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학사환생 165화
마교 작전실.
염마존은 언제나처럼 그곳에서 무림 전역의 상황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동식 의자에 앉아 보고서를 확인하는 그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앞서 북해빙궁에서 광마존이 죽었을 때보다 훨씬 큰 충격을 받은 그였다.
“철혈성 공략이 실패했다니…….”
마존 셋을 투입하고 만일에 대비해 월야의 고수들까지 파견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죽은 것이다.
물론 철혈성주를 죽이고 철혈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긴 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마교가 밑지는 교환이었다.
마존들은 마교의 일반 무인들과는 다르다.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용도가 아닌 것이다.
“풍뢰권…… 그자가 그렇게 강했단 말인가?”
염마존이라고 무명 모임의 존재를 모르진 않았다.
무림맹에 실력자들의 친목모임이 존재한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위까지 알고 있진 못했던 것.
“이러면 사실상…….”
염마존의 눈이 거대한 지도 위에 머물렀다.
팔마존들의 위치를 나타내는 깃발은 벌써 절반이 부러진 상태.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천씨세가를 급습한 진마존도 연락이 끊어졌다. 도천과 격돌한 검마존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나와 흑마존 둘뿐이다.”
이제는 팔마존이라고 부르기 무색할 지경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절차를 거쳐 새로운 팔마존들이 가려질 터.
하지만 이미 무너진 마교의 자존심은 회복할 방법이 없었다.
‘이 사실이 교주님 귀에 들어가면 끝장이야.’
사실 천마가 지금 상황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전에 만회해야 한다.’
지금까지처럼 몸 편하게 마교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작전실을 이동한다. 내가 직접 전장을 지휘할 것이다.”
염마존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관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염마존이 이동식 의자에 착안해 만든 이동식 작전실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흑마존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군.”
흑마존이 무신과 충돌할 예정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었다.
천마 다음으로 강한 흑마존.
도제와 더불어 무림맹의 든든한 기둥인 무신.
제3자 입장에서 보자면 염마존은 흑마존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흑마존의 강함은 정말이지 압도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만 봐도 예측은 무의미했다.
결과가 나와 봐야 아는 것이다.
염마존의 시선이 흑마존을 뜻하는 회색 깃발이 꽂힌 곳에 머물렀다.
당장에라도 저곳으로 달려가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무신은 두 눈을 의심했다.
상대 흑마존의 검은 너무나도 빠르고 치명적이었다.
쩌엉!
간신히 받아친 것이 기적으로 느껴질 만큼.
쓰러진 수행원들을 살필 틈조차 주지 않고 흑마존의 검이 연거푸 날아들었다.
쉭쉭쉭!
무신이 검을 눕히며 흑마존의 공격을 받아냈다.
차차창!
무신과 검을 맞대는 흑마존의 표정은 너무도 여유로웠다.
반면 무신은 매 순간순간이 극적으로 다가왔다.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인데 벌써부터 온몸의 피가 곤두섰다.
불쑥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쓰러진 이들에게.
그리고 자신을 걱정한 손녀 채은수에게도.
그때 손녀의 말을 들었더라면 흑마존과 마주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무신은 이내 미련을 훌훌 털어냈다.
‘웃기지도 않는군. 내가 고작 요행 따위나 바라고 있다니.’
상대는 마교의 고수.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부딪쳤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무신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채채채채챙!
흑마존의 검을 받아내는 무신의 움직임도 한결 가벼워졌다.
경쾌한 느낌에 기대 무신이 더욱 기운을 끌어올렸다.
감각의 영역이 확장되며 사방 일대의 모든 정보가 들어왔다.
거기서 무신은 의아함을 느꼈다.
팔마존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당연히 수많은 부하들을 거느리는 것이 상식.
하지만 흑마존은 혼자였다.
“어째서……?”
의문에 답해주는 대신 흑마존이 검을 뿌렸다.
솨아악!
“……!”
무신이 눈을 부릅떴다.
기운을 힘껏 끌어낸 자신과 달리 흑마존의 기도는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뻗어진 흑마존의 검을 막아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공의 많고 적음을 떠나 검법 자체에서 밀린 것이다.
다음 순간.
흑마존의 검이 지금껏 보지 못한 궤적을 그리며 무신의 검을 밀어냈다.
자세가 흐트러진 무신의 가슴으로 흑마존의 검이 날아들었다.
무신은 검을 회수할 새도 없이 곧바로 일장을 날렸다.
파앙!
무신의 일장은 지면에 일직선의 거대한 흔적을 남기며 날아가.
꽈아아아앙!
숲에 가공할 충격을 선사했다.
하지만 정작 무신은 무너진 숲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허공에 머물렀다.
방금까지 흑마존이 있던 곳이었다.
무신의 일장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회심의 일격을 피해낸 흑마존은 무신의 뒤에 있었다.
흑마존도 무신도 서로를 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서로의 기운을 느꼈을 뿐이다.
이윽고.
저벅.
먼저 걸음을 옮긴 것은 흑마존이었다.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본다거나 하지도 않고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방금까지 무신과 일전을 벌이던 상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흑마존이 장내를 벗어나는 찰나.
무신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갈라진 배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어르신!”
그를 부축하는 심복 무영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작게 들렸다.
“쫓아!”
“절대 살려 보내지 마라!”
한발 늦게 흑마존을 추격하는 소리도 들렸다.
무신이 말릴 새도 없이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솨악!
