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5화
서고에서 야명주를 가지고 나온 지, 삼 일.
음모론자들은 돈을 밝히는 삼 공자가 비급이 아닌 야명주를 가지고 나왔다는 점에 대해 지적하며 그간의 활약도 사실 조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또한, 내 휘하에 들어오고 싶다던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내 감상은…….
“그러든가 말든가.”
소가주 자리를 노렸기에 원래라면 저 소문의 근원을 찾고, 해명하려 했겠지만, 지금 당장은 내 평가가 어찌 됐든 누워 있는 것에 족했다.
왜냐면 내 품에는 명주가 있었기에.
“명주야, 잘 잤니?”
요즘 내 일과는 명주를 쓰다듬으며 시작된다.
사실 전생에서 애완 돌을 기르는 게 유행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대화도 안 통하는 무생물에 말을 건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데 막상, 내가 애완 돌을 키우게 되다니 참 기우한 일이다.
“뭐, 그럼 어때. 명주는 이렇게 귀여운데.”
조심스레 쓰다듬자, 기분 좋다는 듯 빛내는…… 듯한 명주.
그나저나 오늘부터였던가?
“만독연이라, 기대되긴 하네.”
독학관.
다시금 말하지만, 당가의 인재 육성 기관이다.
당연하게도 독학관을 졸업한 생도들은 일주일 내에 당가 내의 아무 단체에 들어가야 했다.
직계라고 해서 거기에 예외는 아니었기에 나도 들어갈 단체를 정해야 했는데, 나는 만독연에 들어가길 희망했다.
그것도 3급 연구원으로.
“맘 같아선 바로 1급 연구원으로 해달라 하고팠는데 말이지.”
총 5개의 계급이 존재하는 만독연.
특급과 1급부터 4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중 특급은 장로 배분이었으니 어불성설이었고, 1급 연구원에 바로 넣어달라는 건 나이 때문에 무리가 있어서 3급으로 해달라고 했다.
“뭐, 3급이기만 하면 충분하지.”
만독연에 처음 들어와 연구원보다 연구생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이들이 4급 연구원.
이들에게는 따로 연구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고, 무조건 어디 한 연구실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 지내다 보면 되는 게 3급 연구원.
이때부터 제대로 된 정식 연구원으로 인정받아서 연구 실적에 따라 개인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
내가 3급 연구원을 신청한 이유가 바로 개인 연구 때문이다.
“막말로 대충 몇 개 미리 만들어놓고 한참을 놀아도 되니 말이야.”
내가 소가주, 더 나아가 천하제일인이 되는 데 필요한 게 참 많다.
돈, 인맥, 연구, 수련, 그리고 뒹굴거리기…… 가 아니라 휴식까지.
그런데 돈을 벌려고 해도 시간이 필요하고, 인맥을 만들려 해도 시간이 필요했다.
뒤에 3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기에 귀중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선 3급 연구원의 지위는 꼭 필요했다.
“공자님. 만독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때마침 소식을 들고 온 일염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래?”
“1급 연구원들의 반발이 심하다고 합니다. 연구 실적이 없는 연구원은 절대 3급 연구원으로 인정할 수 없답니다.”
“뭐?”
자기네들이 뭔데 날 3급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건지.
“걔네는 뭘 원한다는데?”
“공자님께서 절차에 따라 4급 연구원으로 들어오시길 원한답니다.”
“하하하, 이거 참.”
나는 좀 편하게 살고 싶은데 도대체 왜 이상한 놈들이 꼬인단 말인가.
“겨우 3급 가지고 물고 늘어질 줄이야.”
보통 독학관에서 용독술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이들은 3급 연구원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런데도 4급으로 끌어내리려는 건 명백히 적대 의사다.
“어쩔 수 없네. 직접 가서 담판 짓는 수밖에.”
“담판을 짓는다니,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녀석들의 장단에 맞춰줘야지.
일염이의 말에 화답하듯 탁자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갑자기 돈 상자는 왜…….”
이 상자의 정체는 돈 상자.
일전에 받은 금 500냥과 내기로 번 금 500냥.
거기다. 아버지께서 조기 졸업 격려금 명목으로 금 500냥까지 주신 걸 받아 무려 금 1,500냥이 들어 있는 상자였다.
전부 전표긴 하지만 말이다.
“일염아, 세상사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맞는 말입니다만…… 연구원들한테 뇌물로 줄 것 같지는 않으신데, 어디다 쓰려 하시는 겁니까?”
얼추 용도를 추측해 본 일염이.
안타깝게도 연구실이 돌아가는 생리는 전혀 모르는지 정답을 말해놓고도 헤매는 모습을 보였다.
“이거 뇌물 맞아.”
“예?”
단지, 뇌물을 주는 대상이 조금 다를 뿐이지만 말이다.
* * *
“오셨군요. 삼 공자님.”
회의실에 발을 들이밀자, 기립하는 다섯 명의 장로들.
상호 존대를 한다고는 하나, 지낸 세월이나 연륜은 결코 무시할 수 없기에 약간의 하대 정도는 하기 마련인데, 지금 여기 모인 장로들은 상전 모시듯 날 대했다.
“시간에 맞춰 온다고 만독연 내부를 좀 구경하다 왔는데 장로님들이 기다리시는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습니다.”
“아닙니다. 마침 저희가 의논할 일이 있어서 일찍 온 것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 겁니다.”
“그렇다면야 다행입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는 만큼, 같이 내려가는 장로의 고개.
이런 반응을 예상하긴 했다곤 하나, 장로를 보아하니 내 생각보다 더 애달팠나 보다.
만독연에서 특급 연구원으로 분류되는 장로들이 날 이렇게 깍듯이 대하는 이유.
그건 바로 이들이 제대로 된 지원을 받기 힘든 비주류 연구를 하는 인원들이어서다.
