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학사환생 169화
책을 한가득 안고 걸어오던 학사 하나가 천마를 보고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천마의 정체를 알아차려서가 아니었다.
단지 천마의 존재감에 짓눌린 것이다.
학사는 떨어진 책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름 모를 학사를 향해 무림맹주 진무극이 손짓했다.
“나가보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학사가 머뭇거린 끝에 그곳을 빠져나갔다.
진무극이 자신의 기세를 누그러뜨리는 것을 보고도 천마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과연 마교를 이끄는 수장답군.”
진무극은 천마의 강함을 순순히 인정했다.
천마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럼에도 강렬한 인상을 받은 진무극이었다.
동시에 천마에게선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익숙함도 느껴졌다.
‘묘한 느낌이군.’
사실 지금까지 천마의 존재를 두고 무림맹 수뇌부에서 수많은 추측이 오갔다.
무림맹주와 대등할 거라는 조심스러운 예측에서부터.
천마는 상징적인 존재이며 마교 내에서 공석일 거라는 그럴듯한 추측까지.
하지만 눈앞에서 직접 본 천마는 상상력이 무의미한 존재였다.
자타공인 당대 무림 최강자 진무극이 위기감을 느낄 만큼.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승패를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계산이 서지 않는 상대는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좋지 않아.’
계산이 서지 않으면 생각이 많아지기 마련.
진무극은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가볍게 비워냈다.
“무념무상. 좋지. 좋고말고.”
천마는 진무극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스멀스멀.
천마의 전신에서 기운이 흘러나와 뱀처럼 진무극의 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조금 전 학사를 겁박했던 기운과는 차원이 달랐다.
쉽게 떨쳐내기 힘들었다.
꽈아앙!
간신히 천마의 기운을 떨쳐낸 진무극의 표정이 씁쓸했다.
벽을 넘어 마지막 계단을 오르지 못한 자신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진 그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미 마지막 계단에 도달한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그대는 마지막 계단을 올랐군.”
진무극의 목소리에 수많은 감정이 묻어났다.
초연하려 애쓰는 얼굴 뒤에 가려진 부러움과 질투.
진무극은 그런 감정들까지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인정하지. 내가 지금까지 위선자였음을.”
자신은 평생 남을 시기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진무극의 마음가짐이 곧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진무극이 질투를 느낄 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닌 존재를 만나지 못했던 것뿐.
“내 실력을 보고 싶다고 했었나.”
“그랬지.”
“보여주겠네.”
진무극은 이미 천마가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올랐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쿠구구구궁!
장서각 바닥을 타고 퍼져나가는 진기의 고고한 흐름!
천마가 처음으로 눈매를 좁혔다.
“설마…….”
천마는 진무극의 실력이 자신 아래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마지막 계단에 오르지 못했음을 알아봤던 것.
하지만 지금 눈앞의 진무극은 한층 달라진 상태였다.
물론 갑작스러운 성장일 리는 없다.
지금까지 쌓이고 쌓인 노력의 결과물일 뿐.
그릇에 차기 시작한 물이 언젠가는 흘러넘치듯.
지난 수련의 성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천마는 오히려 미소 지었다.
“재미있군.”
천마가 진각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쾅!
천마의 발밑에서 시작된 기운이 맹렬하게 다가오던 진무극의 기운과 충돌했다.
서로의 수준에 크게 차이가 없기에 두 개의 기운은 소멸되지 않고 어마어마한 파장을 만들어냈다.
장서각의 모든 책장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수천수만 권의 책들이 펼쳐지는 장관 속에서 진무극과 천마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작하지.”
다음 순간.
진무극과 천마의 신형이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 * *
천신우는 무림맹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흑마존을 쓰러뜨린 직후임에도 아직 여유가 있었다.
‘만상서고의 깨달음 덕분이겠지.’
만상서고의 지식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색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느낌이랄까.
그렇기에 천신우는 만상서고의 지식을 원형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지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다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진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 예상되는 바.
하지만 진리를 탐구하는데 누구보다 열정적인 천신우에겐 즐거운 시간일 것이다.
‘물론 그전에 마교부터 무너뜨려야겠지.’
서서히 무림맹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천신우는 보았다.
무림맹으로 진격하는 마교의 고수들을.
숫자는 많다고 보긴 힘들었다.
기껏해야 수십.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굉장한 고수들이었다.
그에 맞서는 무림맹의 전력도 막강했지만 희생이 적지 않을 터.
“가볼까.”
천신우는 마교 진영의 후방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뒤다!”
한발 늦게 천신우의 존재를 알아차린 마교 고수들이 돌아섰다.
그러나 천신우는 이미 그들 한복판을 돌파한 후였다.
파파파팍!
천신우가 던진 비수에 당한 그들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저놈부터 죽여!”
또 다른 마교 고수들이 천신우를 덮쳐왔다.
천신우의 쌍장이 허공을 격했다.
꽈앙!
폭발적인 기운에 휩쓸린 마교 고수들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콰콰쾅!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 처박힌 그들의 눈엔 경악만이 가득했다.
“저럴 수가……!”
살아남은 마교 고수들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이미 무림맹 공략은 그들의 뇌리에서 지워진 후였다.
그건 무림맹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무림 전역이 전장으로 됐다는 사실을 아는 그들이었다.
당연히 지원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방패가 되어 무림맹을 수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단 한 명의 지원군이 전황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저자는 분명…….”
“천씨세가!”
“틀림없습니다! 천씨세가 소가주입니다!”
