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3화
-쾅.
발을 들여놓자마자 곧바로 닫히는 문.
문에 작은 빈틈조차 없는지,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아 깜깜한 어둠이 되었다.
“에반데?”
아니, 무슨 서고에 들여보내 준대서 따라 들어왔는데 서고는 개뿔, 빛 한 점 없는 곳에 가둬 버리면 어쩌자는 것인가.
심지어 야명주까지 뺏어버리고, 말이다.
“아니, 들어오는 애들은 모두 어둠 속을 꿰뚫어 볼 능력이 있어서 빛이 필요 없는 건가?”
에이, 설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대게 1번 서고에 발을 들이는 시점이 독학관을 졸업한 15살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마도 시야가 없는 상황을 극복하게 하려는 그런 의도가 아닐까?
굳이 그걸 서고에 들어갈 때 해야 할 이유는 모르겠다만…….
일단 세 시진이라는 제한 시간이 있는 만큼 그런 생각은 접어두고, 조심히 왼손을 들어 이곳저곳을 더듬어보자, 온통 벽이었다.
이곳도 벽.
저곳도 벽.
“하아, 미로냐…….”
발걸음을 조금씩 옮겨보니 꺾이는 곳이 있기에 미로임을 알 수 있었다.
앞을 보고도 길을 잘 못 찾는 게 미로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것도 안 보이면 도대체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물론, 남들이라면 당황할 법도 했지만,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저 조급한 마음을 달래며 눈이 적응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다.”
얼마나 어두운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대충 눈 바로 앞의 물체를 파악할 정도가 되자, 품속에서 큰 유리병과 작은 병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이 두 가지의 이름은 디페닐옥살레이트와 유성 과산화수소수.
이름은 낯설더라도 대부분 사람이 한 번씩은 써봤기에 친숙한 물질일 거다.
왜냐면 이 물질은 야광 팔찌의 원료였기에.
잘 보이지 않는 병의 형체에 집중하며 두 액체를 잘 섞어주자, 발광하기 시작하는 유리병.
유성 과산화수소가 디페닐옥살레이트의 분자 구조를 깨뜨리며 화학발광을 했다.
“좀 밝은 걸로 할 걸 그랬나…….”
독성이 있다고 한들 미약한 수준이고, 야광 물질은 쓸 데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만들어놓지 않았다.
그래서 급하게 만들어낸 건데, 그게 저가용 야광 팔찌에 들어가는 재료인 만큼 그다지 밝은 편은 아니었다.
뭐. 그래도 주변을 살펴보는 데 문제는 없으니까.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진짜, 일염이 아니었으면 한참을 고생했겠는데?”
야명주 말고도 다른 걸 챙기라고 한 게 정말 신의 한 수였다.
근처 땅바닥에 야광 물질을 발라서 표시해 두고, 주변을 비춰서 살펴봤다.
“와……. 처음부터 세 갈래 길이야?”
왼쪽, 중앙, 오른쪽으로 나뉜 길.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게 어디로 가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럴 땐 공기의 흐름으로 길을 안다고 했지?
손가락에 침을 바른 뒤, 들고 있기를 잠시.
“아무것도 안 느껴지네…….”
이런 방법은 예상했는지, 공기의 흐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면, 내 방법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직접 걸어보는 방법밖에 없나?”
자고로, 미로에서 길을 찾는 방법 중 가장 유명한 방법은 왼쪽 벽에 손을 대고서 걷는 것 아니겠는가.
지체할 것 없이 왼쪽 벽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
“…….”
“……뭐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중간에 몇 개의 갈림길을 만났지만, 언제나 왼쪽 벽만 보고 걷던 와중 내가 묻혀놨던 야광 물질이 눈에 들어왔다.
즉, 처음으로 되돌아왔단 소리.
처음으로 돌아오는 미로도 분명 있기에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내가 여태껏 직진만 했다는 점이었다.
“설마 진법?”
큰일 났다.
감각을 뒤트는 진법이라니 이거 본다고 끝인 곳이 아니었잖아?
서고는커녕, 잘못하면 미로만 뺑뺑 돌다가 빈손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런…….”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기도 잠시.
생각해 보니 이 미로,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공략해야 하는 곳 아니던가.
