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6화 (16/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6화

만독연의 한 회의실.

만독연주가 부재중이라 그의 제자인 당지무가 대리로 나온 상황에서 1급 연구원 세 명이 대면이 있었다.

“저희의 결정이 불만스러우시다고요?”

당군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사람이 1급 연구원들의 대표.

삐딱한 시선과 언짢은 얼굴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렇기에 나도 삐딱하고 언짢은 표정으로 답변하자, 인상을 찌푸리는 당군명.

“뭐, 공자님이 불만을 가지시는 것도 이해합니다만, 공자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연구실에서 연구한 이들이 보기에 공자님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받아들이시지요.”

“1급 연구원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들보다 제가 훨씬 더 나을 것 같습니다만.”

“예?”

환장하겠다는 듯 되묻던 당군명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공자님. 복수불반분이라 하였습니다. 괜한 오기 때문에 연구원들의 명예를 실추하진 말아주시지요.”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허공섭물을 할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면 흘린 물을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소한 것 정도는 독학관에서 배우고 오셨어야죠. 안 그렇습니까?”

어허, 이 녀석들 봐라?

자꾸 속을 살살 긁네?

“글쎄요. 무능한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저는 가능해서 알 필요가 없었네요.”

엎질러진 물 담기.

바닥의 물을 증발시켜서 수증기로 모으면 되는 건 전생에서 초등학생도 아는 간단한 과학 지식이었다.

그래서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에서 ‘주워 담기 어렵다’라고 바뀐 것 아니겠는가.

-하하하하!!!

“공자님, 농담도 참 재밌게 하십니다.”

“정말 재밌습니다. 어느 부분이 웃긴지 참 잘 아시는군요.”

작정하고 무례해지기로 했는지, 대놓고 입을 터는 녀석들.

당지무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지만, 녀석들의 뒷배가 상당한 건지 나서서 입을 열진 않았다.

“내기라도 하시겠습니까?”

“내기라…….”

음흉한 미소를 지은 당군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공자님이 실패하시면 4급 연구원으로 제 연구실에 들어오셔야겠습니다.”

연구생으로 들여놓고 심심할 때마다 갈구겠단 협박.

그걸 들은 일염이가 노기를 띤 얼굴로 당군명을 노려봤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었다.

“그럼 저는…….”

이 녀석들에게 뭘 걸어야 치명적일까.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해답은 금방 나왔다.

“여기 계신 분들의 연구비. 전부 절반씩 떼서 제 연구비로 주십쇼.”

바로 연구비 줄이기.

연구 성과가 곧 실적인 만독연.

여기서 연구비가 반으로 줄어버린다는 건 상당히 치명적일 것이다.

물론, 맘 같아선 아예 연구 자체를 못 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게 받아들여질 리는 없을 테니 적당한 거로 걸었다.

애초에 내기에서 지고 나면 지키기나 할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이렇게 대놓고 개기는 걸 보면 분명 뒷배가 확실할 텐데 말이다.

‘아마도 당지혁 쪽 인물이겠지.’

당지독의 세력은 입지가 탄탄해 별다른 견제를 안 하는 편이었으니까.

이번에 비무에서 지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폐관에 들어갔으니 삐딱하게 나오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뭐, 이해한다고 해서 봐준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연구비 삭감이라, 참으로 무섭군요. 그런데 공자님. 그거 아십니까? 제가 딱 공자님 정도 나이일 때 한창 혈기 왕성했었는데…….”

거, 말 참 많네.

“선생질은 거기까지 하시고, 빨리 내기나 합시다.”

이젠 거의 반말에 가까운 말투로 말하자, 안색을 굳히며 대답하는 당군명.

“하하하, 뭐, 공자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야.”

웃는 입과 다르게 눈에는 명백히 옅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양자의 동의가 얻어지자, 자연스레 당지무가 내기를 중재하기로 했고, 당군명은 한쪽 입꼬리를 말았다.

“뭐,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일인 만큼 저희가 인심 쓰도록 하죠.”

그러고는 사람 하나를 불러 널찍한 세숫대야 같은 걸 가지고 오게 해서 생각보다 많은 물을 채우는 것 아닌가?

