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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1화 (11/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1화

죽여 버리겠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했지만, 얼마나 노력하던 당지천과의 거리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처럼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더군다나 가랑비에 젖는 듯 점점 무거워지는 몸.

이래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듯했다.

‘웃기지 마. 내가 진다고?’

허나, 절대 패배를 상정할 순 없었다.

사실상 지도 대련에 가까운 비무라고 하더라도 비무는 비무인 법.

설령 거기에 약간의 제약이 달려 있다고 해도 절대 져서는 안 됐다.

상대가 당지천이라면 더더욱.

“기필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석 달 전 당지천의 음독식.

그날 당했던 치욕을 떠올리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분노를 양분 삼아 몸을 놀렸다.

얼마 안 가 쓰러지더라도 최소한.

최소한 당지천 저 얄미운 자식은 반쯤 죽여놓고 쓰러지겠다.

“흡.”

곧바로 당지천에게로 쏘아져 나가자, 눈 깜짝할 새 좁혀지는 거리.

부랴부랴 비수를 꺼내며 뒷걸음치는 당지천은 이렇게 빠른 줄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 계획은 오직 단 하나.

다가가서.

팬다.

매일같이 연습했던 연격을 펼친다면 당지천은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그 일념 하나로 다리에 힘을 쏟자, 얼마 안 가서 따라잡을 수 있었다.

“좋은 꿈 꾸라고 했느냐? 그 말 되돌려 주마.”

자꾸 감기려는 눈꺼풀을 악착같이 밀어 올리며 주먹에 힘을 줬다.

드디어 고대하던 복수의 시간.

‘일단 저 주둥아리부터.’

그간 가장 얄밉게 굴던 주둥아리를 시작으로 온몸을 새파랗게 멍이 들게 할 생각에 권을 뻗자, 고개를 숙이며 피하는 당지천.

머리카락 몇 가닥 스치는 것이 미세한 차이로 빗나갔다.

그러나 당지혁은 개의치 않고, 곧바로 왼쪽 주먹을 당지천에게 날렸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연격의 무서움은 하나둘을 피하더라도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는 권의 세례에 어느샌가 몸을 내주게 된다는 거다.

물론, 흐름을 읽을 수만 있다면 그 연격을 모조리 피하고, 더 나아가 반격을 할 수도 있는데 당지천이 현무권법의 모든 초식을 통달하지 않은 이상에야 그럴 일은 없었다.

이번에도 어찌어찌 권을 피해내는 당지천.

수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는지 용케도 피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피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일 초는 기세를 잡고.

이 초는 자세를 무너뜨리며.

삼 초부터 쏟아져 내리듯 상대에게 맹공을 퍼붓는 것이 현무권법의 묘리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기에 이번에야말로 당지천을 혼내줄 마음으로 오른손을 더 꽉 쥐고, 삼 초를 날렸다.

그런데…….

‘……아니!’

당지천은 삼 초마저 피해 버렸다.

재빠르게 이어지는 사 초도.

묵직하게 명치로 향하던 오 초도.

날렵하게 투로를 바꾼 육 초도.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전부 피해 버렸다.

아니, 오히려 권을 뻗으면 뻗을수록 피하는 품새가 점점 더 안정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커억.”

갑작스럽게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숨이 막혀 느릿하게 고개를 내려보자, 오른쪽 옆구리에 당지천의 장이 꽂혀 있었다.

‘어, 어떻게?’

그것이 당지혁이 쓰러지기 전 보게 된 마지막 광경이었다.

* * *

-쿵.

정적이 내려앉은 연무장.

당지혁이 제 몸집만큼이나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이로써 비무는 나의 승리.

“…….”

그런데도 도무지 이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당지혁이 펼친 마지막 연격.

하나하나가 매섭고 정확하게 날아들었기에 피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얼마 안 가서 쓰러진 것을 보면 잘해봤자 동수를 이뤘겠다만, 아마 나 또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을 거다.

일염이가 보내준 전음이 없었다면 말이다.

-이런, 공자님이 지시길 바랐는데, 제 실력이 미천하여 이 공자님의 무공을 제대로 못 알아봤군요.

실력이 미천해?

저 빈틈없어 보이던 연격을 모두 피한 뒤 장을 꽂게 해놓고선?

