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학사환생 168화
무림맹 총군사 양수천은 좁혀오는 마교의 공세에 대응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한 모습이었다.
감지 못한 머리는 엉망이었고 옷조차 며칠째 갈아입지 못해 똑같은 차림의 그였다.
하지만 양수천의 눈빛만큼은 생기가 돌았다.
무림맹 군맹각 군사들이 세운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무림맹 본진까지 휩쓸 기세였던 마교의 진군은 눈에 띄게 느려지는 중이었다.
“천검단이 적들의 진격을 늦추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입니다!”
“청룡단도 맡은 지역을 사수했다고 합니다!”
“됐습니다! 이제 무림 전역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 마교의 잔당들은 오히려 앞뒤로 협공당할 겁니다.”
무림맹 군맹각의 군사들이 다투어 목소리를 높였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무림맹은 그야말로 저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최악의 경우라도 무림맹 본진이 무너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절대라는 표현은 함부로 쓰지 말게.”
사실 양수천조차 속으론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변은 모두가 방심한 순간에 발생한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끝까지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네. 혹시라도 방어선이 뚫린다면 끝장일세.”
“아시잖습니까. 솔직히 여섯 겹의 방어선을 뚫기란 무리입니다.”
총군사 양수천은 방어선이 펼쳐진 지도를 면밀히 살폈다.
사실 충분히 근거 있는 주장이었다.
무림맹주 진무극이라도 외부에서 방어선을 뚫고 무림맹 내부로 진입하기란 힘들 터였다.
하지만 자꾸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도 안심이 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양수천이 모든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던 그때였다.
“급보입니다!”
다급하게 달려온 전령의 등장에 군맹각의 군사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군사들을 대표해 양수천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마교의 공세가 한층 강해졌다고 합니다!”
“뭣이?”
양수천뿐만 아니라 군맹각의 군사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 반대가 아니고?”
이미 무림맹은 마교의 예봉을 꺾은 상황이었다.
이런 때엔 잠시 공세를 늦추고 전략을 수정하는 것이 정석.
그런데 오히려 마교는 역으로 공세를 강화한 것이다.
자연히 무림맹 군맹각의 움직임이 더욱 부산해졌다.
“무슨 속셈이지?”
“그만큼 마교도 급한 것이겠지요. 놈들이라고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리가 없으니까요.”
평소라면 양수천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부터 줄곧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책 없이 소모전을 벌일 놈들이 아니야.”
철혈성에서도 정면을 흔들고 후방으로 별동대를 침투시켰던 마교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란 보장이 없었다.
“놈들이 무림맹 내부로 침투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물론 다수의 전력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소수 인원을 침투시킨다면 불가능만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현재까지 파악된 마교의 전력 모두를 쏟아붓더라도 서른 명이 한계일 겁니다.”
“서른 명이라…….”
결코 많지 않은 숫자였다.
단급도 아니고 대급도 아니고 고작 세 개의 조를 간신히 채우는 수치.
설령 그들 모두가 굉장한 고수들이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무림맹에도 쟁쟁한 실력자들이 대거 주둔 중이니까.
그럼에도 양수천은 예리한 판단을 내렸다.
“방어선을 더욱 보강하게!”
군사들이 난색을 표했다.
“그랬다간 방아선을 오래 유지하기 힘들 겁니다. 오히려 기존 방어선마저 제대로 가동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섯 겹의 방어선은 그야말로 한계치였다.
물론 인원을 모조리 동원한다면 일시적인 보강이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그걸 계속 유지하기란 불가능했다.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결국은 사람.
아무리 단련된 무림인들이라도 잠도 자지 않고 경계를 설 수는 없는 것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군맹각의 군사들은 무림 전역에서 모여든 수재들.
양수천이 원하는 대답을 바로 내놓았다.
“최대한 쥐어짜 낸다면 닷새까진 가능합니다. 닷새를 넘기면 과부하가 걸려 방어선에 구멍이 뚫릴 겁니다.”
“닷새면 차고 넘치네. 그 기간이면 놈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
양수천이 거슬거슬하게 자란 턱수염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긴 그때.
누군가 군맹각 안으로 들어섰다.
“헉!”