“그냥 중앙으로 가면 되는 거였네.”
사람이 눈이 안 보이면 필연적으로 다른 감각에 의지할 테고, 걸을 땐 벽을 붙잡고 따라가려고 할 거다.
거기에 방향감각을 뒤틀어서 계속 앞으로 가게끔 느끼면 계속 같은 자리를 도는 거다.
즉, 이 미로는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파훼가 되는 것이다.
유리병을 앞으로 내민 채 걷자, 마치 같은 광경을 반복하듯 연이어 나오는 세 갈래 길.
양옆의 갈림길을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내 생각이 맞았는지 얼마 안 가서 커다란 문을 하나 볼 수 있었다.
“하긴 애들이 들어오는 곳인데, 어렵게 꼬아놨을 리가 없지.”
괜히 어렵게 생각해서 한 바퀴 돌았네.
이제 본격적으로 서고를 탐방할 수 있다는 기대 반, 설렘 반으로 힘차게 문을 열자, 환하게 쏟아지는 빛.
아무리 어두운 곳에 있었다가 봤어도 그렇지, 한순간 눈이 멀어버리는 줄 알았다.
슬며시 눈이 빛에 적응하는 걸 기다리길 잠시.
“우와…….”
서고의 실체를 보게 되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서고.
그 속에 층층이 쌓인 책장에는 언뜻 봐도 귀해 보이는 비급들이 빽빽하게 차 들어 있었고, 천장에 박힌 작고 아주 환한 야명주가 내부를 대낮처럼 훤히 비춰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인들의 낙원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
누구라도 이곳에 발을 들인다면 이 장엄한 광경에 넋을 놓고 볼 게 분명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허나, 내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세 시진.
미로를 금방 공략했다고 해도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른다.
비록, 나갈 때는 내게 필요한 비급을 골라서 나갈 것이지만, 뭘 찾아야 고르지 않겠는가.
“그, 뭐가 있더라?”
전생에서 읽었던 무협지들.
서고 안에서 주인공이 기연을 얻는 방법은 다양했지만, 큰 틀로 보면 몇 개 안 됐다.
책장 한편에 홀로 먼지 쌓인 채 있는 비급을 발견하거나.
혹은 서고에 숨겨진 공간을 찾아서 그 속의 비급을 얻거나.
아니면, 서고 내부의 기둥이나 조각상에 깨달음을 담은 무언가가 새겨져 있는 형태였다.
“생각해 보니까 서고 전체가 비급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어.”
성 전체가 비급인 곳도 있는데 서고라고 불가능할까.
유심히 눈을 부라리며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 * *
“하아, 이게 전부인가.”
대충 상승 무공으로 보이는 것들을 찾긴 했다.
그중 단골이라고 부를 만큼 유명한 무공들도 있었고,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무공들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양의심공」
마음을 둘로 갈라서 두 가지 무공을 한꺼번에 쓸 수 있게 하는 가히 ‘치트키’라고 부를 만한 물건.
그러나 그만큼 수련량도 두 배가 되고, 재능이 없는 자는 익히기 힘들다고 나오기에 꺼려졌다.
애초에 독공을 같이 익혀본 사람이 있기나 할지 모르겠다.
「백보신권」
백 보 밖의 비석조차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는 소림의 권법.
독과 암기를 제외하면 권법도 쓰기에 나쁘진 않았으나, 불자로서의 신실함에 비례해 주먹이 커진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조금 꺼려졌다.
이렇게 하나둘 살펴보니 독이나 암기와 관련된 건 하나도 없었고, 그냥 멋있는 비급들만 즐비했다.
“기왕이면 독공이나 암기술에 관련된 걸 가지고 나가고 싶은데…….”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일단, 책장이 있는 곳들은 얼추 살펴봤으니 중앙부를 확인하려고 발걸음을 옮기던 찰나.
“여기는 왜 이렇게 눈이 부셔…… 어?”
무의식적으로 올려다본 천장.
그곳에 있는 걸 보자, 뭐에 홀린 듯 쏟아져 내리는 빛에 손바닥을 내밀었고, 동시에 입안에서 옅지만, 쇠 맛이 감도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기연.”
* * *
1번 서고.
