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3화
독으로 유명한 사천당가.
이곳에는 아주 유명한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당가와 척질 것이 아니라면 은수저를 들고 가지 말 것.’
독을 다루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식사 자리에 독을 탔다고 의심받는 것이다.
가히 용의 역린을 건드리는 일.
그런데 당가에 손님이 은수저를 가져온다?
그건 그냥 선전포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당가에 은수저가 모습을 보인 게 근 이백 년 전의 일이었는데, 하필 오늘 은수저를 보게 될 줄이야.
‘내가 뭔 죄라도 지었나.’
귀찮은 일을 떠나서 별다른 소란만 없기를 바라면서 행실을 조심했는데, 곧바로 이렇게 깔쌈한 엿을 선사하다니…….
운도 참 더럽게 없었다.
“혹시 누군가가 날 음해하려고……?”
그런데 문득, 은수저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 누군가의 수작이 아닐까 하여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잡초라도 다시 자라지 못하게끔 뿌리까지 밟는다고 하여도, 잡초 취급조차도 받지 못하는 게 나다.
다른 쟁쟁한 경쟁자들을 놔두고 폐품을 견제하려고 위험을 짊어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를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긴 해도, 형제 중에서 그럴 사람이 없었다.
“하아.”
은수저가 우연히 내 눈앞에 나타나다니 이 얼마나 재수가 없는 일인가.
아니,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재수가 좋은 건가?
적어도 내 선에서 해결할 기회가 생겼으니.
지금 일염이의 손에 들린 건 젓가락.
당장 남들 눈에 띄기 전에 은수저를 반입한 원주인을 찾아서 숟가락을 빼앗고, 해결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으로 일염이에게 은수저를 건네받자…….
“이거, 이거 내가 재밌는 걸 봐버렸는걸?”
아, 옘병.
이미 때는 늦었는지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작은형.”
당지천의 형이자, 당가의 이 공자인 당지혁.
무재는 뛰어나나 다혈질의 성격이었으며 가문 내에서 당지천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폐품이라고 불린다 한들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지킬 줄 알았는데…….”
비꼬는 듯한 말투이면서도 이미 화가 잔뜩 났는지 노성이 깃든 당지혁의 목소리.
올해 15살인 당지혁은 이미 성인이라고 생각될 만큼 키가 컸다.
무려 6척(180㎝)을 넘었으며 수련을 좋아해 온몸이 근육질이었다.
그런 당지혁이 으르렁거리며 나를 내려다보는 게 심히 두려워졌다.
‘아, 썩을. 내가 뭔 짓을 하더라도 은수저에는 묻힐 거 같은데…….’
행여나 다혈질인 이 녀석이 은수저를 보고서 발광하며 일을 일파만파 크게 만들까 봐.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로 말을 잇는 당지혁.
“설마하니 자기 생일 때 은수저를 준비했을 줄이야.”
뭐?
내가 은수저를 들고 왔다고?
시선을 내려보니 내 손에 쥐어진 은수저.
당지혁은 이걸 보고서 내가 은수저를 들고 왔다고 오해하는 듯했다.
“구제 불능의 쓰레기구나. 너?”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은수저를 보고 기겁한 건 어디까지나 괜한 소란이 일어서 내 이야기가 묻힐까 봐 그런 것.
앞으로가 귀찮아질까 봐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은수저를 가져온 게 나라면?
소란이 날지언정 내가 묻히는 일은 없을 거다.
“이 공자님. 이건 당지천 공자님의 것이 아니라…….”
“맞아, 내 거야.”
“고, 공자님?”
“사람이 은수저를 들고 올 수도 있지 왜 그래?”
“허.”
해명하려는 일염이의 말을 끊으며 보란 듯이 은수저를 내밀자, 기가 차는 듯 혀를 차는 당지혁.
“아니…….”
안 그래도 싫어하는 내가 뻔뻔한 태도로 나오자 바로 열이 뻗치는지 주먹을 쥐었다.
“이 공자님! 어디 계십니까! 이 공자님!”
“쯧.”
그러나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쓰게 혀를 찬 당지혁은 손에 쥔 힘을 풀었다.
“야, 두고 보자.”
그러고는 마치 도망치는 악당이라도 된 듯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는 당지혁.
만약 주먹이라도 날렸다면 일단 맞받아치고 생각하려 했는데, 다혈질인 녀석조차 급히 가야 하는 일이 있었는지 조용히 떠나갔다.
“녀석, 동생한테 참 살벌하게도 구네.”
뭐, 소가주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처지니 당연한 건가.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인 것도 한몫하고.
“공자님.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서 참 다행입니다만,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이 공자님이 소문을 퍼뜨리실 수도 있습니다.”
