크나큰 장점만큼이나 큰 단점이 있었다.
유리나 도자기 기술이 그렇게 막 발달하지 않은 터라 가끔가다 불량이 나온다는 점.
“아이씨, 다 묻었네.”
하필 내가 들고 있던 병이 불량이었는지 순식간에 형광물질을 옷에 뒤집어썼다.
이거 범죄자 추적하려고 만든 거라 잘 지워지지도 않는데…….
“하아, 이런 건 맘에 안 든다니까. 진짜.”
가뜩이나 바쁜데 옷을 갈아입기엔 귀찮았다.
어차피 금방 투명해져 눈에 안 보이게 되니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그냥 전각을 나섰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른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