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학사환생 166화
독야행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다.
“아쉽구먼. 이런 하늘을 다시는 함께 보지 못한다니.”
무신의 죽음을 전해 들은 독야행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오늘따라 야속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시원하게 비라도 내려주면 좋으련만.”
독야행이 시선을 내렸다.
“그렇지 않나?”
독야행 앞엔 진형을 갖춘 마교 고수들이 서 있었다.
염마존이 직접 지휘하는 병력이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산중턱에 거대한 이동식 건축물이 존재했다.
바로 염마존의 작전실이었다.
드르륵.
작전실 최상단의 창문이 열리며 이동식 의자에 앉은 염마존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이 바로 독야행이구려. 소문은 익히 들었소.”
“그래. 바로 내가 독야행일세. 그러는 그대는 누군가?”
“나는 염마존. 천마신교의 책사올시다.”
“책사라…… 하나만 묻지. 누가 무신을 죽였는지 알고 있는가?”
“물론이오. 대답 못해줄 것도 없지. 무신을 살해한 자는 흑마존이오.”
“흑마존.”
독야행은 그 세 글자를 곰씹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려줄 수 있겠나? 그래준다면 적어도 내 손으로 마교 본산을 무너뜨리는 일은 없을 걸세.”
“크하하하하!”
염마존이 광소를 터뜨렸다.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려. 정녕 당신 손으로 본교의 본산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독야행은 대답 대신 기운을 끌어올렸다.
염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당신이 나 염마존조차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시켜드리리다. 흑마존이 어디 있는지는 죽은 무신에게 물어보시오. 그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후후후.”
콰앙!
창문이 거칠게 닫혔다.
다시 어둠이 찾아든 그곳에서 염마존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항상 모든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흑마존과 상대하는 상황까지도 상정했지.”
흑마존과 독야행의 공통점은 혼자서 단급 조직을 능가하는 무력을 지닌 규격 외의 강자.
하지만 염마존은 자신이 준비한 전술이면 충분히 독야행을 제압하고도 남을 거라 판단했다.
“그럼 시작해 보실까.”
염마존은 작전실에 준비된 석판을 바라보았다.
석판 위엔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들이 늘어서 있었다.
인형들은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표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석판은 전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염마존의 발명품이었다.
인형은 염마존이 준비한 병력을 의미했다.
물론 표적은 독야행이었다.
빠르게 독야행을 압박해가는 병력의 움직임을 보며 생각했다.
따뜻하게 데워둔 차가 식기 전에 이번 싸움이 끝날 거라고.
* * *
“…….”
염마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석판 위의 인형들은 철저히 파괴된 후였다.
그런데도 표적은 무사했다.
염마존이 준비한 전략이 실패한 것이다.
독야행은 마교 고수들이 준비한 진형을 힘으로 박살 냄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다.
콰앙!
이동식 작전실의 벽이 박살 나며 독야행이 안으로 들어섰다.
염마존은 문득 찻잔을 쳐다봤다.
찻잔에선 아직도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구려. 대단하시오.”
“이제 알려주겠나. 내 벗을 죽인 자가 어디에 있는지.”
염마존이 비릿하게 웃었다.
“내 비록 이런 몸이나 명색이 무인이오. 어찌 싸워보지도 않고 굴복하겠소이까.”
염마존은 이미 패색이 짙어진 순간부터 기운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독야행 또한 작전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염마존의 기세를 감지했다.
“과연…… 팔마존에 속할 만한 실력. 만일 몸이 온전했다면 훨씬 지고한 경지에 올랐을 텐데 안타깝군.”
“하하하! 오히려 이런 몸이었기에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곤 생각하지 않소?”
독야행이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군.”
염마존이 양손에 염화를 피어 올렸다.
화르르!
내공으로 일으킨 불꽃이 그의 몸을 불태울 듯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길게 끌지 맙시다. 피차 바쁜 몸들이니.”
독야행은 기운을 폭발시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염마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직도 그런 힘을 남겨두고 있었다니. 요행을 바라긴 힘들겠구려.”