상재가 뛰어나 벌어들이는 돈이 많음에도 은자 하나 허투루 쓰지 않기로 유명한 당가주.
아무리 만독연에 돈을 쏟아붓는다고 한들, 지극히 효율적인 것을 좋아하는 성향상 극독의 연구와 새로운 독 개발이 아닌 이상에야 제대로 된 지원을 받기 힘들었다.
매일같이 자금난에 시달리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선뜻 연구비를 지원하고 싶다고 만나자 하니 어찌 눈이 돌아가지 않고 배기겠는가.
“저, 근데 삼 공자님. 지원 규모는 얼마만큼이나 생각하시는지…….”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나눌 법도 하건만, 장로 한 명이 몸이 달아올라서 차마 기다리지 못했는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만약 여기서 얼토당토않은 금액을 이야기한다면 장로들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날 거다.
비주류 연구를 해 연구비조차 많이 받지 못하는 이들이지만, 장로는 장로.
아무리 귀를 닫고 있다고 한들, 지금의 만독연에 나도는 소문 덕에 내가 난처한 상황에 부닥친 것을 알고 있을 거다.
당연하게도 연구비 명목으로 돈을 풀어 인맥을 만들어놓겠다는 내 의도 또한 훤히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괜히 어설픈 금액을 불러서 장로들을 실망하게 하면 안 됐다.
“일단 한 분당 금 200냥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장로들과의 인맥을 만들어, 내게 반기를 든 이들을 혼내는 것도 혼내는 거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건 소가주가 되는 거다.
그렇기에 돈이나 던져주고 가는 후원자의 역할이 아니라, 장로들이 생각하기에 소가주에 걸맞다는 생각이 들게끔 해야 했다.
“제가 오기 전에 이미 장로님들의 연구 논문을 읽긴 했습니다만, 감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장로님들께 직접 연구 성과를 들어보고 규모를 결정하고 싶습니다.”
“연구 성과를 말입니까?”
금 200냥이라는 소리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가도, 의문을 표하는 장로들.
내 입에서 연구 성과를 듣겠다는 이야기가 나올 줄 전혀 예상치 못한 듯했다.
“혹시 실례가 되는 일이었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하지 않으셔도…….”
“아닙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의도가 전혀 짐작되지 않는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연구 자료를 준비하는 장로들.
자신들끼리 연구 성과를 나누는 일은 있어도 어디 가서 설명할 일이 없었는지 약간의 들뜸이 보였다.
“그럼 지금부터 연구 성과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전생에도 그렇고, 지금도 비주류 연구하는 이들에게 점수를 따는 법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연구 성과를 들어주며 연구의 필요성을 이해해 주면 된다.
그들이 왜 비주류로 밀려났겠는가.
꼭 필요하지도 않은 연구를, 그렇다고 효율이 높지도 않은 연구를 진행해서다.
그러니 그저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호감을 사긴 충분했다.
“……해서 독무를 활용한 독의 배합이 가능하다면 기존의 독의 개수를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을 겁니다.”
“독무를 활용해 섞이지 않던 독들도 섞을 방법을 마련하시다니, 연구를 성공적으로 끝마친다면 분명 그간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독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저 형식적으로 연구 설명을 듣는다고 생각했는지 순간 당황한 장로.
“예. 알다마다요. 그런데 가문에서는 왜 이 연구를 지원해 주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저였다면 다른 연구를 좀 더 뒤로 미루더라도 장로님의 연구부터 지원했을 듯합니다만.”
“공자님과 달리,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만 보였나 봅니다.”
“아니, 이런 귀중한 연구를 보고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한다니…… 제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군요.”
이내 내가 연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럼에도 연구비를 대려 하는 것을 알자 입꼬리가 하늘로 승천하려 했다.
“장로님. 연구비는 얼마나 더 필요하실 것 같습니까? 제가 돈이 많지는 않지만, 장로님의 연구를 듣고 있자니 꼭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금 500냥 정도만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금 500냥이라…….
뭐, 처음인 만큼 통 크게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일염아.”
일염이를 부르자, 눈치껏 돈 상자를 내려놓고 가는 일염이.
나는 곧바로 금 500냥짜리 전표를 꺼내 장로에게 건넸다.
“부디 장로님의 연구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표를 건네자, 멍하니 전표를 바라보니 장로.
주류 연구를 하던 시절에는 이보다 수십 배나 큰돈도 봤을 텐데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연구비가 적게 나오나 보다.
그렇다면 이때쯤 약을 한 번 쳐주면 되겠어.
“하아.”
전표를 건넨 지 얼마나 됐다고 한숨을 쉬자, 당황하는 장로들.
행여나 내가 과소비해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진 않았는지 걱정하는 듯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있다가 1급 연구원분들이랑 만나게 되는데 잘 설득할 수 있을까 걱정이 돼서 그만…….”
하지만, 뒤이어진 ‘뒤 좀 봐달라’는 은유적인 말에 얼굴을 폈다.
“아, 저번에 그 일 때문이군요. 그 일이라면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음 써주시는 건 감사하나 괜히 저 때문에 같은 연구원끼리 얼굴 붉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자님 말씀대로 같은 연구원인데 얼굴 붉히기야 하겠습니까? 설득이 잘 안 되면 저희가 가서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마치 연극을 하듯 짜고 치는 모양새.
허나, 이미 유대 관계가 형성된 직후였기에 이곳에 모인 그 누구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역시 인생은 인맥빨이지.’
자, 그럼 이제 든든한 우군도 얻었겠다.
어디 한번 녀석들 얼굴을 보러 가볼까?
“이제 좀 맘 편히 장로님들의 연구 성과를 들을 수 있겠군요.”
물론, 장로들 먼저 해결한 다음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