“이곳의 물을 이해할 만한 방법으로 퍼 올린다면 저희가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손가락으로 수위를 재보자, 무려 손가락 한 마디가 잠길 정도.

이 정도면 굳이 증발 안 시키고 딴 방법을 써도 될 것 같은데?

조롱당했으면 이왕이면 좀 더 극적인 방법으로 이겨줘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곧바로 일염이에게 주둥이가 좁고, 두꺼운 유리병을 찾아달라고 했다.

“공자님.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음, 이 정도면 괜찮겠다.”

솔직히 성에 차지는 않지만, 원래 유리 자체가 귀한 편이었다.

온갖 독들을 연구하려는 만독연이었기에 이 정도 물건이 있는 거지 다른 곳에선 구하기도 힘들었을 거다.

유리병에 물을 조금 채워 넣은 뒤 일염이에게 건넸다.

“자, 그럼 일염아, 이 유리병을 데워 와줘.”

“예.”

일염이가 유리병을 들고 사라지자, ‘저게 뭔 괴상한 짓이냐’라는 얼굴로 쳐다보는 연구원들.

이 내기를 중재하기로 한 당지무 또한 같은 얼굴로 보고 있었는데, 나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그저 앉아 있다가 일염이가 유리병을 가져오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 줘.”

김이 날 정도로 뜨겁게 달궈진 병.

원래라면 목장갑이라도 껴야겠지만, 나도 이제 나름 무인이었기에 그저 옷소매로 손을 감싼 채 유리병을 건네받았다.

“자, 여러분들 한 번뿐입니다. 잘 보십시오.”

그러고는 유리병의 주둥이를 세숫대야에 처박았다.

* * *

당군명은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 꽤 철두철미한 성격이라고 평가했다.

왜냐면 자신이 사람을 얕잡아보는 성향이 있었기에, 정보가 모여 확신이 들기 전까진 그저 관망하고 있었기에.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자신의 예상의 빗나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삼 공자 당지천.

처음에는 예상대로였다.

자기애가 심하고, 남들이 떠받들어 줘서 당연히 자기가 최고인 줄 아는 어린애.

1급 연구원보다 자기가 더 낫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미 엎질러진 물을 되담을 수 있다고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돈 욕심은 많아서 연구비를 절반씩 떼달라고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만 하는 게 딱 예상대로였다.

아무리 직계라지만, 고작 12살짜리의 상대를 하는 데 정보를 준비해 온 게 시간 낭비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근데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자, 여러분들 한 번뿐입니다. 잘 보십시오.”

삼 공자의 말과 함께 시작된 입증.

유리병의 주둥이를 세숫대야에 그대로 때려 박자.

-슈우우우욱.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물이 쏘아져 올라가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역류하듯 물이 차오르는 유리병은 순식간에 세숫대야의 물을 거의 다 먹어 치워 버렸다.

“자, 이렇게 엎질러진 물을 되담았습니다. 참 쉽죠?”

삼 공자가 잠깐 사이에 가득 찬 유리병을 내밀었을 땐, 아예 머리가 완전히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상식을 거부하는 그 모습을 몸이 거부하는 느낌이었기에.

세상엔 물을 끌어들이는 성질의 독도 있었고, 그러한 성질의 유리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끌어들일 뿐 저렇게 단숨에 물을 차오르게 하는 경우는 없었다.

수공을 익힌 게 아니라면 말이다.

‘삼 공자가 수공을 익혔다고?’

허나, 그것도 말이 안 되긴 매한가지.

당가 내부에 수공을 익힌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연구 목적이고, 다들 삼 공자와 연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삼 공자가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 수공을 익혔다는 건 비약 아니겠는가.

‘그럼 도대체……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삼 공자가 어떻게 했는지가 아니야.’

그러나 충격도 잠시.

당군명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외쳤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 대단한 광경이었지만, 여기서 냉큼 인정해 버리면 연구비를 빼앗기게 된다.

그럴 바엔 차라리 삼 공자를 도발해 흐지부지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낫다.

“일단은 물어보겠습니다만 왭니까?”

“내기의 조건은 분명 엎질러진 물을 저희가 이해할 수 있게끔 되담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삼 공자가 무슨 술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에 논리 따위는 없지만, 원래 언쟁이란 이런 말이 상대를 화나게 하는 법.