말도 안 되는 소리.

시험에서 모든 문제를 풀고 0점을 맞는 건 100점을 맞을 정도로 공부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무공 실력이 달리는 내가 이렇게 완벽하게 피할 수 있게 만든 건 일염이가 투로를 전부 알고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참으로 신기하군요. 아무리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는다고 하더라도, 한 대도 안 맞을 줄이야…… 정말 기가 막힌 우연입니다.

허나, 일염이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작정하고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는 이럴 때가 아니군요. 안 그래도 돈이 없는데 전 재산을 잃었으니 말입니다. 오늘 밤은 늦을 테니 식사는 먼저 하시죠.

일염이는 그 말을 끝으로 얼어붙은 인파를 헤치고 나갔다.

“저 녀석 도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3년 동안 거의 매일 붙어 있었는데 막상 되돌아보니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평소에 제 입으로 평범한 수준이라고 하면서 여태껏 무공 한 번 제대로 보여준 적 없었는데 오늘 보여준 걸 보면…….

“아니지.”

생각해 보니 일염이는 원래 당지천 어머니의 호위였다.

당지천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서 당지천의 호위를 자처한 것인데, 둘째 부인이라지만, 가모의 호위가 평범한 무인일 리는 없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재능이 있다고 한들 당지혁은 아직 15살.

무르익을 대로 익은 무인의 눈에는 어설퍼 보였을 수도 있었을 거다.

에잉.

이런 실력 있었으면 진작에 좀 도와주지.

뭐. 한탄해 봤자 어쩌겠는가.

이미 다 지난 일인데.

거기다. 일염이의 일을 둘째치고도 내가 이기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계산이 틀렸다.’

무인의 정신력.

숫자로 가늠하기 힘든 그것을 얕잡아봤다가 큰코다칠 뻔했기 때문이다.

전생에는 상상에만 존재하던 기와 무공, 하물며 만년화리와 공청석유 같이 현대 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물질들도 실존하는 곳이 이곳 중원이다.

그런데 약효를 정신력으로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니…….

‘아둔했다.’

심기체(心氣體)를 단련하는 게 무인이고, 경지의 끝에 다다라선 심검(心劍)도 쓰는 것이 무인들이었다.

그런데 그걸 경시하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내 몸은 아직 12살이다.

독학관도 조기 졸업했고, 앞으로 시간은 많아질 터이니 창고의 물건들을 강화할 시간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이젠 극독을 이용한 새로운 독 개발도 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저녁 먹기 전까지만 뒹굴거리다가 다시 연구를…… 잠깐, 근데 저녁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지 않았나?’

일염이가 저녁을 해놓지 않았다.

이건 중대 사항이다.

내가 겉은 12살이지만, 속은 어른이기에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런 어른이 아니었다.

전생에 어렸을 때부터 연구실에 박혀 있었고, 밥은 죄다 식당에서 해결했다.

커서도 연구실에 박혀 있었고, 간혹가다 집에 가더라도 밥해주는 사람이 없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요리할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기껏 할 줄 아는 요리라곤 오직 라면 끓이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나보고 라면도 없는 이곳에서 저녁을 알아서 먹으라고?

그건 그냥 굶으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일염아! 가는 거 안 말릴 테니까 저녁은 챙겨주고 가! 저녁은!”

* * *

당지천이 천일염의 뒤를 쫓아 연무장을 떠나가자, 그제야 하나둘 충격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내가, 내가 지금 무엇을 본 거지?”

“삼 공자님이 이 공자님을 이기셨어? 그것도 비무에서 독을 써서?”

“마지막에 가서는 이 공자님의 옆구리에 장을 꽂기까지 하셨어.”

허나, 아무리 두 눈으로 직접 봤다고 한들,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떨떠름한 얼굴들이었다.

그건 만독연주와 그의 제자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스승님. 이 아둔한 제자가 이해가 안 돼서 묻습니다만, 제가 지금 무엇을 본 것입니까? 정녕, 이 공자님께서 잠드신 게 맞으십니까?”

아니, 오히려 아는 것이 많으니 다른 이들보다 훨씬 잘 알았다.

드넓은 중원.

