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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2화 (12/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2화

당지혁과의 비무가 내 승리로 끝난 지 3일째.

연구실에 박혀 독을 개량하고 있던 사이 당가에 많은 소란이 일었다.

당연히 그 소란의 중심에 내가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일단 입관한 지 1년도 채 안 돼서 수석으로 조기 졸업한 내용.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오고, 독룡으로 불리는 첫째 당지독도 해냈기에 주목을 받긴 해도 큰 반향을 부르진 못했다.

용독술 시험을 일각 안을 통과한 것.

이 또한 전례 없던 일은 아니었지만, 꽤 드문 일이었기에 많은 관심을 얻었었다.

그리고 대망의 비무.

남들이 ‘비무에서 독이 통하지 않는 것은 상식이다’라고 말할 때, 개량 졸피뎀으로 당지혁을 중독시켜 이긴 사건.

이 일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기에 눈앞에서 보고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막내를 편애하는 가주가 이 공자에게 패배를 종용했다는 이야기부터 삼 공자가 비무 전에 당지혁을 미리 중독시켰다는 음모론까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내가 독학관 졸업식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퍼질 정도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인 듯했다.

거기다, 비무에서 패배한 당지혁은 그 충격으로 폐관 수련에 들어갔으니 음모론자들에게 좋은 불씨를 안겨줬다.

물론, 그런 이상한 소문을 믿지 않고 순전히 감탄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쨌든 사흘이 지난 지금에도 어수선한 분위기는 그대로였는데, 막상 소문의 당사자인 내겐 그런 소문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공자님. 가주님께서 오늘 1번 서고에 들어갈 터이니 정오까지 1번 서고 앞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1번 서고?”

갑자기 1번 서고에 들어갈 것이라는 낭보를 받게 되었기에.

1번 서고.

다른 중후한 이름이 붙은 서고들과 다르게 단순히 번호로 불리는 서고.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이름과 달리 이곳은 당가에서 제일 중요한 서고였다.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고맙다.”

왜냐면 1번 서고는 찬란했던 당가의 역사가 축적된 곳이었으니.

지금의 당가는 그 빛이 바랬다 한들, 그렇다고 과거에 쌓아온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진 않는다.

당가가 무림을 주름잡던 시절에 모은 비급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니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공자님은 별로 안 기쁘신 겁니까?”

그런데도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일염이가 의문을 표했다.

“아니, 기쁘긴 한데…….”

일단 기쁘냐, 아니냐를 물어본다면 기쁘긴 하다.

자고로 건물 밖에서 기연을 찾으려면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반대로 건물 안에서 기연을 찾으려면 서고에 들어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수많은 주인공이 기연을 얻던 장소.

그런 곳에 들어간다는데 기쁘지 않다면 말이 되겠는가.

단지…….

“내가 뭐 아는 게 없어서 걱정되네.”

아무리 무협을 많이 읽었다고 한들, 이름만 보고 모든 걸 알 수는 없는 법.

천 년 동안 쌓인 그 수많은 비급 속.

기연이라고 불릴 만큼 고절한 비급을 찾을 자신이 없었다.

물론, 찾다가 보면 어디서 들어봤던, 익숙한 이름의 무공이 나올 수도 있었다.

허나, 나는 그런 걸 찾는다고 해서 익힐 자신도 없었다.

대게 기연이라고 불릴 정도의 비급이면 천재가 아니고서야 익힐 수 없는 무공도 있을 테고, 만약 선뜻 고른 비급에 적힌 게 마공이라면 아예 익히기를 포기할 테니 말이다.

“안목이 부족하셔서 이상한 것을, 쓸모없는 걸 들고나올까 봐 두려우신가 보군요.”

“어.”

기회는 언젠가 찾아온다고 하지만, 쉽사리 찾아오지는 않는 법.

천하제일인이 되려면 남들보다 수년, 수십 년을 앞서야 하는데 만약 이런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다면 공자님. 제가 한창 약관의 나이였을 때, 성도에 얼굴이 너무 팔려서 잠시 노름을 관두고 경매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삿갓을 쓰는 게 노름판에서 얼굴이 팔려서 그런 거라고 하더니, 그게 스무 살 때부터였냐?”