분명 삼 공자도 흥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뭐, 됐어.”

그런데 삼 공자는 흥분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나도 니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어.”

마치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아니, 삼 공자. 이게 지금 무슨 무례한…….”

옆에 있던 연구원이 반말을 찍찍 내뱉는 삼 공자의 무례를 지적하자, 갑자기 열리는 회의실의 문.

처음에는 뭔가 싶었다가도 걸어들어오는 인영을 보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세상이 말세야. 말세.”

“무인에게 신의란 목숨과도 같은 것인데 어떤 녀석이길래 이리도 쉽게 버린단 말인가.”

“에잉, 쯧쯧. 나 때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인데 말이야…….”

“자, 장로님들?”

한두 명도 아닌 무려 5명의 장로가 나란히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스, 스승님…….”

장로들 사이에 자신의 스승이 끼어 있었기에.

“어,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군명아.”

애써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을 무시하며 태연한 척했지만, 스승의 나지막한 부름 한 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덤덤히 말을 잇는 스승.

“나는 네가 내 연구실에서 서른여섯 번째 도망쳤을 때, 눈물을 흘릴지언정 붙잡지는 않았다. 왜냐면 다 자란 새가 둥지를 떠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고,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다고 생각했었으니 말이다.”

스승의 말에 새록새록 떠오르는 끔찍한 기억들.

파릇파릇한 시절, 이것저것 잘 가르쳐 주고 맛난 당과까지 준다길래 별생각 없이 들어간 스승의 연구실은 그야말로 나락이었다.

하나를 알기 위해 열 가지의 일을 동시에 해치워야 했고, 실수로 연구비라도 날려먹는 날에는 따뜻한 가르침이라는 이름 아래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졌었다.

지금에야 독립했다고 하지만, 지금 이렇게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건 그날의 공포가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구나.”

“스, 스승님…….”

“가자꾸나. 내 오늘 너에게 친히 가르침을 내려줘야겠다.”

혼비백산한 당군명과 그의 동료들이 얕은 반항을 했지만, 손쉽게 제압해서 끌고 나가는 장로들.

“제 나이가 몇인데 이러십니까!”

“그러게 말이다. 다 큰 제자를 훈육하려 하니 이 스승의 마음도 편치가 않구나.”

그 모습을 보며 다시금 ‘역시 인생은 인맥빨이다’라고 생각하는 당지천이었다.

* * *

“젠장, 어째 불안하더니…….”

평소보다 불안한 예감이 많이 들어 급하게 복귀한 의장.

그가 목도하게 된 건 이미 3급 연구원이 된 삼 공자와 몸에 성한 곳이 없는 당군명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당군명이 우매한 짓을 해 삼 공자에게 빌미를 줬다고 생각해 밑도 끝도 없이 욕했으나,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당군명이 진 것도 이해가 갔다.

“설마하니 장로들을 연구비로 회유할 줄이야.”

대표로 나올 당군명의 스승을 회유한다.

정보를 얻은 건 둘째치고, 연구실에 발 한 번 들여놓지 못한 삼 공자가 그런 수를 생각할지 예상 못 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렇다고 해서 당군명이 용서가 된다는 건 아니었다.

“당군명은 나중에 처리하고…… 삼 공자를 처리할 방법은 지금 와선 하나뿐인가.”

이미 자리를 내줬다면, 다시금 끌어내리면 그만.

만독연에는 개인 연구를 빌미로 그저 놀고먹는 인원들을 견제하기 위해 증명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누군가가 다른 연구원이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는 것 같을 때 연구 증명을 신청하면 당사자는 자신의 연구를 입증해야 한다.

만약, 증명하지 못한다면 개인 연구 자격은 박탈되고, 한 계급 아래로 강등된다.

물론, 이제 막 개인 연구에 들어간 연구원에게 증명을 요청하는 경우는 없었다.

무슨 연구가 하루아침에 뚝딱 되는 것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기에 별다른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추하겠지만, 목표만 이룰 수 있다면 상관없다.”

오직 자신의 후원자를 위해, 당지천을 끌어내릴 수 있다면 지금 이 자리를 잃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삼 공자에 대한 증명 요청서를 써 내려가는 의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