그 안에서 수면 독이 가지는 위상은 한없이 낮았다.

일단 수면제도 많이 섭취하면 양민들을 죽일 수 있었기에 독으로 분류하곤 하지만, 당가에서는 거의 안 쓰이는 물건이었다.

수면 독은 대부분 독성이 약해 최소 일각에서 이각이 있어야 효과가 돌고, 그마저도 많은 양을 써야 했으니까.

거기다. 경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약효에 저항하는 게 쉬워지니 큰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재우는 데는 점혈이라는 빠르고, 고수에게도 통하는 좋은 수단이 있어서 쓸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수면 독이란 저잣거리의 하류 잡배들이나 쓰는 물건에 불과했는데…….

저렇게 강한 수면 독이 있다고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이 공자님이라면 잠드신 게 맞다. 그리고 네가 지금 보고 있는 상황은…….”

그러니 이런 상황을 물어봤자 뭐라 대답하겠는가.

“나도 모른다.”

* * *

그 시각 백호단주의 집무실.

백호단주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차를 기울이고 있었다.

‘가주님이 미치셨다.’

팔불출도 심하면 병이라고 했던가.

지금 가주는 완전히 미쳐가고 있었다.

‘음독식 날, 금 100냥. 중간 평가 때 금 300냥. 그리고 오늘 용독술 시험의 일로 내정된 금 500냥.’

다 합해서 총 금 900냥.

당가주가 당지천에게 격려금 명목으로 지출한 돈.

‘은 1냥조차도 허투루 쓰지 않으시던 분이 언제 통이 이렇게 커지셨을까.’

금 100냥도 과하다고 생각되는 판국에 금 900냥은 과하다 못해 아주 많이 심했다.

물론, 금 900냥을 내줬다고 흔들릴 만큼 당가의 금력이 낮은 건 아니다.

허나, 이것은 당가주의 성정 문제.

구두쇠처럼 은자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계산하던 사람이 금을 100냥 단위로, 그것도 석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마구 쓴다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이야 금 900냥에 불과하지만…….’

정말 나중 가면 가주전 기둥이라도 뽑아서 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상황을 보면 분명 그럴 것이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만…….”

솔직히 그 어떤 부모가 못난 자식이 개과천선하는 걸 보고도 냉철하게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 자식이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는데 말이다.

자신도 그간 당지천를 바라보는 가주의 고심을 알고 있기에 맞춰줬었고, 납득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가주는 삼 공자가 두각을 드러내자 점점 미쳐가는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며칠 전.

당지천이 치를 비무에서 험한 꼴을 당할까 봐 걱정되면 규정을 바꾸면 되지 않냐고 하니 돌아오는 대답이 참 가관이었다.

-만약 지천이가 지혁이를 잡을 절초(絶招)를 준비했다면, 내가 그 기회를 뺏는 것이지 않더냐.

무재가 출중한 열다섯의 당지혁.

반면에 무재는 평범한 열두 살의 당지천.

누가 이길지는 뻔한 것 아닌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수가 없지.`

그러니 가주가 미친 게 틀림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하면 가주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저 멀리서부터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단주님! 단주님! 들어갑니다!”

허락도 안 했건만, 막무가내로 문을 밀고 들어온 사내가 숨도 안 고르고 말을 이었다.

“단주님. 삼, 삼 공자님이…… 삼 공자님이 사고를 치셨습니다.”

“사고? 도대체 무슨 사고길래 이리도 호들갑은 떠는 게냐?”

“글쎄, 삼 공자님이 비무에서 독을 가져오셨는데…….”

비무에 독을 가져왔다.

이 뒤에 이어질 말은 안 봐도 뻔하다.

아마도 극독을 가져와서 몰수패를 당한 것이겠지.

“그 독으로 이 공자님을 중독시키고 이기셨답니다.”

“……뭐?”

“심지어 이 공자님이 연격을 퍼붓자, 전부 피해내고 옆구리에 장까지 꽂았답니다.”

“…….”

분명 말을 들렸는데, 머리가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도무지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그런데 곧바로 뒤이어진 부하의 말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래서 가주님께서 1번 서고를 열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부하가 무려 가주의 서명이 적힌, 1번 서고 개방 명령서를 가져왔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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