그렇게 말하는 염마존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항상 작전실에 스스로를 가두고 마교의 무림침공을 계획했던 염마존이다.
그러나 그라고 어찌 혈혈단신으로 무림을 호령하는 모습을 꿈꾸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독야행을 마주한 지금.
염마존은 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은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그 희열은 거대한 화염이 되어 독야행을 덮쳤다.
화아아악!
불길은 염마존 일생의 역작인 이동식 작전실을 전소시키고도 모자라 주변일대를 모조리 불태웠다.
하지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염마존은 허탈하게 웃었다.
모든 것을 불사른 불길조차 독야행을 태우진 못했던 것이다.
불길 속에 오연히 서 있는 독야행을 바라보며 염마존이 말했다.
“흑마존은 지금쯤 무림맹으로 향하고 있을 거요.”
사실상의 패배선언이었다.
“당신이라면 흑마존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한 가지는 명심하시오. 지금 당신의 실력으론 절대 지존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염마존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평생을 함께한 이동식 의자에 앉은 채로 숨을 거둔 그였다.
독야행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염마존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흑마존이라…….”
무신을 죽인 원수가 누군지 알아냈지만 독야행에겐 당장 달려갈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조차 결코 쉽지 않은 상황.
‘철옹. 자네의 복수는 천신우 그 아이에게 양보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이미 천신우가 자신을 뛰어넘었음을 확신하는 독야행이었다.
그런 천신우라면 흑마존을 쓰러뜨리고 무신의 복수를 해줄 수 있으리라.
* * *
무림 제13영역.
이곳을 지배하는 남악련은 무림맹과 마교의 전면전이 시작된 이후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까지였다.
동맹체결을 위해 무림맹의 특별사절단이 도착한 것이다.
사절단의 실무자는 바로 제갈휘였다.
그는 젊은 나이가 무색하게 협상과 관련해 실무를 진행해 왔다.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남악련주는 그런 제갈휘를 눈여겨봤고.
직접 동맹체결식의 당사자로 지목한 것이다.
그게 제갈휘가 사절단의 일원으로 남악련을 방문한 이유였다.
“어서 오시게.”
지금까지 중립을 지키며 남악련의 이득을 극대화할 방법을 고심했던 남악련주였다.
하지만 거취가 결정된 지금 그는 태도를 확실히 했다.
애매한 태도는 독이 된다는 판단에 따라 무림맹 사절단을 직접 맞은 것이다.
동맹체결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그러고 보니 제갈 부단장은 천씨세가 소가주와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네만.”
“그렇습니다.”
남악련주는 천신우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천신유는 남악련의 유력문파인 백가장을 제대로 응징했다.
그때만 해도 천신우가 이렇게까지 거물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남악련주다.
“부단장은 예상했나? 천 소가주가 이렇게 되리라고.”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예상이 되는가? 당장 이번 마교와의 전쟁에선?”
제갈휘는 천신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잘 해낼 겁니다.”
“나도 마찬가질세.”
제갈휘는 깜짝 놀라 되묻고 말았다.
“예?”
“천 소가주가 마교와의 전쟁을 종식시킬 거라고 믿고 있네. 그래서 무림맹과 동맹을 체결한 것이고.”
“어째서 그렇게까지…….”
천신우가 마교와의 전면전에서 활약하리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리맹의 내로라하는 거물들을 제쳐놓고 천신우를 가장 주역으로 꼽다니.
그것도 신중하고 냉철하기로 소문난 남악련주가 말이다.
“그냥. 그런 예감이 드네.”
다소 무책임한 대답.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남악련주만이 아니었다.
* * *
“안심하십시오! 저희는 무림맹에서 나왔습니다!”
무림맹의 지원에 고립돼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제갈휘의 친구 모용비도 있었다.
제갈휘와 달리 지원대에 배치돼 직접 전장에서 발로 뛰는 모용비였다.
“여기 물이라도 마시게.”
