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학사환생 162화
가공할 기운을 뿜어내며 빠르게 풍뢰권에게 접근해 온 것은 마교의 고수들이었다.
하나같이 풍뢰권의 상태가 정상이더라도 상대하기 쉽지만은 않은 실력자들.
검은 피풍의로 몸을 감싼 그들은 가슴에 피처럼 붉은 표식을 달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천마 직속의 천마혈검대 소속임을 증명하는 표식.
천마혈검대 고수들은 마치 상공에서 시체를 내려다보는 까마귀처럼 성벽 위에 내려섰다.
실력뿐만 아니라 신중함까지 갖춘 그들이었다.
차라리 무작정 달려들었다면 작은 희망이라도 걸어볼 수 있었으련만.
풍뢰권은 제자를 위한 마지막 안배마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점점 눈앞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죽을 때가 되면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지만.
풍뢰권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제자의 모습이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육체를 지녔으나 활용하는 법을 모르는.
누구보다 미련하지만 동시에 순수한.
제자의 한심함에 뒷목을 잡은 적도 많았다.
여러 면에 두루두루 뛰어난 천신우와 비교했던 적도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제자 놈은 기억하긴 할까.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네놈이 자랑스러웠다.’
다음 순간.
풍뢰권의 손에서 술병이 툭하고 떨어졌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엔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만이 맴돌 뿐이었다.
* * *
권왕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철혈성 내부를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사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쯤은 그도 안다.
사부가 일부러 술을 구해오라는 구실로 자신을 보냈다는 사실도.
그럼에도 권왕이 사부의 지시에 따른 것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사실 평생 주먹 휘두르는 법밖에 배우지 못한 권왕이다.
사부의 목숨을 구할 방법을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혹시 아는가.
실력 있는 의원이라면 사부를 살려낼 수 있을지.
하지만 아비규환의 장으로 변해버린 철혈성에서 의원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다.
“제발 누가 좀……!”
절망한 권왕이 목 놓아 울부짖던 그때였다.
스윽.
권왕 앞에 술병을 허리춤에 찬 노인이 나타났다.
검을 신주단지처럼 품에 안은 청년과 함께.
그들은 검신과 검귀였다.
철혈성에 마교의 전력이 집중된다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그들이었다.
“네 녀석은 분명 풍뢰권의 제자였던 걸로 기억한다만. 네 녀석 사부는 어디 있는 게냐.”
검신의 물음에 권왕이 손짓, 발짓을 동원해 풍뢰권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검신이라면 풍뢰권을 살려줄 수 있지 않을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하게 잡담 따위 나눌 시간이 없겠구나. 먼저 가마.”
나직이 중얼거린 검신의 신형이 스륵 사라지는 순간.
“저기다!”
그곳에 일단의 마교 고수들이 나타났다.
물론 그들에겐 재앙이었다.
권왕도. 검신의 제자 검귀도.
꽈앙!
울분을 토해내듯 권왕의 주먹이 마교 고수의 가슴을 박살 냈다.
질세라 검귀의 검이 철컥 뽑혀 나오며 마교 고수들을 도륙했다.
순식간에 장내의 적들을 몰살시킨 권왕이 심장이 터져라 달리기 시작했다.
* * *
툭.
천마혈검대주는 풍뢰권의 손에서 술병이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빙그르르 돌며 천천히 떨어지는 술병은 한 시대를 풍미한 무인의 인생을 보는 듯했다.
나직한 탄성이 천마혈검대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굉장하군. 무림맹주 말고도 무림맹에 저만한 강자가 있었던가.”
천마혈검대는 염마존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몇 안 되는 조직 가운데 하나였다.
오래전에 폐관에 들어간 천마가 부여한 단 하나의 임무를 지금까지 수행 중인 그들이었다.
또한 개개인이 팔마존과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는 무력을 지닌 실력자들이기도 했다.
그런 조직의 수장인 천마혈검대주가 보기에도 풍뢰권의 무력은 인상적이었다.
“저자의 손에 혈마존과 살마존. 그리고 독마존까지 죽은 듯합니다. 비록 철혈성주의 희생이 있었다고는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마존 셋이 한날한시에 같은 상대에게 죽는다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게다가 마교가 입은 피해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북해빙궁에서 천신우의 손에 죽은 광마존까지.
무림침공을 시작한 이래 팔마존들 가운데 절반이 죽은 것이다.
지금까지 마교가 무림침공을 준비하면서 입은 것보다 훨씬 막대한 손실이었다.
그런데도 천마혈검대주의 표정은 담담했다.
“동요하지 마라. 설령 팔마존 모두가 죽더라도 지존의 행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흑마존을 쓰러뜨릴 자는 현재 무림에 무림맹주뿐. 누구도 대세를 거스르지 못한다.”
