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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7화 (17/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7화

전각 안의 개인 연무장.

만독연의 일도 잘 정리됐겠다, 암기술을 익히고 있던 도중 일염이가 평화롭지 않은 소식을 들고 왔다.

“연구 증명 요청서? 이게 벌써 온다고?”

예상은 했지만, 이른 시기.

아니, 이르다 못해 도를 넘은 시기였다.

“누구야?”

“당군성이라는 자입니다.”

“그 1급 연구원들 의장?”

며칠 전 만났던 당군명과 같은 뒷배를 공유하는 자.

아니, 따지고 보면 상관이라고 볼만한 자였다.

“걔가 왜?”

그런데 당군명에게 시키는 것도 아니고 왜 직접 이걸 보낸다는 말인가.

공명정대함을 추구하는 당가주다.

보통 이런 일이 발생하면 굳이 규칙에 없더라도 미리 차단됐을 텐데, 내게 직접 온 걸 보면 소가주 경쟁의 연장선이라 판단해서일 거다.

하지만, 그 과정이 공명정대하지 않았기에 당군성은 불이익을 받을 게 분명할 텐데 굳이 자신이 나선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장 중요한 건 연구 증명 아니겠습니까?”

뭐, 일염이 말대로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긴 했다.

단순히 생각해 보자면 누구에게 맡기기 미덥지 않아서겠지.

당군명의 일까지 생각해서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걸 수도 있고.

중요한 건 당군성이 위험을 짊어졌고, 만약 내가 연구 증명을 해낸다면 곧바로 자리를 잃을 게 분명하다는 점이다.

“유예 기간은 나흘. 그 안에 연구 증명을 하셔야 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능하겠냐고?”

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개인 연구를 하려 한 건 어디까지나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놀기 위해서다.

그런 몇 시간이면 충분할 일들에 나흘이나 준다는데 왜 못하겠는가.

거기다. 정 상황이 급해진다면 당장 창고로 향해서 몇 가지 꺼내 오면 그만이다.

물론, 가지고 들어간 게 없는데 번듯한 독을 가지고 나온다면 여러 문제가 생길 터이니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일염아, 지금부터 써주는 독들. 죄다 가서 사용 신청해 줘.”

술술 써 내려가는 독의 이름들.

아무리 연구 자료를 직위 순으로 주게끔 되어 있다고 한들, 이 많은 독을 전부 신청하기엔 무리가 있을 거다.

그런데 여기 있는 수많은 독 중 단 하나라도 내 손에 쥐어지면 끝.

고작 몇 개로는 해답을 찾지 못할 거로 생각해 위험을 짊어졌을 당군성에게는 재앙이 따로 없을 거였다.

“아, 쉽다. 쉬워. 역시 인생이 이래야 재밌지.”

그래서 이때만 해도 이미 다 이긴 것처럼 신나서 암기를 뿌렸다.

원래 인생이란 게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그 당연한 사실조차 망각한 채 말이다.

* * *

가주전에 있는 작은 연못 앞.

평소라면 가주 혼자 상념에 잠기러 오던 이곳에 오늘은 방문객이 두 명이나 있었다.

-쾅!

“아니, 그래서 그 군성이라는 놈이 지천이를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아예 연구 증명까지 하라 했단 말이야? 하 참, 당가 꼬라지 잘도 돌아간다.”

대낮부터 거하게 취한 채 탁상을 내리치는 백의인.

그가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듯이 분개하며 당가를 욕했기에 화를 낼 법도 하건만, 만독연주는 그저 씁쓸한 얼굴로 백의인을 만류했다.

“진정하시지요. 공자님.”

왜냐면 그가 의선문의 대장로이자,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당기룡의 친우.

뇌의(雷醫) 남궁공자였기에.

“야, 내가 이름으로 부르지 말랬잖아. 뇌의라는 좋은 별호 놔두고 왜 이름으로 불러.”

“그렇지만 공자님. 공자님은 공자님이시잖습니까?”

만독연주의 답변에 남궁공자는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넘어갔다.

“……그래. 뭐 사사로운 건 대충 넘기고, 그래서 지천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건데? 도대체 관리를 어떤 식으로 했기에 이런 문제가 생겨?”

“평소에 이런 일이 생기면 제 선에서 정리했기에 별문제가 없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공자님들 간의 일이다 보니 가주님께 여쭤보는 겁니다.”