스무 살 때 이미 노름판을 휩쓸고 다녔다면 도대체 노름은 몇 살 때부터 했단 소린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짐작이 가는데 사소한 건 넘어가도록 하시죠.”

노름을 일찍 배운 게 자랑은 아니었기에 머쓱한 얼굴의 일염이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저는 경매장에서 많은 물건을 봤습니다. 세상에 같은 게 없다는 진귀한 물건부터 겉보기엔 너무나도 화려한데 실속은 없는 잡동사니, 그리고 길 한복판에 버려져 있어도 아무도 주워 가지 않을 만큼 흉측하면서도 사실은 진귀했던 물품까지.”

상재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돈을 참 좋아하는 천일염으로선 아주 진귀한 경험이었을 듯했다.

“그런 것들을 보고 나니 진귀하고 귀한 것들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작은 조언을 해드릴 수 있는데 필요하십니까?”

돈에 환장한 일염이의 조언.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

고개를 끄덕이자, 일염이는 하라는 조언은 안 하고 묵묵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건 무슨 뜻이야?”

“금 10냥 되겠습니다.”

에라이 자식이.

“설마 치사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금 500냥이나 따신 분이?”

“에이, 그거랑 이거랑 다르지.”

“공자님. 그 돈은 제 눈물과 땀이 밴 피 같은 돈이었습니다. 어쩌면 제 목숨과도 같은 돈이었습니다. 그런 걸 한순간에 앗아간 건 공자님이시잖습니까.”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얄미운 녀석.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금 10냥을 쥐여주자,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물건을 구별할 줄 모른다면 괜한 요행을 기대하지 말고, 자신이 아는 것 중에 최선의 물건을 고르면 됩니다.”

“아니, 겨우 이런 말 하려고 금 10냥이나 받은 거야?”

“공자님. 제가 보기엔 공자님은 이미 기연보다 뛰어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 삿갓으로 가려져 있음에도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일염이의 시선.

“그것이 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를 본다면 굳이 요행을 바라지 않아도 충분하실 겁니다.”

맞다.

전생의 내가 왜 그토록 독공을 염원했던가.

내게는 화학자였던 전생.

그 자체가 기연이었기에 그런 거다.

기연이라는 이름에 홀려 어설프게 익히지 못할 절세의 무공을 찾기보다 조금 떨어지더라도 내게 도움이 되는 걸 고르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초심을 잃을 뻔한 걸 지적해 줬다.

금 10냥이 아깝지 않은 조언이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아,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일염이는 뭔가 말해줄 것처럼 운을 띄우더니 대뜸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건 추가금이니 2냥만 받겠습니다.”

일염이의 상술에 넘어가는 건 별로이다만 꽤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기에 선뜻 전낭에 손을 넣었다.

“은자…….”

“일 리가 있겠습니까?”

쩝.

녀석, 치고 들어오는 솜씨가 제법이구만.

“서고 안이 어두울 수 있으니 빛나는 물건을 챙겨 가십시오. 참고로 비급에 옮겨붙을 수 있으니 직접 불내는 것은 안 됩니다.”

“아니, 그런 당연한 걸로 금 2냥이나 받아먹은 거야?”

“공자님. 세상엔 당연한 것을 잊어서 실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디 공자님은 그러지 않으셨으면 해서 그런 겁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긴 한데, 왠지 모르게 이번엔 아까와 달리 속은 기분이었다.

뭐, 혹시 모르니까 갈 때 야명주라도 챙겨 갈까나?

“아, 제가 저번에 선물해 드린 야명주도 좋겠지만, 다른 수단도 하나 강구하시길 바랍니다. 아마 공자님이시라면 충분히 가능하시겠죠.”

당연하다는 듯 다른 방법을 마련하라는 일염이.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뚝딱 해내는 사람도 아닌데, 저리 태연히 말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거기다. 별다른 말도 안 했는데 계속 독심술을 쓰는 게 여간 마음에 안 들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십니까? 혹시 다른 비책이 없으십니까?”