천마혈검대주의 시선이 풍뢰권에게 머물렀다.
“……그렇다고 해도 저만한 강자는 확실히 숨통을 끊어놓아야겠지.”
지시가 떨어지자 천마혈검대 고수들이 일제히 풍뢰권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지면 위를 활강하는 그들의 모습은 저공비행하는 매처럼 빠르고 우아했다.
그러나 그들은 풍뢰권에 도달하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
“!”
가공할 기운이 그들의 접근 자체를 차단한 것이다.
스르릉.
검을 뽑아 든 천마혈검대 고수들의 팔이 떨렸다.
그것은 본능이 전하는 경고였다.
그리고 그 경고의 대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슥.
바닥에 떨어진 술병을 집어 든 것은 바로 검신이었다.
술에 취해 항상 흐릿하던 그의 눈빛이 그늘에 잠겼다.
검신은 술병을 손에 들고 오랜 친우 풍뢰권을 바라보았다.
풍뢰권은 언제나처럼 꼿꼿한 모습이었다.
미처 감지 못한 눈동자가 아직도 생생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검신은 그걸 묻는 대신 그저 반쯤 남은 술병을 입에 털어 넣었다.
목이 불탈 듯이 뜨거워졌다.
평생 재물 욕심이 없었던 풍뢰권다웠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값싼 화주만이 곁에 함께했을 뿐이다.
반면 검신은 천룡주를 비롯해 세상의 온갖 진귀한 술들을 즐겨온 주도가.
객잔에서 두 냥만 주면 살 수 있는 화주는 평소라면 결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술이었다.
하지만 지금 검신은 풍뢰권이 남긴 화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넣고 있었다.
검신은 빈 술병을 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메마른 목소리가 검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 인생 최고의 술이군.”
동시에 검신은 진기를 풍뢰권의 몸에 불어넣었다.
풍뢰권의 상태는 이미 최악.
이런다고 풍뢰권이 목숨을 건질 확률이 늘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시간 정도는 벌어줄 수 있으리라.
천마혈검대주가 눈매를 좁혔다.
검신의 임시방편이 끝날 때까지 지켜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하지만 풍뢰권에게 진기를 불어넣는 동안에도 검신에겐 전혀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여러 차례 머릿속으로 상상했지만 그려지는 것은 검신의 검에 베이는 부하들의 모습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응급처치를 끝낸 검신이 오랜 친우를 바라보며 나직이 덧붙였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네. 앞으로의 일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이윽고 검신은 술병 대신 검을 잡았다.
가공할 기세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교를 향한 분노였고 풍뢰권에게 느끼는 미안함이었다.
철혈성에 마교의 공격이 집중된다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밤낮없이 달려왔건만.
한발 늦은 자신을 향한 질책이기도 했다.
“한 놈도 살아서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검신의 폭발적인 기운이 천마혈검대를 향했다.
“……!”
어마어마한 기파에 천마혈검대 고수들이 흠칫 놀랐다.
마교라고 검신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검신이 풍뢰권에 필적하는 고수일 거라곤 전혀 예상 못 했다.
아무래도 무신이나 도제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검신이었기에.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들은 이미 검신의 간격 안에 들어섰기 때문.
그리고 검신은 지금까지 자신의 간격에 들어온 적을 살려 보낸 적이 없었다.
서걱!
검신의 검이 바람을 갈랐다.
목이 잘린 천마혈검대 고수가 검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허물어졌다.
“한꺼번에 친다!”
천마혈검대주가 외치는 순간.
푸욱!
그의 부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검신은 화려한 보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하나씩 적들을 해치웠다.
“……!”
천마혈검대주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렸다.
천마혈검대는 마교에서도 내로라하는 실력자들로 구성된 조직.
비록 팔마존과 산하조직에 비해 인지도가 낮다고 해도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자부심이 지금 철저히 짓밟히고 있었다.
검신이란 존재에 의해.
그 사실을 부정하듯 천마혈검대주의 신형이 검신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이 천마혈검대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권왕이 숨도 쉬지 않고 사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권왕이나 검귀가 힘을 합쳐도 상대하기 어려웠을 천마혈검대를 단숨에 몰살시킨 검신이었다.
그가 익힌 무공들은 한순간에 모든 내력을 쏟아부어 적을 제압하는 방식.
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인 위력을 내는 데는 무명 모임 내에서도 검신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물론 그 여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검신은 몸조차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검신을 부축한 것은 바로 권왕이었다.
“사부는! 스승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대답해 주지 않으면 멱살이라도 잡겠구나.”
실제로 권왕은 사부를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기세였다.
“잠시 작별의 시간을 뒤로 미뤄놓았을 뿐이다.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게다.”
권왕은 크게 충격을 받았지만 애써 이성의 끈을 붙잡으며 물었다.