노인의 얼굴을 알아본 군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최소한의 수행원만 대동한 그는 바로 무림맹주 진무극이었다.
양수천이 군사들을 대표해 예를 표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고생들 많네.”
진무극은 양수천으로부터 전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방어선을 보강한다면 정말 뚫리지 않을 자신이 있나?”
“물론입니다. 맹의 무인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맹주님이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실 진무극도 동의하는 바였다.
여기서 방어선을 추가 보강한다면 과연 돌파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 말고는 풍뢰권과 독야행 정도인가.’
무명 모임의 구성원들끼리도 실력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냉정히 판단해 풍뢰권과 독야행 외엔 보강된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는 실력자는 없다고 봐야 했다.
‘예전이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한 녀석이 더 있긴 하군.’
진무극이 떠올린 것은 바로 천신우였다.
‘그 녀석이라면 방어선을 뚫고 이곳까지 당도할 수 있겠지. 그렇다는 것은.’
진무극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마교 교주도 이곳까지 충분히 올 수 있다는 뜻일 터.’
진무극의 시선이 향한 곳은 군맹각의 출입문이었다.
방금 자신이 통과한 바로 그곳이었다.
진무극이야 무림맹주이니 제지 없이 통과했지만 외부인의 출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맹주전만큼이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이곳 군맹각이었다.
그런데도 진무극은 금방이라도 누군가 문을 열고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왔군.”
물론 상대의 기척을 감지한 것은 진무극뿐이었다.
무공을 아예 익히지 않았거나 수준이 낮은 군맹각 군사들은 당연하거니와.
파천도를 비롯한 진무극의 수행원들도 이상 징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두가 의아해 하는 가운데.
드르륵.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비단옷에 장포를 걸친 사내였다.
매처럼 날렵한 체격.
칼날 같이 날카로운 인상.
사내의 나이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았다.
언뜻 보기엔 30대 중반처럼 젊어보였지만.
깊은 눈빛에서 느껴지는 연륜은 노인의 그것과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무림맹에서 가장 고급정보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하지만 누구도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 무림맹주 진무극조차도.
그저 이곳에 난입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상대의 정체를 추측할 뿐이었다.
“여기도 막상 별거 없군.”
사내의 나른한 목소리에 파천도를 비롯한 맹주의 수행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구냐! 이곳이 어딘지 알고!”
차아앙!
검을 뽑아 드는 무림맹 고수들을 보고도 사내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진무극이 물었다.
“구경이라도 나온 겐가?”
“일단은.”
“그럼 가세. 내가 안내해 주지.”
“맹주님!”
“걱정 마시게.”
진무극은 사내와 함께 군맹각을 나섰다.
덩그러니 남겨진 군맹각 군사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총군사님은 저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모르네.”
총군사 양수천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그렇지만 충분히 합리적인 추론은 가능하지. 파천도 대협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밀한 기척의 실력자. 거기에 군맹각의 군사들도 전혀 모르는 얼굴. 그럼 누구겠는가?”
“설마 마교의……!”
“그래. 아마 저자가 마교 교주일 걸세.”
“헉!”
곳곳에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큰일 아닙니까? 당장 맹내 경계령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 그자를 막아야…….”
양수천은 갈등했다.
마교의 명령체계는 절대적이다.
만일 천마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곳까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들어온 천마다.
어지간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선 천마를 막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많은 인원을 동원한다면 무림맹의 방어선이 뚫릴 터였다.
결국 양수천은 욕심을 억눌렀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때도 있지.”
“그 말씀은?”
“맹주님을 믿어보세. 무슨 생각이 있으셨으니 마교 교주와 함께 나가신 것이 아니겠는가.”
양수천은 믿었다.
무림맹주 진무극을.
그리고 진무극을 따르는 고수들을.
“나와 자네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면 되네. 마교 교주를 지원하는 병력이 난입하지 못하도록 방어선을 보강하게.”
양수천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마교에서 공세를 강화했는지.
그들도 양수천과 같은 입장.
무턱대고 무림맹 한복판으로 뛰어든 천마를 뒤따르는 것이다.
“과연 이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고 살아온 양수천으로서도 이번만큼은 전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 * *
“……!”
