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7화
가주전.
독학관의 성적이 게시되자, 얼마 안 가서 집무실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가주의 명령이 내려졌다.
왜냐하면…….
“감축드립니다. 가주님.”
“고맙다.”
가주인 당기룡이 도저히 체통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쉴 새 없이 말려 올라가는 당기룡의 입꼬리.
당지천의 소식을 듣고 나서 어찌나 놀랐던가.
미리 알아볼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괜한 잡음이 생길까 봐 피하고 있었는데 무려 수석이라니.
소식을 가져온 게 백호단주가 아니었으면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독학관에서 수석이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입니까.”
아예 전례가 없던 일은 아니다.
천 년이나 되는 당가의 역사 속에서 입관하자마자 수석을 한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
자주 나오는 일은 아니었지만, 일일이 수를 세지 못할 만큼 많은 인원이 있었을 거다.
다만, 그간 당지천이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만약, 한발 더 나아가 올해 조기 졸업까지 가능하다면…….”
뒷말을 흐리며 입을 다무는 백호단주.
말을 끝마치지는 않았지만, 여기 있는 둘 다 그 의미를 알았다.
지금의 당가의 후계 구도는 당지독의 압도적인 독주.
당지독의 온화한 성향이 마음에 안 들어 당지혁을 따르는 이들이 있었지만, 대다수는 당지독을 지지했다.
그런데 그런 당지독조차 비교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가 나타난다면?
판이 뒤흔들릴 것이라는 건 세 살짜리 꼬마 아이도 알 수 있었다.
“무공 실력은 감춘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지.”
하지만 당지천의 실력 자체는 12살치고 훌륭한 편이었으나, 어디까지나 무재는 평범한 수준.
동 나이대라면 몰라도 졸업 시험을 보는 다른 생도들의 나이가 열일곱임을 감안하면 턱없이 모자란 실력이었다.
“그리고 지혁이가 나서지 않겠느냐.”
거기다. 생도끼리 비무 시험을 보던 지난날들과 달리, 올해부터는 흑룡 단원들과 비무를 하게 된다.
즉, 당지혁이 마음만 먹으면 당지천과 비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렇긴 합니다. 보통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러지 않을 텐데 이 공자님이라면 가차 없으실 테니까요.”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게 장점이자 단점인 당지혁.
그 성격상 저번에 물먹었던 만큼 복수하려 할 게 분명했다.
“……올해만 다시 작년처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호단주가 넌지시 건네는 의견에 당기룡은 순간 솔깃했다.
겨우 턱걸이한 용독술 시험 점수를 가지고도 압도적인 무공 실력으로 수석을 차지했던 당지혁.
그런 당지혁과 당지천이 비무를 하게 되면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그 상대가 독학관에서 조금 뛰어난 생도라면?
어쩌면 당지천이 입관한 해에 조기 졸업하게 될 것이다.
“크흠.”
그 광경을 상상하자, 자신도 모르게 방글방글 웃음을 지었기에 당기룡은 괜한 헛기침을 하곤 근엄하게 말했다.
“불가. 특혜를 줄 순 없다.”
마음 같아선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자신은 가주였다.
다시금 싱글벙글 웃고 있는 지금에도 그 사실만큼은 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 더해, 만약 지천이가 지혁이를 잡을 절초(絶招)를 준비했다면, 내가 그 기회를 뺏는 것이지 않더냐.”
왠지 모르게 당지천이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저번보다도 더 큰, 대형 사고를 말이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는 강의실.
“솔직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 삼 공자님이 1등을 차지했다는 게.”
“분명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막, 답안을 빼돌렸다든가.”
“공명정대하신 가주님께서 그런 걸 용인하실 것 같아? 걸렸다면 바로 폐관수련행이었을 걸?”
-끼이익.
강의실에 의자를 미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언제 웅성댔냐는 듯 입을 다무는 생도들.
자신들은 소곤소곤 이야기했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내 귀에 쏙쏙 들어와 박혔다는 사실을 잘 모르나 보다.
“…….”
자리에서 일어나자, 쏟아지는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눈들.
단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생도들이 날 보는 시선 자체가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죄라도 지은 듯 갈팡질팡하는 눈동자가 세 쌍.