당가가 한창 세상을 호령하고 있던 때에 만들어진 이곳은 수많은 비급이 잠들어 있는 곳.
당연하게도 이곳을 노리는 이들이 많았기에 수많은 기문진식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물론, 당가의 사람이 드나들 때는 대부분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시련이라는 명목하에 두 가지 진을 남겨두었다.
첫 번째는 침입자의 감각을 속이고 내부를 미로로 만드는 십방미리진.
원래라면 들어갈 때마다 길이 뒤바뀌지만, 진을 조정해 서고에 도착할 때까지 오직 세 갈래 길이 반복되게만 만들어놓고, 중앙을 제외한 길을 고르면 제자리에서 돌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불을 피울 수 없게 만드는 소화진(消火陣).
어떤 종류의 불이라 하더라도, 진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화기(火氣)를 빼앗겨 버린다.
절정 고수의 삼매진화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방법으로 불을 피워선 금방 꺼져 버리니 야명주라도 가진 게 아닌 이상에야,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다.
즉, 시련이라는 것은 어둠 속에서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지녔는지 평가하는 과정이었다.
-가주님. 기쁘신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삼 공자님께는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염려 섞인 백호단주의 충언.
대공자도 12살에 들어갔긴 하다만, 다른 이들이 1번 서고에 발을 들였던 건 대게 15살이었다.
헌데, 12살인 삼 공자가 일찍 들어가는 게 영 껄끄러워 가주에게 미뤄줄 것을 건의했었다.
왜냐면 삼 공자는 대공자 때와 달리, 순수한 무공 실력이 아닌 독으로 비무를 이긴 것이었기에.
허나…….
-모두가 안 될 것이라 고개를 저었을 때, 나만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됐지?
-물론, 삼 공자님께서 유능하신 건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으실 이유는 없잖습니까.
-이건 불이익이 아니다. 지천이에게 해줄 수 있는 내 최선의 배려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지천이를 보아라. 그 뛰어난 재능, 기개, 그리고 유연한 사고까지. 내가 그 무엇 하나 도와주지 않았음에도 훨훨 날아오르지 않느냐.
-아, 예…….
-그만한 업적을 이뤄냈음에도 마땅한 상 하나를 주지 못했으니 남들이 다 들어간 서고라도 일찍 들어가게 해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
-그러다, 아무것도 못 가지고 나오시면 어떡합니까?
-그럴 일은 없다.
-만에 하나라도…….
-천만에 하나라도 없다.
-아, 예…….
가주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단단히 미쳤다는 것만 알고 끝났을 뿐이다.
‘숨겨진 비급이고 자시고, 아무 비급이라도 가지고 나오셔야 할 텐데…….’
역사상 서고에 들어가 빈손으로 나온 아무도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삼 공자가 빈손으로 나오기라도 한다면…….
‘도대체 자식의 창창한 앞길을 왜 망치려 드시는 것인지.’
백호단주가 은연중에 가주를 쏘아봤지만, 가주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무표정한 눈으로 서고의 입구를 주시하고 있던 그때.
-쾅. 쾅.
갑자기 서고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어떤 걸 가지고 나오실지 벌써 고르셨단 말인가?”
‘그럴 리가.’
시련을 통과하지 못했으면 모를까.
이미 서고에 발을 들인 순간, 남은 시간 동안 쥐 잡듯이 뒤지는 게 관례다.
어떤 무인이든 상승 무공을 얻고 싶은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이제 고작 한 시진 지났을 뿐이네. 아마도 그저 제자리에 서 계시다가 포기하시는 게 아닐까 싶네.”
어둠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는 흑룡단주의 말이 가장 설득력 있었다.
-쾅. 쾅.
빨리 좀 열어달라는 듯 재차 울리는 문 두들기는 소리.
‘어쩔 수 없나.’
서고에서 빈손으로 나오게 되면 평생의 오점으로 남게 될 터이지만, 스스로 포기하기를 원했다면 어쩔 수 없는 법.
백호단주는 착잡한 마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서고를 개방해라.”
그런데 명령받은 단원들이 문을 개방하기 시작하자, 백호단주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면 한없이 어두워야 할 서고의 문틈에서…….
“비, 빛?”
대낮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환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