지원대 선배 고수가 건네주는 물통을 받아든 모용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번엔 간신히 늦지 않았지만 갈수록 힘들어지는군.”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온 마교의 저력은 가히 엄청났다.
이미 수많은 세력들이 마교의 발밑에 무릎 꿇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고 있었다.
“이 전쟁이 끝나기는 할까.”
벌써부터 전쟁에 피로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징조.
그러나 모용비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무림맹의 승리로 끝날 겁니다.”
“그렇게 믿는 이유가 뭔가?”
“천신우. 분명 그 녀석이 해줄 겁니다.”
어안이 벙벙한 선배에게 물통을 돌려주며 모용비가 환하게 웃었다.
“자. 이제 슬슬 일어나시지요. 또 언제 출동명령이 내려올지 모르잖습니까.”
모용비는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부탁한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희망이 된 천신우였다.
* * *
벌써 며칠째.
천신우는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며 무림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쉬지 않고 달려가고 싶었다.
물론 그랬다간 정작 중요한 전투에서 힘을 쓰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급할수록 여유를 잃지 않는 거다.’
다시금 삶의 금언을 상기하는 천신우였다.
그러나 결코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눈으로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무림맹과 마교의 전쟁으로 무림은 빠르게 황폐해져가고 있었다.
전쟁에 휘말린 지역은 물론이거니와.
그렇지 않은 지역도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곳곳에서 약탈이 성행하고 식량과 생필품 가격이 폭등했으며.
일할 사람이 없어진 논밭엔 곡식 대신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최대한 빨리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선 전생의 아픔을 되풀이하고 만다.’
천신우가 기억하는 전생.
무림맹의 패색이 짙어지기 전부터 이미 무림 전역은 황폐해진 후였다.
설령 무림맹이 승리했더라도 최소한 10년은 피해를 복구하느라 씨름했을 터였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이후로도 천신우는 이따금 당시의 악몽에 시달렸다.
그런데 그 악몽이 이번 삶에서도 다시 펼쳐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천신우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 * *
무림맹 본진이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은 커져갔다.
거쳐 가는 곳마다 무림맹 분타들이 철저히 파괴되어 있었다.
마치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자연히 천신우의 손에 입수되는 정보들도 그 빈도가 현격히 줄었다.
무림맹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규모 병력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무림맹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 자들은 마교 교주의 직속 고수들일 가능성이 높다.’
전생에도 마찬가지였다.
마교는 치밀한 계략과 철저한 준비기간을 거쳐 무림 진출의 발판을 놓았다.
그리고 팔마존들이 차례로 출격해 무림 전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고 때가 되자 천마의 직속 고수들이 무림맹 본진을 공격했다.
‘내가 살해당한 것도 바로 그때였지.’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해 몇 년이나 앞당겨졌지만 정황은 유사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천마 직속 고수들은 무림맹 본진을 향해 그물망을 조여가고 있을 터였다.
‘늦지 않아야 한다.’
분명 무림맹주 진무극은 강자다.
진무극의 심복들 역시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실력자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결국 전생에서 마교에 무릎 꿇었다.
유일한 변수는 자신의 존재뿐.
그렇게 무림맹을 향해 날아가던 천신우의 신형이 어느 순간 허공에서 멈춰 섰다.
폐허로 변한 거리.
누군가 나뭇가지를 들고 서 있었다.
“저건 설마…….”
틀림없었다.
검성이었다.
그리고 검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막강했다.
하지만 그가 처한 상황은 결코 여유롭지 못했다.
검성과 대치한 흑의인들.
그들을 보는 순간 천신우는 확신했다.
천마 직속의 고수들임이 분명하다고.
‘천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
천신우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착각이 아니었다.
얼음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지금껏 무림맹주를 마주했을 때를 제외하곤 느껴보지 못한 감각.
무신과 풍뢰권마저도 이만한 존재감을 드러내진 못했었다.
꿀꺽.
침을 삼킨 천신우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미 손은 자운검의 손잡이에 올려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