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8화
독학관에 입관한 지 3달째.
“드디어 시험인가…….”
참으로 지루하고, 길고 길었던 학관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왔다.
“진짜, 졸업만 하면 하루 종일 뒹굴거려야지.”
그간 밤에 개량을 거듭하느라 놀 시간이 부족했다.
참으로 힘든 나날들.
약효만 강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부작용이 심하면 죽을 수도 있고, 극독으로 취급될 수 있기에 독성을 줄이고 약효만 강하게 하는 데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뭐, 다 끝난 이야기니 상관없지. 시험장에 가기 전까지 좀 누워 있을까…….”
“공자님! 슬슬 가셔야 합니다!”
“……는 안 되겠네.”
쉬려고 하자, 귀신같이 들려오는 일염이의 목소리.
몇 달 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던 것 같은 건 착각일까?
한숨을 쉬며 창고 한편에 고이 모셔놓은 독병을 챙겨 밖으로 나가자, 대뜸 상자 하나를 내미는 천일염.
“공자님. 선물입니다.”
“이게 뭔데?”
저번과 달리, 큼직하고 네모난 목함의 정체가 궁금해 곧바로 목함을 열어보자, 쏟아져 나오는 금빛 섬광.
일염이가 준 목함 안에는 무려 금 50냥이 들어 있었다.
“설마 이거…….”
“너무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그동안 전 금 500냥을 넘게 벌었으니 말입니다.”
뭐?!
금 500냥?!
천일염이 보란 듯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 딴 돈의 반만 가져갑니다. 그러니 그건 용돈 하시죠.”
하.
자기는 금 500냥이나 벌었으니 넌 이거 먹고 떨어져라?
이거 이거 아침 댓바람부터 도발을 해오다니 자존심이 상하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중간 평가에서 1등 한 건 잊었어?”
“저기 저 기둥과 여의봉 중에 무엇이 더 긴지는 굳이 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죠. 남들과 달리 전 공자님의 실력을 잘 아니깐요.”
하늘이 무너져도 그 실력으론 택도 없다는 듯 콧노래를 부르는 천일염.
어쩌면 시험 보는 날 아침부터 이렇게 도발하는 것도 내기 때문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정 그러면 판돈을 올리자고.”
약이 오른 내가 저번처럼 품에서 전표 하나를 꺼내자, 눈을 반짝이는 일염이.
“백화상단에서 보내온 금 100냥짜리 전표군요.”
얼마 전.
다행히 백호현이 약속을 지켰는지, 백화상단에서 선물 명목으로 보내온 금 100냥.
예의 일을 막은 것치고 적은 돈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갑자기 앞뒤 맥락 없이 큰돈이나 귀한 물건을 보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심받을 게 분명했기에 부디 상단에 방문해 달라는 짧은 편지와 함께 배송되었었다.
그리고 연이어 꺼내는 전표 하나.
“가주님께서 저번에 주신 금 300냥짜리 전표까지? 공자님. 정말 진심이시군요.”
입관하자마자 수석을 차지하자, 하인을 통해 전달받은 전표.
금 100냥도 꽤 크다고 생각했는데, 용돈으로 금 300냥을 보낼 정도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가문의 재력이 상당한 듯했다.
아니면, 꽤 무리한 지출이었을 텐데 항상 무표정한 당가주가 그런 짓을 할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공자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반기는 얼굴과 따로 노는 입.
“허장성세는 패가 가려졌을 때나 하는 것이라고.”
일염이는 노름과 관련되기만 하면 나를 살살 약 올리려고 하는 듯했다.
“일염아. 혓바닥이 길다.”
“좋습니다. 공자님이 원하신다면 판돈을 금 500냥으로 올리도록 하죠. 단, 명심하십쇼. 이번엔 한 푼도 돌려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 알았다.”
짜식.
지고 나서 울고불고 해봐라.
내가 봐주나.
결과 나오는 순간, 바로 가차 없이 압수 수색을 진행할 거다.
“그런데 공자님. 그 병은 뭡니까? 혹시 이번에도 공자님을 가주로 만들어줄 신비한 묘약입니까?”
“눈치가 참 빠르구나.”
“어후, 눈칫밥 하나로 먹고사는 노름꾼인데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언제부터 호위 겸 시종이 노름꾼이 되어버렸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안타깝구나. 일염아.”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에 한 내기에서도 눈치가 그렇게 빨랐다면 금 500냥은 잃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일염아.