천신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수라파천대 고수들은 정말이지 귀신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들은 이미 흑마존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흑마존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절대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아예 머릿속에서 천신우의 존재를 지웠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천신우가 그들을 방해해 오니 경악할 수밖에.
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이 이곳에 있다면 흑마존은?”
“……죽었군.”
뒤늦게 흑마존의 시체를 확인한 수라파천대 고수들이 침음을 삼켰다.
흑마존은 팔마존들 가운데 가장 고수였다.
천마 직속의 고수들인 그들마저도 혼자서는 흑마존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흑마존을 천신우가 쓰러뜨린 것이다.
심지어 중상을 입은 모습도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놈을 죽여라!”
수라파천대주가 외치기도 전에 천신우는 이미 움직였다.
“막아!”
명령을 수행할 부하 둘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서걱!
목이 잘려 나뒹구는 부하들을 바라보는 수라파천대주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맙소사! 전혀 보지 못했다.’
이미 천신우는 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수라파천대의 남은 고수들이 일제히 천신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쉭쉭쉭쉭쉭!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합공이었다.
수라파천대주 본인도 부하들의 합공을 받는다면 무사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천신우는 정말이지 엄청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갈대가 흔들리듯 천신우는 가볍게 움직이며 날아드는 검을 모조리 흘려냈다.
쉭쉭!
동시에 천신우의 자운검이 허공을 갈랐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수라파천대 고수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서걱! 서걱!
그들은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수라파천대주가 멈칫했다.
팔이 떨리고 있었다.
손바닥이 흥건했다.
‘두려워하고 있다고? 내가?’
부정하고 싶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수라파천대주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수라파천대 고수들을 모조리 베어버린 천신우가 시야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에도.
‘젠장! 빌어먹을!’
나약한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수라파천대주가 순간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검성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수라파천대주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곳엔 검성이 서 있었다.
“이런 개자식!”
수라파천대주가 피를 울컥 토했다.
그의 가슴을 관통한 칼날이 유난히 붉었다.
한발 늦게 내질러진 수라파천대주의 도는 검성의 귀를 베어내는 데 그쳤을 뿐이다.
“이렇게 죽다니…….”
미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수라파천대주가 숨을 거뒀다.
검성은 힘겹게 수라파천대주를 떨쳐내고는 천신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천신우…….”
결국 자신은 천신우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좌절하긴 일렀다.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의식을 잃은 검성이 바닥에 쓰러졌다.
* * *
천마는 무림맹을 마치 정원 산책하듯 거닐었다.
무림맹주 진무극도.
그를 따르는 절정의 무공을 지닌 수행원들도.
천마의 눈엔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심지어 천마는 식당에 들러 간단한 요기를 하기까지 했다.
독이 들어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무림맹이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지만 분명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진무극이 물었다.
“맛이 어떤가.”
“간이 심심하군.”
숟가락을 탁하고 내려놓은 천마가 홀연히 사라졌다.
“……!”
파천도가 입을 쩍 벌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신법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파천도는 입을 벌리는 것만으론 부족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무림맹주 진무극도 사라진 것이다.
* * *
천마가 다시 나타난 곳은 무림맹 장서각이었다.
장서각을 지키는 무인들 누구도 천마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천마는 그곳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대충 넘기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야 원.”
어느새 뒤따라온 무림맹주 진무극을 돌아보며 천마가 웃었다.
“이런 재미없는 곳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군.”
“소소한 삶에도 행복이 있는 법이지.”
“하하하. 나는 그렇게는 못 살겠더군.”
“그래서 혼자서 예까지 직접 행차한 겐가.”
“혼자란 말은 안 했는데?”
“……!”
분명 천마 외엔 다른 기척을 느끼지 못한 진무극이었다.
“애들 둘 불렀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말고. 맹주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도 괜찮아 보였으니 말이야.”
진무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림맹의 방어선을 뚫고 잠입할 정도의 고수라면 심복들도 감당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어디 갈 생각 말고. 자넨 나를 안내해 주기로 하지 않았나.”
“이미 볼 만큼 본 거 같네만.”
“하하하! 아직 안 본 것이 있잖은가. 여기까지 왔는데 맹주 실력은 보고 가야지.”
탁.
책을 덮은 천마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