“정녕 방법이 없습니까?”
“이 지경에 빠진 인간을 살릴 의원이 존재한다면 신의라 불리겠지.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게 뭡니까!”
“유가장의 생명단. 지금으로선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물론 그때까지 버텨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말이다.”
“유가장…… 생명단!”
권왕은 그 두 단어를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시켰다.
물론 권왕은 알지 못했다.
유가장은 이미 마교의 습격을 받아 생명단의 비전이 소실됐음을.
* * *
흔들리는 진마존의 어깨너머로 초저녁 하늘에 커다란 별이 휘청거렸다.
결코 좋은 조짐은 아니었지만 천신우는 애써 불안감을 떨쳐냈다.
지금은 진마존과의 일전에 집중할 때였다.
쉬익!
날아드는 검을 피해 진마존이 가슴을 눕혔다.
동시에 휘둘러오는 검에 천신우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불의의 일격을 당했음에도 진마존의 움직임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천씨세가를 무너뜨려라!”
천신우의 기세를 한풀 꺾이게 만든 진마존이 생존한 마교 고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밀물처럼 밀려든 마교 고수들이 천신우를 지나쳐 천씨세가 내부로 진입하려는 순간.
쏴아아아앙!
천신우의 자운검에서 시작된 폭풍이 그들을 휩쓸었다.
“……!”
“……!”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마교 고수들도.
가주 천무흔을 비롯한 천씨세가 무인들도.
천신우가 보여준 압도적인 신위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마존만이 예상한 얼굴이었다.
처음부터 수하들을 희생양으로 내던져 천신우의 기운을 빼놓을 작정이었기에.
“가라! 전부 쓸어버려라!”
진마존의 명령이 하늘의 뜻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교 고수들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천신우가 서 있는 지점을 넘지 못했다.
천신우는 그야말로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마존은 느꼈다.
천신우가 분명 지쳐가고 있음을.
아무리 승천단의 효과로 내공을 증폭시켰더라도 결국 한계가 있는 법이다.
실제로 강물과 같던 천신우의 내공은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 느꼈을까.
산처럼 쌓인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도 마교 고수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천마신교 만세!”
내공을 쥐어짜 내는 천신우 앞에 인영이 내려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소가주님. 저자들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신중현이었다.
그를 필두로 천씨세가의 무인들이 마교 고수들을 향해 쇄도했다.
“와아아아아!”
천신우의 맹활약으로 기세가 오른 천씨세가 고수들이었다.
반면 마교 진영은 아까보다 훨씬 전력이 약화된 상황.
거의 기울어졌던 전세를 원점으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진마존도 더는 부하들의 희생으로 시간 끌기가 힘듦을 직감했다.
‘이대로 가면 오히려 내가 합공을 당할 판이군. 천씨세가의 저력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물론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다시금 기운을 끌어올린 진마존이 천신우를 향해 쇄도했다.
천신우가 대응하려는 순간.
몸이 휘청거리고 시야가 흔들렸다.
“……!”
자각하지 못했을 뿐.
천신우는 오랜 강행군으로 이미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로 인해 승천단의 부작용인 탈진상태가 훨씬 빠르게 찾아온 것.
천신우의 이상 상태를 알아차린 진마존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거칠게 밀어붙일지.
아니면 증폭환의 부작용으로 천신우가 쓰러지길 기다릴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차차차차창!
천신우와 여러 차례 공방을 주고받은 진마존이 기회를 보아 전력을 칼끝에 집중시켰다.
천신우라고 그냥 쓰러지지 않았다.
마지막 내공을 쥐어짜 내어 자운검에 불어넣었다.
다음 순간.
콰아아앙!
엄청난 충격음이 일대를 강타했다.
분진이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당연히 천신우와 진마존도 무사하지 못했다.
폭발의 여파에 휩쓸린 그들의 몰골은 만신창이가 따로 없었다.
“크윽…….”
폐허로 변한 그곳에서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진마존이었다.
울컥!
피를 토하며 비틀거리는 진마존의 눈에 뜻밖의 광경이 들어왔다.
“저것은……?”
그것은 수백 년에 걸쳐 천씨세가에 숨겨져 있던 만상서고의 마지막 단서였다.
진마존 맞은편에서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천신우 역시 찬란히 빛나는 구슬을 발견했다.
의심은 무의미했다.
두루마리가 빛나고 있었으니까.
‘만상서고의 마지막 단서!’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천신우 입장에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있어 봐야 진마존에게 당할 뿐이기에.
천신우가 이를 악물며 구슬을 향해 몸을 날렸다.
“……!”
구슬이 중요한 물건임을 직감한 진마존 역시 신형을 날렸다.
거의 동시에 천신우와 진마존의 팔이 구슬을 향해 뻗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