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2화
수백에 달할 것 같은 독들이 가지런히 놓인 창고.
“이로써 마지막 하나.”
지금 막 완성한 따끈따끈한 독으로 진열장의 마지막 자리를 채우고 가득 찬 창고를 돌아보자 감회가 새로워졌다.
하나같이 익숙한 이름의 손수 만든 물질들.
극독을 다룰 수 없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만들어낸 비장의 무기들이었다.
“드디어 3년인가.”
과학의 불모지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역사에 남을 업적을 수없이 달성한 위대한 화학자였지만, 남들이 시키는 대로만 일하다 끝내 독살당한 나.
영문도 모른 채 당지천의 몸에 빙의한 지 어언 3년이 지났다.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는데 말이야…….”
사실 꿈이 아닐까.
죽기 전의 달콤한 망상을 분간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우연히 발견한 원주인의 일기장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천하제일인이 되어, 당가를 천하제일세가로 만든다.”
9살짜리 원주인이 일기장에 수없이 반복해서 적었던 단 하나의 꿈.
그 문장이 내 심금을 울렸기에.
“이번 생은 다르다. 이번 생은.”
남들에게 휘둘리고 사는 건 전생으로 족했다.
이제는 오롯이 나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지 않던가.
천하제일인이고, 천하제일세가고, 전부 오롯이 내 마음 가는 대로 살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기에 3년을 쉼 없이 달려온 거다.
“금독령만 아니었으면 조금 더 수월했을 텐데…….”
내가 빙의하기 전 당지천은 독을 두려워했다.
독공을 처음 익히는 7살 때, 독을 보고서 기절했었는데 그로 인해 독에 5년간 접근 금지 처분을 받았었다.
그리고 내가 당지천이 된 시점이 금독령이 3년 남았던 시점.
독공을 익히지 못해 남들보다 뒤처져 있던 상황이라 일단 뭐라도 해야 했었다.
“3년 동안 고생했으니까 앞으론 쉬엄쉬엄해야겠다.”
하루도 쉬지 않고 무공을 익혔다.
틈틈이 재료들을 끌어모아 만들 수 있는 독은 다 만들었다.
전각에 틀어박혀서도 항상 가문 내부의 일에 귀를 기울이며 정보를 끌어모았다.
그러면서도 전각 내에 있는 독물학에 대한 서적을 모두 탐독했다.
독.
계획.
그리고 무공까지.
전생처럼 이용만 당하다 처분당하지 않으려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본격적으로 이 창고를 쓰기 시작한다면 세상을 탐하기엔 부족해도 소가주가 되기에는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좀 설렁설렁해도 되지 않을까?
“암, 그래도 되지.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으니 일단 좀 누워서…….”
“공자님! 슬슬 가셔야 합니다!”
“……쉴 수가 없겠네.”
하아, 귀찮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누워서 뒹굴뒹굴하고 싶었지만, 슬슬 시간이 다 되어가니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순 없었다.
“곧 나갈게!”
빠르게 발판을 가져와 창고 가장 왼편, 위쪽에 있는 작은 병 하나를 챙겨 밖으로 나가자 대기하고 있는 삿갓을 쓴 무인.
“생일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우리 전각에 없어서 안 될 소금 같은 존재.
내 유일한 하인 겸 유일한 호위인 천일염이었다.
“그래, 고마워.”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천일염이 대뜸 건네주는 물건을 건네받자, 웬걸 보자기에 싸인 작은 야명주였다.
“야명주?”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 빛나는 돌.
빛의 세기가 강할수록 귀한 물건인데, 아주 미약하게 빛나는 걸 보니 그렇게 값나가는 상등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품이라도 비싸건 매한가지.
“공자님이 평소에 야명주가 가지고 싶으시다고 그렇게 찾으셨잖습니까.”
“아니, 그렇긴 한데…….”
유심히 일염이가 건네준 야명주를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내가 원하던 야명주는 아니었다.
내가 야명주가 가지고 싶었던 이유는 딱 하나.
그건 바로 몇몇 야명주가 끊임없이 방사능을 내뿜어서였다.