소문?
‘폐품이 자기 생일에 독을 먹을까 봐 은수저를 들여왔다.’
설령 당지혁이 그런 소문을 일파만파 퍼뜨린다고 해도 하등 나쁜 것이 없었다.
이미 내 인식은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는 상태였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기대가 없어야 놀람도 큰 법.
혹시나 싶어 기대를 품었던 이들도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가지고 있던 일말의 기대조차 버리게 될 것이다.
“그냥. 괜히 소란 피우는 것보다 이게 낫잖아.”
다만, 일염이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기엔 시간이 없었다.
왜냐면 지금부터는…….
“그나저나 괜히 시끄러워지기 전에 은수저 주인 찾으러 가보자고.”
이 은수저의 진짜 주인을 찾으러 가야 했으니까.
* * *
은수저의 주인을 찾아 헤맨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 그냥 아무나 붙잡고 협조해 달라고 하고 싶네.”
쉽지 않을 거로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막막했다.
얼마 안 가서 정오이기에 시간도 별로 없었고, 은수저를 주웠을 때도 특별한 단서 같은 게 없었다.
그저 일염이가 말하길 은수저를 주웠을 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고만 했다.
“공자님. 웬 아이 한 명이 숨어서 공자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처럼.
일염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기둥에 숨어 나를 보는 사내아이가 보였다.
딱 봐도 뭔가 용건이 있어 보이는 모습.
스리슬쩍 소매에서 은수저를 꺼내서 보여주자, 심히 동요하는 게 이 은수저의 진짜 주인인 듯했다.
“일염아, 잡아 와.”
“예.”
말 끝나기가 무섭게 바람같이 사라졌다가, 아이를 잡아 와 내려놓는 천일염.
“히끅.”
아이는 갑자기 끌려와서 많이 놀랐는지 연신 딸꾹질을 해댔고,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게 상당히 심약한 성격으로 보였다.
“너지?”
“어, 어?”
“은수저 가져온 거, 너잖아.”
“아, 아니야…….”
“됐고, 이름.”
시간이 별로 없는 탓에 강압적으로 나가자,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는 아이.
맘 같아선 대충 은수저만 빼앗고 가버리고 싶었지만, 일단은 손님이었기에 뒷말 안 나오게 하려면 깔끔하게 정리해야 했다.
겁나 귀찮게 말이다.
“뭐야, 이름 없어?”
“히끅, 배, 백호현.”
백호현?
어디서 들어봤는데…….
“아, 백화상단의 삼대독자?”
아는 척을 하자 고개를 위아래로 열렬히 흔드는 백호현.
아무리 열 살의 아이라지만 도저히 천하오대상단인 백화상단의 후계자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심약한 모습이었다.
“일단, 숟가락부터 줘봐.”
아까 주운 것은 젓가락뿐이었다.
설명은 뒤로하고 남들이 보기 전에 은수저를 회수하려 하자, 백호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은수저를 뺏기지 않으려 품에 꼭 쥐었다.
“혹시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부모님 유품이나 그런 건 아니지?”
울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
“그런데 왜 이렇게 필사적이야.”
“주, 죽는댔어.”
“뭐? 누가?”
“처, 철호가 당가에서 밥 먹을 때 은수저가 없으면 죽는댔어…….”
“철호가 누군데?”
“내, 내 호위 아저씨.”
“은수저도 그 사람이 챙겨준 거야?”
“어, 어…….”
“호위라…… 대충 감 오네.”
백화상단은 천하오대상단이면서 당가와 긴밀히 협력하는 곳이다.
마치 악어와 악어새와 같은 관계.
그런데 백화상단이 미쳤다고 먼저 도발하겠는가.
필시 다른 곳에서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즉, 눈앞의 백호현은 그저 이용당한 건데…….
‘이거 충분히 써먹을 수 있겠어.’
이용당했다고 한들, 백호현이 백화상단의 사람이란 건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일단 잘 수습하고 나서, 나중에 이 일을 빌미로 왕창 뜯어먹어야지.
“자, 호현아. 당가의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음식에 독을 탔다고 의심하는 거야.”
본디 사람이란 뜯어먹을 게 있으면 친절해지는 법.
내가 아까와 다르게 차분한 어조로 말하자, 백호현이 울음을 그쳤다.
“나, 나도 잘못된 거는 알고 있어……. 하, 하지만 죽고 싶지는 않아.”
“대다수 사람이 잘 모르는데, 사실 은수저는 모든 독을 가려낼 수 없어. 아니, 오히려 가려낼 수 없는 독이 더 많아. 거기다. 독이 아닌 것에도 변하곤 해.”