“에휴, 그걸 미리미리 해결했어야지 이 사단이 안 나지…… 기룡아, 뭘 그리 고민하냐? 딱 봐도 답이 나오잖아.”

당기룡에게서 즉답이 나오지 않자, 남궁공자가 답답한 얼굴로 당기룡을 쳐다봤으나, 당기룡은 그저 나지막이 만독연주에게 물었다.

“분명 지천이라면 연구 자료들을 신청했을 거다. 그 건은 어떻게 되었지?”

“방해받을 걸 예상이라도 하셨는지 많이도 써내셨지만 당군성에게 동조하는 인원들이 워낙 많다 보니 힘들 겁니다. 아시다시피 삼 공자님께서 좀 튀시잖습니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다.

어린 나이에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삼 공자는 항상 풍운과 함께 괴상한 소문이 같이 나돌았다.

그렇기에 연구원들은 삼 공자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에서.

혹은 반대로 삼 공자가 소문대로 부정한 행위를 했을 테니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당군성의 손을 들어줬다.

“…….”

당지천에게는 상당히 억울할 일.

맘 같아선 독 몇 개라도 몰래 챙겨주고 싶었지만 개입하기엔 켕기는 점이 몇 개 있었다.

“이 일에 개입하진 않겠다. 다만, 당군성에게 동조한 이들은 모두 면밀히 조사해라.”

“예, 알겠습니다.”

만독연주가 떠나자,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는 남궁공자.

“꼭 그래야 했냐?”

“필요한 일이었다.”

“썩을.”

별로 내키지 않는 상황에 속이 갑갑한지 술잔을 털어버리고는 전음을 보냈다.

-그렇다면 5년 전, 그때 그 녀석들이냐?

-당군성 쪽 인원들은 지혁이를 지지하는 애들이다. 지혁이가 지천이 덕에 험한 꼴을 보게 되었으니 무리해서라도 달려드는 것은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

-그럼 조사는 왜 하라 한 거야?

-단순한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불안해서 말이다.

“뭐?”

언제나 자신의 기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게 당가의 성향이다.

그리고 눈앞의 당기룡은 그 성향이 특히나 두드러지는 인물인데, 그런 당기룡이 그저 불안한 마음에 조사한다고 하니 남궁공자는 필시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럴 때가 아니구나.’

단번에 취기를 몰아내고 일어나는 남궁공자.

5년 전, 신의(神醫)의 밑에서 수학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치료하지 못한 환자들이 있었다.

아무리 신의라고 한들 모든 이를 살릴 수는 없고, 그의 제자인 자신 또한 그렇다고 하지만, 마치 천명이라도 되는 듯 손조차 대지 못한 이들.

그중 한 명인 당지천의 어머니 천설화는 곧바로 세상을 떠났으며, 당지천은 마음의 병을 얻었다.

물론, 지금은 사람이 뒤바뀐 듯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긴 했으나, 아직은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이전과 같은 일을 겪게 된다면?

‘끔찍하다.’

의원에게 환자를 잃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더더욱이 자신이 손도 못 댈 정도의 환자라면 말이다.

“난 먼저 일어나 보마.”

말릴 새도 없이 떠나가는 남궁공자.

홀로 남은 당기룡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다가 씁쓸한 얼굴로 한마디 읊조렸다.

“내 가족들, 잘 부탁한다.”

* * *

만독연.

독 연구와 함께 독의 보관을 같이하는 이곳에는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독이 존재했기에 따로 독을 관리하는 인원들이 항상 상주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들려준 최악의 답변.

“예? 전부 다 선점당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삼 공자님.”

“하…….”

최악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 많은 독을 선점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내가 신청했던 독을 선점한 사람들의 이름을 찬찬히 살펴보자, 당군성 쪽 인원들 말고도 생소한 이름들도 많이 보였다.

“썩을.”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망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하아. 창고에서 꺼내긴 싫은데.’

최악을 면하기 위해서 창고의 독을 끌어다 쓸 수는 있긴 하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꺼리는 이유는 내가 여태껏 만독연의 도움 없이도 독을 만들 수 있던 이유가 전생의 지식 덕이라는 점이다.

화학반응을 이용한 정제와 여러 공법을 이용해 일반적인 소재에서 독극물을 추출한 건데, 이게 가능한 게 알려지면 그 순간 내 가치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한다.