독공을 익히는 사천당가.
만약, 하루 24시간 동안 피폭당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숨만 쉬어도 강해진다는 뜻.
방사능이 나오는 야명주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귀찮게 수련할 필요 없이 누워만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뭐, 안타깝게도 일염이가 건네준 야명주에서는 방사능이 나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간만에 힘 좀 썼습니다.”
왼 손목이 뻐근한지 매만지는 천일염.
누가 봤다면 어디 중소 문파 하나라도 털고 온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사천의 노름판을 휩쓸고 왔다는 걸 알기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마워. 요긴하게 쓸게.”
지금 당장은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일염이가 애써서 구해 온 것이다.
잘 챙겨놔야지.
“그런데 공자님. 그 병은 뭡니까?”
야명주를 한편에 놓으면서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병을 꼭 쥐고 있자, 호기심이 동한 듯 쳐다보는 천일염.
“이거? 흠…….”
이걸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하나?
한참 동안 고민해 봤지만, 현대의 지식으로 만든 독에 대해 설명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잘 나오지 않는 대답.
이내 고민하는 것조차 귀찮아져서 그냥 대충 대답해 줬다.
“날 가주로 만들어줄 신비한 묘약.”
“예?”
“대충 그런 게 있어.”
* * *
천하제일독가(天下第一毒家), 사천당가(四川唐家).
독과 암기를 사용하며 정파와 사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원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무림 세가.
당씨 혈족으로 이루어져 독에 대한 비밀을 철저히 지켜내며 한때 천하제일세가로 불렸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천 년 넘게 지켜지는 비밀은 없는 법.
당가가 날아오르기 시작하자 위협을 느낀 대문파들은 독곡의 인원을 불러들이고, 당가의 사람을 회유하며 독에 대한 비밀을 파헤쳤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점차 흐르자, 대문파들은 당가를 상대할 때마다 어떤 독을 가지고 나가던 대처가 잘되어 있었고, 제일 강력한 무기를 잃은 당가는 전전긍긍했다.
암기로라도 대항하려 했으나, 독이 없는 암기는 그 위력이 반감되었고, 그렇게 비밀이 없어진 당가는 점점 무력해지며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배합을 만들며 대처하고 있었지만…….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지.”
이쪽이 연구를 늘린다면 상대방도 연구량을 늘리면 그만.
당가에서 쓰는 방법을 저쪽에서 모를 리가 없었으니 당가의 위상이 추락하는 건 예정된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 없는 독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도 앞으로 백 년은 가지 않겠습니까? 당가주의 상재가 참으로 뛰어나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곳에 왔겠지. 허나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구나.”
“왜 그러십니까?”
“하필 폐품의 생일에 초대받았잖느냐.”
폐품(廢品).
못 쓰게 되어버린 물품을 이르는 말.
사람에게 붙이기엔 심하다고 생각되는 별명임에도 사천당가에는 폐품이라 불리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당가의 사람임에도 독을 두려워하다 못해 기절했고.
가문에서 넉넉하게 돈을 줌에도 돈 귀신이 붙었는지 악착같이 돈을 모으려 들었으며.
그러면서도 쓸모없는 물건이나 망가진 잡동사니를 사는 데 돈을 아낌없이 쓰는.
그야말로 폐품을 모으는 폐품.
그게 바로 나.
삼 공자 당지천이었다.
“거, 남의 생일에 뒷담화를 참 요란스럽게도 까네.”
폐품이라고 부르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대부분 별 내용 아니었다.
어느 가문의 자제에게나 있을 법한, 그리 모나지 않은 성격들.
그런데도 이렇게 악의적인 별호를 붙인 건 당가의 직계임에도 독을 먹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든가, 아니면 누군가가 소문을 부풀려서일 거다.
물론, 그 평가도 오늘이면 끝이겠지만.
“다른 공자들 생일 땐 연락 한번 없더니 폐품의 생일에 초대하는 건 날 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렇습니까?”
쫑알쫑알 쉬지 않고 험담을 이어나가는 손님들.