그게 끝이었다.
숲은 고요했다.
흑마존의 발소리도. 쫓아간 호위무인들의 목소리도.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처절한 적막 속에서 무신이 힘겹게 입을 뗐다.
“거기…… 누구 있는가.”
“무영이 여기 있습니다! 하명하십시오!”
무신의 수하로 수많은 임무를 수행해온 무영이었다.
무림맹 모집시험에 잠입한 마교 간자를 천신우와 함께 상대한 바로 그였다.
무신은 그런 무영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무신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없네.”
무영이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수아에게 이 말을 전해주게.”
무신은 마음속으로 말을 고른 끝에 말했다.
“잘해낼 거라 믿는다고.”
여러 의미가 담긴 말에 무영이 울컥했다.
“다른 전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천신우…….”
“천신우라면?”
“그를 만나 전하게…….”
무신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끝내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무신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도제와 더불어 무림맹의 권력을 나누던 실력자치고는 너무도 허망한 최후였다.
무신의 죽음을 확인한 무영이 시신을 부둥켜안고 절규했다.
“어르신……!”
흐느낀 것도 잠시.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억지로 눌러두며 무영이 몸을 일으켰다.
마냥 슬퍼할 때가 아니었다.
무신과 죽은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무영의 핏기 없는 입술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필코 전하겠습니다.”
* * *
비보를 듣고 달려온 채은수와 무신궁 고수들을 기다린 것은 무신의 시신이었다.
“아아…….”
채은수가 탄식을 흘리며 시신 앞에 무릎 꿇었다.
그녀의 어깨가 한없이 떨렸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한 그녀다.
하지만 무신의 죽음이 그들의 죽음과 같을 수는 없었다.
채은수에게 무신은 하나의 세상이었다.
당연히 무신의 죽음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그녀에게 안겼다.
물론 무신궁 고수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무신을 존경하고 따라온 그들이기에.
숙연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애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의외로 무신의 손녀 채은수였다.
“무영.”
“말씀하십시오.”
“조부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있나요?”
“잘해낼 거라 믿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영의 입에서 나온 천신우의 이름.
채은수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조부의 죽음으로 감정마저 잃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뿐인가요.”
“그렇습니다.”
“알겠어요.”
채은수는 결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조부님의 정식장례는 미룰 것입니다. 조부님의 원수를 반드시 찾아내 복수하고 마교를 완전히 무너뜨릴 때까지.”
채은수의 목소리는 평소 이상으로 차분했다.
하지만 속마음마저 그렇진 않았다.
무신의 시신을 수습하고 처소로 돌아온 그녀는 힘없이 쓰러졌다.
남들 앞에선 애써 숨겼던 눈물이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흐흑. 할아버지…….”
어째서 더 강하게 말리지 못했을까.
밀려드는 때늦은 후회에 채은수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울었다.
무신이 사무치도록 그리웠고 그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상실감을 채워줄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천 공자…….”
그러나 천신우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아버지의 복수다.
직접 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했기 때문일까.
처소를 나서는 채은수의 표정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슬픔 대신 그녀의 눈동자를 채운 것은 복수심이었다.
채은수의 눈빛이 복수심으로 조용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의식을 잃은 며칠 동안 벌어진 일들을 뒤늦게 확인한 천신우는 개탄을 금치 못했다.
가장 충격은 무신의 죽음이었다.
‘이럴 수가…… 무신 어르신께서 돌아가시다니.’
도제가 팔을 잃고 도천의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는 소식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
그만큼 충격이 심했다.
‘내가 이런데 채 소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겠군.’
그러나 천신우는 채은수를 찾아가 위로할 생각이 없었다.
죽은 무신도.
그리고 채은수 역시도 그러길 바라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천신우는 마음을 다잡았다.
‘비록 상처뿐인 승리지만 철혈성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마교는 철혈성 공략에 실패했다고 이번 침공을 멈출 생각이 없다.’
마교의 진격 경로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분명 전생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변하지 않았어. 결국 마교는 무림맹 본진을 노릴 생각이다.’
이제 천신우에게도 무신처럼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왔다.
무림맹 본진과 마교 본산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마교 본산이 추정되는 지역으론 독야행 어르신만 향한 상황. 역시 무림맹부터 막고 봐야겠지.’
천신우의 선택은 무신과 동일했다.
‘그나저나 무신 어르신을 살해한 놈이 누구지?’
정황상 팔마존의 소행이 유력했다.
‘설마…….’
천신우는 여기서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전생에서 자신을 죽인 마존이 무신을 살해했을지도 모른다고.
가능성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만일 예상대로라면 전생의 복수와 무신 어르신의 복수를 동시에 할 수 있겠군.’
무신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천신우는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환골탈태에 이어 만상서고의 지식까지 완전히 흡수한 지금.
천신우는 완전무결에 한없이 가까워진 상태였다.
‘물론 어떻게 될지는 지나봐야 알겠지. 일단 무림맹으로 간다.’
때마침 시비 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가주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처소를 나선 천신우가 향한 곳은 천씨세가 정문.
그곳엔 천신우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천씨세가 고수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도열해 있었다.
당연히 가주 천무흔과 동생 천신혁도 함께였다.
“형님! 보중하십시오!”
“너도 다치지 말고.”
천신혁과 작별인사를 나눈 천신우가 가주 천무흔을 돌아보았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많은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다녀오너라.”
천무흔의 진심이 담긴 한 마디.
천신우도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