은수저.
독이 든 음식과 수저가 닿으면 까맣게 변해서 좀 있는 집안 자식들이면 독살을 피하려 다들 은수저를 쓰곤 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은수저로 판별할 수 있는 독보다 없는 독이 더 많았다.
왜냐면 은수저가 검게 변하는 건 어디까지나 황과 반응해 황화은이 만들어지기 때문.
다르게 말하자면 황이 들어간 물질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반응한다는 의미였다.
예를 들자면 계란 노른자라든가.
“그, 그걸 어떻게 믿어?”
당연하게도 전혀 믿지 않는 백호현.
그래도 나름 깡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지 무서워하면서도 할 말은 했다.
그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나는 백호현에게 직접 보여주기로 했다.
“일염아, 수란 하나만 가져와.”
아까와 같이 말 끝나기 무섭게 어디론가 뛰쳐나가 수란을 구해 온 천일염.
나는 수란을 건네받아 백호현에게 내밀었다.
“자, 은수저로 한번 떠보렴.”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수저를 꺼내 수란에 숟가락을 대는 백호현.
그러자…….
“벼, 변했어?!”
삽시간에 검게 물드는 은수저.
“마, 말도 안 돼…….”
핏기가 싹 가시는 백호현의 얼굴.
심약한 것과 다르게 머리는 잘 돌아가는지, 백호현은 금방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달은 듯했다.
“아, 아니야. 수, 수란에 독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서도 다른 수를 썼을 거로 생각하는지 부정하는 백호현.
나는 그런 백호현에게 보란 듯이 은수저를 뺏어서 수란을 떠먹었다.
“어, 어?!”
우물, 우물…….
수저가 검게 변했음에도 망설임 없이 수란을 입안에 넣자, 경악한 채 얼어붙은 백호현.
꿀꺽.
“봐, 이상 없지?”
입안을 훤히 보여주며 수란을 삼킨 걸 보여주자 다시금 핏기가 가셨다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혈색이 돌아왔다.
“마, 맞아. 다, 당가의 사람들은 모두 독공을 익힌댔어. 그, 그러니 수란에 독이 있었어도 별문제가 없을 거야.”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심이 많은 게 더럽게 귀찮았다.
그 철호인가 뭔가 하는 호위가 건네주는 은수저를 그렇게 좀 의심하지 그랬냐.
“호현아, 혹시 당지천이라고 아니?”
“다, 당지천? 그 폐…….”
다급히 양손으로 입을 막는 백호현.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차마 다 하지 못한 말을 내가 직접 이었다.
“그래, 그 폐품. 그게 바로 나야.”
“아…….”
사천당가의 삼공자.
당지천이 독을 두려워한다는 건 저잣거리의 꼬마 아이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내가 검게 변한 은수저로 수란을 떠먹었다.
심약하긴 해도 영특해 보이는 백호현이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물론, 은수저를 가져온 그 후폭풍도.
“끄흑, 죄,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곧바로 울음을 터뜨리는 백호현.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들었기에 잽싸게 발을 빼며 물러나며 말했다.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야. 내가 그런 일이 없도록 미리 막아줬잖아.”
귀찮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던 나는 계속해서 우는 백호현을 어르고 달래며 진정시켰고, 이 일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렸다.
“내 말 잘 알아들었지? 뭐라고 했는지 읊어봐.”
“이, 이 일은 절대 비밀이고…… 지, 집으로 돌아가면…… 아, 아빠한테만 꼭 말하라고 하셨어요…….”
“그래, 네 아버지께 꼭, 꼭 말해야 한다? 만약, 내가 직접 찾아갔는데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럼…… 알지?”
조용히 품속의 은수저를 보여주자, 백호현은 명심했다는 듯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가봐.”
가보란 소리에 눈물을 훌쩍이면서도 부리나케 도망치는 백호현.
“후……. 드디어 해결이네.”
정말 더럽게 귀찮은 게 강적이었다.
물론, 한 일에 비해 아주 큰 소득이 있었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공자님. 더 지체되기 전에 빨리 가시죠.”
“그래. 귀찮은 일은 모두 정리했으니 얼른 가자. 아, 잠깐만…….”
품속에서 아까 가져온 작은 병을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효과가 빨리 도는 만큼 웬만하면 식장에서 먹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을 것 같으니 미리 먹어둬야겠지.
“됐다. 이제 가자.”
약도 챙겨 먹었고, 이미 짧은 시간에 고생은 고생대로 했다.
이제는 음독식까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지만, 갑자기 드는 오한.
“그런데 왜 이렇게 불길하냐…….”
왠지 가서도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다는 불길함을 애써 외면한 채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