손님으로 왔으면 말조심해야 하는데 대놓고 폐품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저들의 수준을 엿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손님으로 온다는 것 자체가 당가의 입지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손님으로 온 자가 말을 저리도 함부로 하다니, 저자의 수준도 알 만하군요.”
불편한 기색으로 손님들에게 다가가는 천일염.
그들의 부주의한 언행에 대해 따지려는 듯했기에 일염이를 만류했다.
“뭐, 됐어. 틀린 말도 아니잖아.”
“공자님…….”
“대놓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름만 어디 적어놔.”
나중에 내가 가주가 되면 누워서 새끼발가락만 까딱거려도 치워 버릴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지금 귀찮게 건드릴 필요가 있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어, 귀찮은 건 딱 질색이거든.”
안 그래도 오늘 귀찮은 일이 참 많았다.
생일의 주인공인 만큼 바쁘게 움직여야 했고, 무엇보다 오늘은 금독령이 풀리는 날.
음독(飮毒).
독을 마시는 일.
전생에서는 미치지 않고는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독공을 익힌다는 상징성을 지닌 행사.
그리고 내가 본격적으로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행사.
그게 바로 오늘 준비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 삼 공자가 음독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불가. 처음 독을 봤을 때 기절했다던데 가능할 리가 없잖느냐.”
“그래도 아예 가망이 없진 않겠죠?”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근데 왜 그러느냐? 설마 너는 그 폐품이 음독할 거로 생각하는 것이냐?”
“그게…… 오기 전에 내기를 하나 했는데 ‘삼 공자가 음독한다’에 걸어서 그랬습니다.”
“쯧쯧, 필시 배당이 높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겠구나. 그게 돈을 땅바닥에 버리는 일인지도 모르고.”
물론, 저 손님들처럼 내가 음독을 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당지천이 독을 무서워하고 보자마자 기절한 건 사천 내부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증인도 아주 많은, 뜬 소문이 아니었기에.
‘뭐, 그래서 더 좋은 거지만.’
자고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듯이, 기대가 없어야 놀람도 큰 법.
오늘 내가 음독한다면 그간 깔려 있던 인식을 단 한 번에 뒤집어 버릴 수 있을 거다.
오롯이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려야 하는 날.
괜히 일을 벌여서 다른 소문에 내 활약이 덜 알려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
만에 하나라도 괜히 다른 사건에 묻혀 버리기라도 한다면…….
“으으, 상상만 해도 끔찍해.”
그만큼을 만회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직접 발로 뛰어야 할 거다.
이는 당연하게도 앞으로 슬렁슬렁 지내려는 내 계획과는 정반대되는, 아주 끔찍한 일.
“가자, 일염아.”
그러니 저들을 눈감아주고 넘어간 대신 부디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조용히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자님. 다소 불쾌하셨을 텐데 잘 참으셨습니다.”
“뭘, 괜히 소란 일으켜서 좋을 건 없으니까.”
“정말, 아까 꺼내신 신비한 묘약만 아니었으면 벌써 철이 든 줄 알 뻔했지 뭡니까.”
제 딴에는 웃자고 한 소리겠지만, 상당히 거슬리는 발언.
“거, 진짜라니까?”
“하하하, 그럼요. 공자님이 만드신 건데 진짜겠지요.”
마치 ‘동심은 지켜 드리지요’라고 하는 듯해서 빈정상했다.
“뭐, 믿기 싫으면 믿지 말고.”
“공자님. 전 믿는다니까요?”
“아니, 안 믿어도 괜찮다니까?”
괜히 서운해진 탓에 발걸음을 바삐 놀려 먼저 나가자, 그 앞을 가로막는 듯 날아오는 무언가.
-팅!
반짝이며 아주 청량한 소리를 내는 것이 참으로 시원시원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공자님.”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선 천일염이 조심히 그 물체를 들어 올려 정체를 확인하자, 나는 곧바로 뒷목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냐면 일염이의 손에 쥐어진 것이 이 중요한 날.
그토록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사고를 만들기에 아주 부족함이 없는 물건이었기에.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당가에 은수저를 들고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