그간 나를 씹어오던 삼총사였다.
애써 이름을 붙여주자면 학관삼마랄까.
사실 처음엔 혼구녕을 내줄까 싶다가도 곧바로 그만뒀다.
어른이 애들한테 힘써봤자 뭐 하겠는가.
직접 들이박는 거라면 사돈의 팔촌까지 혼내줄 의향이 있었다만, 그저 뒷담화 정도라면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 줄 수 있었다.
물론, 얼굴은 기억해 두겠지만.
“…….”
교실을 나가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생도들의 눈빛에 대충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는 태평하게 강의실을 벗어났다.
본디 이것이 잘난 자의 숙명.
전생에서도 남들 앞에 설 때면 늘 같은 시선을 받았었다.
이제 와 새삼스레 불쾌해하기엔 내가 너무 익숙했다.
거기다…….
“저기 봐. 삼 공자님이셔.”
전각으로 가는 도중 한 시종의 말에 쏠리는 시선.
강의실에서 봤던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눈빛이 아닌, 호의적인 시선이 훨씬 더 많았다.
“도대체 어떻게 입관하자마자 수석을 차지하신 걸까? 원래 독을 무서워하셨잖아.”
“분명 대공자님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계신 걸 거야. 안 그럼, 말이 안 되잖아.”
중·고등학교 수준에서 1등을 했다고 칭찬받는 게 조금 양심에 찔렸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이러다가 설마, 올해 졸업까지 해버리시는 거 아냐?”
“에이, 그건 너무 나갔다. 삼 공자님 무재가 평범하신 건 너도 알잖아. 졸업까진 무리시겠지.”
“하긴, 그런가?”
아무리 학관에서 1등을 차지했다고 한들, 무공 실력은 평범한 수준이니 올해 졸업은 무리라는 게 정설.
솔직히 무공만 놓고 보자면 나 또한 자신이 없었으니 당연한 생각일지 몰랐다.
“순전히 무공만 놓고 보자면 말이지.”
허나, 저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
용독술의 경지가 극에 이른 나는 무공 하나로만 시험을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물론, 무공 실력도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독을 쓴다 해도 맞힐 수 있는 암기술이 필요했고, 맞힌다고 하더라도 중독될 시간도 기다려야 했으니.
다만, 그 시간만 버텨낸다면 그 누구 오더라도 손쉽게 이긴다는 걸 단언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학관에서 자고, 밤에는 수련하는 일상을 보내는 것 아니겠는가.
“다 계획이 있다, 이 말이야.”
자유로워져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뒹굴할 그 날을 생각하자, 절로 나오는 콧노래.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시종들의 말에 절로 인상을 구겨졌다.
“거기다. 올해부터 비무는 흑룡 단원들하고 하기로 했잖아. 이 공자님이 벼르고 있을걸?”
“그러네. 상대가 이 공자님이시면 삼 공자님이 이기시긴 힘들겠네.”
“뭐……?”
비무를 당지혁이랑 한다고?
이게 무슨 개소리야?
거기다, 흑룡단이라면 외원에서 제일 강한 무력 부대잖아?
“옘병.”
여태까지 작은 소문에도 귀를 기울이던 것과 달리, 전각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귀가 어두웠다.
그래서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를 하는 게 굳이 진위를 파악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하필 상대가 당지혁이라니…….”
이럴 때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가서 수련해야…….
바삐 걸음을 놀려 전각에 도착하자, 나갈 채비를 하던 천일염과 마주쳤다.
“아, 공자님. 이제 오십니까?”
“오늘도 나가려는 거야?”
“예. 공자님 용돈이라도 벌려면 바삐 움직이어야 하니 말이죠.”
고양이한테 생선 가게를 맡기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종잣돈을 얻은 일염이는 호위는 개나 줬는지 이 시간만 되면 성도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이게 다 내가 묵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모습이 심히 얄미워 보였다.
“야, 그래도 명색이 호위인데 노름은 낮에 하고 밤에는 수련 좀 도와주면 어디 덧나냐?”
“공자님. 낮에 노름하는 자들은 일이 없는 한량들이 대다수입니다. 돈이라는 이름의 목숨을 걸고 생사결을 벌이는 게 아닌, 그저 시간을 죽이러 오는 이들입니다.”