무림맹 진영이 술렁였다.
뒤늦게 천신우의 얼굴을 확인한 마교 고수들이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마교의 최정예들.
당연히 천씨세가 공략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신우가 벌써 이곳에 도착하리라곤 전혀 예상도 못했다.
천신우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무림맹에 가세했기 때문.
“어떻게든…….”
막으라고 외치려던 마교 고수의 목이 잘려 나갔다.
서걱!
명령을 기다리던 고수의 가슴에선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촤아악!
자운검을 뽑아든 천신우는 사신이 따로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베었다.
“지금이다! 총공격하라!”
원래 무림맹은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천신우가 판을 깔아줬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기세가 오른 무림맹 고수들이 마교 진영을 향해 쇄도했다.
그렇잖아도 천신우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은 마교 고수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갔다.
저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전황이 정리되자 무림맹 고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천신우를 찾았다.
하지만 천신우는 이미 무림맹 내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를 막아세우지 못했다.
그저 천신우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경외와 존경이 담긴 눈빛으로.
* * *
무림맹주 진무극의 심복 파천도는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차아앙!
손에 들린 도가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도를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자신은 맹주의 다른 심복들과 마찬가지로 쓰러질 테니까.
그리고 군맹각의 힘없는 책사들도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어림없다!”
파천도가 도기를 날렸다.
스가가가각!
도기가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상대를 덮쳐갔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도 쉽게 도기를 상쇄시켰다.
“……하나도 데려가지 못하겠구나.”
진무극의 심복으로 나름 실력에 자신이 있는 파천도였다.
그런 자신감이 사라진 것은, 진무극이 천마와 함께 사라지고 나서 정체불명의 고수 둘이 등장한 후부터였다.
각기 검과 도를 쓰는 그들은 등장과 동시에 군맹각을 지키던 고수들을 도륙했다.
그들을 막으려던 무림맹주의 심복들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나마 파천도만이 수십 번의 공방을 주고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파천도도 한계였다.
이미 파천도의 온몸은 상처로 가득했다.
바닥에 늘어뜨린 도를 들어올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기만 해도 알아서 쓰러질 만큼 상태가 나빴다.
물론 상대는 파천도가 알아서 쓰러지길 기다려주지 않았다.
솨아앙!
날아드는 검과 도를 파천도는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검은 도처럼 묵직했고 도는 검처럼 경쾌했다.
파천도 혼자선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상대들이었다.
“여기까지군. 다들 미안하오.”
파천도가 죽음을 받아들이며 눈을 질끈 감던 그 순간.
차아앙!
파천도의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설마!’
파천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판단하기에 눈앞의 상대들을 막아낼 실력자는 무림을 통틀어 무림맹주 진무극뿐이었다.
그리고 진무극이 이곳에 와있다는 것은 천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하지만 파천도가 눈을 떴을 때.
그 앞에서 검과 도를 받아치는 젊은 사내는 진무극이 아니었다.
파천도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천신우……!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천신우가 대답 대신 자운검을 내질렀다.
따앙!
파천도가 받아낼 수 없었던 묵직한 검이 젓가락처럼 튕겨져 나갔다.
파천도가 쫓아가지 못했던 경쾌한 도는 천신우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어떻게!”
경악하는 파천도 이상으로 천마의 심복들이 놀랐다.
“대체 네놈은……?”
천마의 수호령인 그들은 팔마존을 능가하는 고수였다.
천마가 어딜 가든 동행하는 수족 같은 존재들이기도 했다.
앞서 그들이 진무극의 심복들을 모조리 제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심 둘이 함께라면 무림맹주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천신우는 그들의 달콤한 상상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너희들은 천마의 수족이겠군.”
사실 천신우는 수호령의 존재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정황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그들이 천마의 수족임은 분명했다.
그들의 실력은 천신우가 쓰러뜨렸던 진마존이나 광마존보다 확실히 위였기에.
하지만 흑마존보다 위라고 할 수는 없었다.
둘이 힘을 합친다면 모를까.
개개인의 실력은 흑마존에 미치지 못했다.
그걸 알기에 천신우는 그들에게서 전혀 새로운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천마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걸 말해줄…….”
채 말을 잇지도 못하고 검을 쓰는 수호령의 목이 잘려나갔다.
다른 수호령이 휘두른 도 역시 두 동강이 났다.
“이런 미친!”
그것이 그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푸욱!
심장을 찔린 그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절명했다.
천신우가 파천도를 돌아봤다.
파천도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지금 천신우가 보여준 실력은 지금까지 파천도가 알고 있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기에.
천신우의 시선이 파천도를 지나 군맹각 군사들에게 머물렀다.
무림맹 총군사 양수천도 보였다.
무림맹의 모든 전략이 만들어지는 군맹각.
전생에 그토록 갈망했지만 학사 진현은 결코 도달하지 못한 곳이었다.
하지만 군맹각 군사들을 바라보는 천신우의 눈빛에 부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천신우는 겁에 질린 군맹각 군사들의 모습에서 전생의 자신을 보았다.
물론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맹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앙!
멀리서 엄청난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천신우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장서각!’
모든 것이 끝나고 시작된 그곳에서 무림맹주와 천마가 싸우고 있었다.
번쩍!
순식간에 천신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앞서 무림맹주와 천마가 사라졌을 때와 똑같은 광경.
천씨세가의 젊은 소가주는 어느새 무림맹주와 천마와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파천도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맹주님을, 그리고 이 무림을 부탁하네.”
천신우를 향한 간절한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