“아니, 굳이 따지자면 있긴 한데…….”

“역시 공자님. 방법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입 아프게 얘기해서 뭐 하겠는가.

귓등으로도 안 들을 텐데.

“……가서 만들어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 * *

1번 서고 입구.

평소라면 삼 공자에 대한 관심이 커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였겠지만, 당가에서 중히 다루는 1번 서고의 앞이었기에 단주급 이상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수면 독이라,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참으로 대단하지 않소?”

“만독연주. 그저 꼼수에 불과한 것 가지고 너무 띄워주지 마시오. 여태껏 필요가 없어서 만들지 않은 것이지, 여기 있는 누구라도 금방 만들 만한 물건이잖소.”

“허허허, 흑룡단주. 외원에 오래 있더니 감이 다 녹슬었나 보구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거지만, 누구도 만들 생각을 못 한 것이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만독연주와 똑같이 날 선 눈으로 보는 흑룡단주.

둘은 독학관 시절부터 이어져 온 악연에 항상 경쟁하는 관계로, 그간 흑룡단주가 우위에 서 있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만독연주가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삼 공자님이 만독연에 가실 줄 알고 벌써부터 제 식구 감싸기라니. 삼 공자님께 외면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오?”

“제 식구 감싸기라니, 그건 흑룡단주가 하는 짓이겠지요. 이 공자님이 삼 공자님과의 정정당당한 비무에서 지셨다고 그걸 꼼수라고 매도하다니 참으로 잘하는 짓입니다.”

“뭐? 아니, 서로의 무를 나누고 평가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비무지. 실전에서는 쥐꼬리만큼도 쓸모없는 수면 독을 만들어 쓰는 게 꼼수가 아니고 뭐야? 그러니 천 년 동안 전무후무한 일이지! 그 누구도 비무를 그딴 식으로 하지 않으니까!”

“그딴 식? 감히 그런 불경한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정녕 미쳤냐!”

남들 앞이라고 체통을 지키다가도 곧바로 싸움이 붙은 둘.

막상 다른 이들은 이런 일이 하루 이틀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별 신경도 안 썼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가주가 온다는 소리에 입을 다물게 됐다.

“두 분 다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가주님께서 오십니다.”

정오가 되자,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오는 당가주.

그 옆에는 오늘 서고에 들어갈 주인공인 당지천도 함께 있었다.

“시작해라.”

도착하자마자,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바로 명령을 내렸고, 대기하고 있던 백호단주 또한 곧바로 당지천에게 다가왔다.

“삼 공자님. 잠시 금지 물품이 있는지 소지품을 확인하겠습니다.”

삼 공자는 금지 물품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음에도 대뜸 소지품 검사를 요구하자 황당해하면서도 주섬주섬 소지품을 하나씩 내려놨다.

삼 공자가 품속에서 꽤 많은 물건을 꺼내자,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는 백호단주.

독들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야명주를 보자 곧바로 품속에 넣었다.

“이건 서고에서 나오신 뒤 돌려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야명주를 가져가자 삼 공자는 어리둥절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뭐, 어쩌겠는가.

그게 금지 물품이라는데.

“나머진 챙기셔도 괜찮습니다만, 서고 안의 비급들이 손상되지 않게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예.”

“들으셨겠지만,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물건은 단 하나. 문이 닫히고 정확히 세 시진 뒤에 제가 모시러 갈 테니, 굳이 나오려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데리러 온다는 소리에 삼 공자는 의문을 표했다.

원래 서고에 들어갈 때 시간제한이 있을지언정 당사자가 걸어 나오는 게 맞지 않던가.

허나, 그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부터 서고를 개방하겠습니다.”

1번 서고의 문이 개방되자, 나지막이 탄성을 터뜨리는 삼 공자.

“아.”

백호단주가 야명주를 압수해 간 것도.

데리러 온다고 했던 것도.

그리고 일염이가 다른 수단을 준비하라고 했던 것도.

모두 개방된 문 너머를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면 문 너머에는…….

“이건 좀 아닌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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