마치 출병을 앞에 둔 장군처럼 비장함이 엿보이는 일염이의 눈.
“하지만 밤에 나타나는 이들은 다릅니다. 진정 돈의 무게를 아는 자. 혹은 돈의 가치를 티끌만큼도 모르는 자들만이 밤의 향락을 즐길 줄 압니다.”
“……그러냐.”
전문 노름꾼이랑 호구가 온다는 소리를 참으로 거창하게 한다.
“그리고 제가 공자님을 가르치기엔 재능이 너무 없으셔서 안 됩니다.”
“또, 그 소리야? 그거 상당히 불경한 발언 아니냐?”
“마음에 안 드시면 내치셔도 불만은 없습니다만?”
“왜? 내가 못 할 거 같아?”
“쯧, 쯧, 쯧.”
갑자기 삿갓을 슬쩍 올리며 혀를 차는 천일염.
“허장성세는 패가 가려졌을 때나 하는 것입니다. 공자님.”
재수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게 맘 같아선 진짜 잘라 버리고 싶었다.
에라이, 치사한 자식.
한 번을 안 져주네.
“그래, 가라. 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가는 천일염.
잔망스럽게도 보법을 밟으며 떠나는 게 참으로 얄미웠다.
“생사결은 개뿔. 돈 내기가 생사결이었으면 넌 이미 죽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일염이가 멀어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훨씬 빨라서 불안해졌다.
일염이가 말하길 자기 정도 되는 사람은 드넓은 중원에 널리고 널렸다고 했는데 저 정도 속도면…….
‘이거 잘못하면 지는 거 아냐?’
아직 내 실력으로 버티는 건 택도 없다.
물론, 흔하다고 한들, 일염이도 호위인 만큼 어중이떠중이는 아닐 테지만, 저 속도의 반도 못 따라가는 게 지금 내 실력이다.
약한 상대라면 몰라도, 당지혁이 나오면 곧바로 무너질 실력.
“그렇다면 별수 없나.”
당가의 무공이 무슨 마공도 아니고, 단기간에 향상시킬 방법은 없다.
일염이는 다른 건 협조적이다가도 무공 이야기만 나오면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다른 무공 선생을 구하자니,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결국 수련으로는 당지혁을 꺾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개량하는 수밖에.”
독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 귀찮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걸 안 하면 더 귀찮아질 것이 자명했는데.
“에휴,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끝장을 보자고.”
입으론 귀찮다고 했지만, 상대가 당지혁이라는 걸 알아버린 만큼 질 생각은 절대 없었다.
이전에 귀찮아도 직접 들이받는 놈은 혼내주겠다고 다짐했으니까.
그러니 아예 맞는 순간 픽 하고 쓰러지게 만들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연구실로 향했다.
* * *
당지혁의 개인 연무장.
“뭐? 계속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고?”
당지혁은 보고를 듣자마자, 박장대소를 했다.
처음 당지천이 졸업 시험을 신청했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가.
아무리 다른 생도들이 여러 번 응시한다고 해도, 기본 실력이 될 때의 이야기.
막 입관한 당지천이 그러는 것은 제 분수도 모른 체 나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겁쟁이 자식이 그러면 그렇지.”
물론, 독학관에서 수석을 차지한 것은 놀랐다.
겁쟁이 자식이 그런 능력을 숨기고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괘씸한 놈.”
다시금 생각하니 열이 뻗치는 당지혁.
녀석이 그런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음독식 날 해독제를 가지고 왔다는 당지혁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였다.
거기다, 올해부터 바뀐 비무 방식은 이미 가문 내에 소문이 퍼져 있는 상황.
당연히 당지천의 귀에도 들어갔을 텐데 시험을 신청한 것 자체가 오만의 극치였다.
“뭐, 나한테 나쁠 것 없지.”
따지고 보면 듣고도 자신이 체면 때문에 안 나서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고, 혹은 아예 못 들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당지혁에게는 절호의 기회.
저번에 욕보였던 모습을 만회할 기회였다.
“개자식. 이번 기회에 아주 철저하게 박살을 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