과거 소설들을 볼 때면 흔히 ‘현대인 천재론’이라고 하여 등장인물들을 바보 취급하는 소설들이 있었다.

허나, 실상 현대인과 과거인들의 차이는 엄연히 축적된 지식의 차이일 뿐, 지능은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우리가 왜 유연한 사고를 중히 여기겠는가.

사소한 발상의 전환으로도 새로운 이론이 생기고, 발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반적인 물질.

소금이나 물, 더 나아가 공기에서도 독을 추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도 독물학의 천재들이 모여드는 당가에서 말이다.

‘5세기 사람인 제갈량이 사천 지방에 매장된 천연가스를 이용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내가 가주가 되려면 언젠가는 알려야 하는 사실이고, 방법 또한 가르쳐야 한다.

허나, 이런 장소에서 이런 형태로 공개하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휴, 방법이 없네. 방법이.”

허탈한 마음으로 만독연을 나오면서도 좋은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따지자면 떠오르긴 했다.

전기 분해라는 방법이.

그러나 남들이 못 하면 뭐 하나.

나도 못 하는데.

실험실에 사용되는 간단한 도구 같은 것들은 만들 수 있어도 전기는 못 만든다.

아니, 쓰지도 못할 극소량 정도는 만들 수 있긴 한데, 실험용으로 쓸 정도의 전기는 못 만든다.

왜냐면 실험에 사용될 전류는 일정해야 했기에.

내가 고압의 전류를 만든다고 한들, 그걸 보관할 배터리와 출력을 조절할 물건이 없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애초에 현대에선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전선으로 끌어오면 되는 걸 시간 아깝게 도대체 왜 만든다는 말인가.

거기다. 주로 연구한 분야도 전기분야는 아니었으니…….

만약 그런 연이 있었다면 지금 당장 손전등 같은 거 만들어서 팔고 있지 않았을까.

“하아.”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나. 내가 좀 도와주랴?”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웬 백의를 입은 무인이 서 있었다.

“누구십니까?”

“나를 기억 못 하는 게냐?”

기억이 날 리가 있나.

본 적도 없는데.

“혹시 5년 전 일. 모두 잊었느냐?”

내가 당지천에 빙의한 게 3년 전이다.

그런데 5년 전의 일을 알 방법이 있겠는가.

“예? 아닙니다.”

허나, 왠지 백의를 입고 있는 게 의원처럼 보여서 그냥 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나에 대해선 경황이 없어서 기억 못 할 수도 있지.”

영문을 몰라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일염이가 소개해 줬다.

“공자님. 가주님의 친우이시자, 의선문의 대장로인 남궁공자 님이십니다. 5년 전…… 공자님의 치료를 하러 오셨던 적이 있습니다.”

“둘 다 고치기는커녕, 손대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남궁공자.

“그래도 널 보니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와닿는구나. 뭐, 반대로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말이다.”

분명 남궁공자가 무어라 하는 듯했는데 놀라기 바쁜 내 귀에는 전혀 닿지 않았다.

‘나, 남궁세가?!’

왜냐면 남궁세가는 검법으로 유명한 명문가이자 뇌전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대문파였기에.

“호, 혹시 뇌기를 다루실 수 있으십니까?”

“당연하지. 내가 뇌의라고 불리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끝에서 뻗어져 나오는 뇌전.

아아아.

최초로 전기를 발견했던 탈레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하하, 눈빛이 똘망똘망한 것이 보기 좋구나. 뇌기가 그리도 신기 하느냐?”

“예, 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눈에 보일 정도로 환한 뇌전을 황홀한 눈으로 보고 있자, 남궁공자가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곤 약재로 쓰이는 거 몇 개 내주는 게 전부긴 하다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하긴, 약재는 잘 모르려나.”

남궁공자는 다시금 머쓱해진 듯 머리를 긁적이고는 몸을 돌렸다.

“한창 싱숭생숭할 때 찾아와서 이상한 소리를 해서 미안하구나. 호전된 걸 봤으니 난 이만 가보도록 하마.”

뭐?

간다고?

중원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소중한 내 연구 장비가?

“아닙니다! 필요합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혹시라도 남궁공자가 떠날까 두려워 전심전력으로 붙잡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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