일전에 네가 노름은 생사결과 같다고 했었지.
넌 오늘 12살짜리에게 목숨을 잃게 될 거다.
* * *
독학관의 졸업 시험.
당가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행사였기에 많은 사람이 시험장을 찾곤 했지만, 오늘은 유독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오늘 삼 공자님이 용독술 시험을 통과하실 수 있을까?”
“중간 평가에서도 수석을 차지하시고, 매일같이 전각에서 두문불출하셨다는데 가능하지 않겠어?”
왜냐면, 입관하자마자 중간 평가에서 수석을 차지한 삼 공자가 시험을 보는 날이었기에.
그간 당가에서 삼 공자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지만, 독학관의 생도가 아닌 이상에야 직접 삼 공자를 보긴 힘들었다.
음독식 이전까지 빈번했던 외출은 어디 갔는지, 전각과 학관만 오가는 삼 공자.
중간 평가의 결과가 알려지고서 관심을 보인 장로 몇몇이 삼 공자의 전각을 찾아갔지만, 삼 공자가 직접 축객령을 내려서 그 실체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실체를 볼 수 있었으니 사람이 모여드는 일은 당연했다.
거기다…….
“만약, 오늘 삼 공자님께서 비무까지 통과하신다면…….”
“자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는가? 삼 공자님의 재능이 뒤떨어지지는 않는다지만, 그리 뛰어나지도 않다고 들었네. 그 실력으로 비무를 통과하길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허나, 삼 공자님이 입관하실 때만 해도 수석을 차지하실 거라 그 누가 예측했는가? 다들 까 내리기 바빴지.”
당지천이 비무를 통과해 버리기라도 하면 가히 당가에.
아니, 당가를 넘어 사천에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터이니.
“허허허. 그래, 70배라면 누구라도 눈이 뒤집히는 게 정상이지. 역배란 게 그런 것이니까.”
물론, 대다수는 그 생각이 허황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보게나. 용독술 시험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저 얼굴을.”
턱을 괸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삼 공자.
“필시 앞으로 치를 비무를 생각하며 홀로 논검을 하시는 걸게야.”
주변에서 얼만큼 시끄럽게 하더라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세를 유지하는 게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
삼 공자가 실력을 막론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감명받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사실 지금 삼 공자가 눈을 감고 있는 건, 논검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지루함을 못 이겨 졸고 있는 것이라는 걸.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오가 되자, 교관들이 들어와 시험을 진행했다.
“지금부터 용독술 시험을 시행하겠다.”
용독술 시험.
점수를 나누긴 해도 합격과 불합격으로만 나뉜 이 시험은 이전의 문답형 시험이었던 중간 평가와 다르게 매번 같은 문제가 출제됐다.
“각 생도는 자신 앞에 놓인 열 가지의 독을 독성이 강한 순으로 나열하여 제출하면 된다.”
그 내용은 독을 파악하고, 독성이 강한 순으로 나열하는 것.
“만약 독을 판별하는 데 필요한 재료가 있다면 본 교관이 서 있는 중앙에 나와서 가져가면 되며, 답안 작성을 완료한 생도는 본 교관에게 답안을 제출하면 곧바로 점수를 불러주겠다.”
문제가 알려져 있기에 언뜻 들으면 굉장히 쉬워 보일 수 있었지만, 매번 같은 문제만 내는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문제를 배분하겠다.”
교관들이 각 생도 앞에 다른 쟁반을 가져다주자, 비장함이 서리는 생도들의 얼굴.
매년 같은 문제만 내는 이유.
그것은 지금 생도들의 눈앞에 놓인 10가지의 독.
이 중에는 만지기만 해도 영구적인 장애를 입거나 먹으면 즉사할 수도 있는 극독도 같이 껴 있기 때문이다.
용독술은 독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독을 다루는 행위 또한 포함된다.
세상은 넓고 수천 가지의 독이 존재한다지만, 매번 새로운 독이 발견되고 있었기에 늘 미지의 독을 대할 땐 조심해야 했다.
또한, 당가의 무인들은 생로(生路)가 보이지 않을 땐, 동귀어진하기 위해 극독을 가지고 다녔기에 자신의 독에 중독당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노파심에 이야기하지만, 저번 기수처럼 시작하자마자 손등에 독을 들이붓는 생도는 없길 바란다.”
저번 기수의 이야기가 나오자, 침을 꼴깍 삼키는 생도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실수로 자신의 손등에 독을 부었는데, 하필이면 그게 화골산이어서 왼손이 녹아버린 생도 이야기는 아주 유명했다.
“부디, 너희가 노력한 만큼 합당한 결과를 얻어가길 바라마. 그럼 시작해라!”
시험이 시작하자,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문제를 확인하는 생도들.
다행히도 아는 독인지 얼굴이 밝아지는 생도가 있지만.
“으…….”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생도도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그래도 마냥 낯설지 않은 게 강의 시간에 본 것 같았다.
분명 독성이 강하지 않은 독이라 생각해서 손가락으로 콕 찍어 맛을 보자…….
“27번 생도. 탈락!”
“예?”
부리나케 뛰어오는 교관들.
그리고 점차 시각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시, 실수입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순간 사색이 되어버린 생도가 자기 행동을 책망했지만, 곧바로 교관들에게 붙들려 시험장에서 끌려 나가야만 했다.
독을 판별하려면 많은 지식과 조심성이 필요하다.
향만 맡아도 중독되어 버리는 독도 있고, 심지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중독되는 일도 있다.
그런데 저렇게 부주의하게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면 곧바로 탈락이다.
사실 저 생도도 평소라면 절대 안 할 실수겠지만, 과도한 긴장으로 인해 잠시 머리가 마비된 탓일 거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정상참작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상대는 독을 꺼내고 분별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 법.
급박한 찰나의 순간.
상대의 검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독을 분별할 능력은 되어야 어엿한 당가의 무인이 될 수 있기에 반박의 여지 없이 탈락이었다.
“제,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곱게 나갈 것이지 교관을 붙잡고 시험장이 떠나가라 외쳐대는 27번 생도 탓에 다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때.
“저기 봐. 삼 공자님이 눈을 뜨셨는데?”
삼 공자도 인상을 팍 쓴 채 눈을 떴다.
“하아.”
방해받아서 기분이 나쁜 탓일까.
한숨을 푹 쉰 삼 공자는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이내 자신 앞에 있는 독들을 살폈다.
“분명 대공자님이 반각이 걸리셨지? 삼 공자님은 얼마나 걸리실까?”
“글쎄, 매일같이 공부만 하신 대공자님도 일각이 걸리셨는데, 매일 주무신 삼 공자님이라면 오래 걸리실 거 같은데…….”
용독술 시험에서 가장 어려운 과정은 독성을 가늠하는 것이다.
경지에 이르면 뿜어지는 독기만으로도 독성을 가늠할 수 있지만, 아직 어린 대다수 생도는 그게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알지 못하는 독이 나오면 직접 독성을 가늠해야 하는데, 이는 내공이 많을수록 유리했다.
삼 공자는 독의 임시 판별이 끝났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재료들을 챙겨왔다.
그러고는 여러 번 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재료들을 그대로 독에 던져 넣는 삼 공자.
곧바로 흡족한 미소를 짓는 게 빠르게 판별이 끝난 듯했다.
“자, 이제부터 얼마나 걸리느냐는 건데…….”
생도가 모든 독을 알 수는 없다.
왜냐면 학관에서 시험을 준비할 때 생도는 물론, 장로들에게도 생소한 독을 최소 하나는 섞어 넣기 때문.
그래서 다들 삼 공자가 얼마나 빨리 독성을 알아낼지 주목하고 있었는데…….
“바로 답안을 쓴다고?”
삼 공자는 모르는 독 따윈 없다는 듯 일필휘지로 답안지를 써 내려갔다.
“알아낸 것만 미리 정리하는 거 아니야?”
“그런가?”
그러나 그 말을 부정이라도 하는 듯 붓을 내려놓자마자 다시 일어서는 삼 공자.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교관에게 다가가 답안지를 내밀었다.
“일각은커녕, 한 번 슥 둘러봤을 뿐인데 벌써 답안을 낸다고?”
모두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교관을 보고 있자,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채점을 해나가던 교관의 입이 고장 난 기관진식처럼 열리고 닫히길 반복했다.
“하, 하, 하…….”
교관이 계속 말을 더듬자,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서 채점 결과를 발표했다.
“……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