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학사환생 159화
독마존은 어려서부터 독에 심취했다.
짐승은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켜가면서 갖가지 독을 연구하고 실험한 그였다.
그럼에도 독마존은 만족하지 않았다.
끝내는 자신의 몸을 독을 배양하는 그릇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만들어진 독이 지금 독마존의 죽음과 함께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고 있었다.
효과는 탁월했다.
쿠웨웨웩!
공기에 노출된 것만으로 사방의 무인들이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지금껏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무이한 독 앞에서 적아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오로지 풍뢰권만이 오연하게 독마존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풍뢰권이라고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입가를 타고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풍뢰권은 이내 몸을 돌렸다.
하나뿐인 제자를 죽게 놔둘 수는 없기에.
* * *
혈마존과 살마존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철혈성 전투는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양손에 도끼를 들고 전장에 난입한 살마존은 그야말로 학살극을 벌였다.
촤악!
철혈성 고수의 얼굴을 긋고 옆으로 돌며 다른 무인의 목을 쳐냈다.
살마존의 도끼는 난공불락처럼 여겨지던 철혈성의 거대한 성문마저 박살 내버렸다.
하늘을 뒤덮은 화살과 암기는 살마존에게 미처 닿지도 못했다.
콰앙!
부서진 성문을 통해 마교 고수들이 밀려들었다.
화살을 막던 둥근 방패를 집어 던지며 그들이 검을 뽑았다.
차아앙!
적들을 바라보는 철혈성 수문장의 표정이 어두웠다.
“막아라! 적들을 성내로 들여보내지 마라!”
“흐흐흐. 고놈 목소리 하고는. 귀청 떨어지겠구나.”
살마존이 냅다 도끼를 집어 던졌다.
휙휙휙휙!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며 날아간 도끼가 수문장의 미간에 정확히 박혔다.
퍼억!
주인 없는 검만이 바닥에 떨어지며 구슬프게 울었다.
“각주님!”
수장을 잃은 휘하 무인들이 눈을 뒤집으며 달려들었다.
살마존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도끼를 들고 전장에 난입하는 모습 때문에 부각되진 않았을 뿐.
사실 살마존의 가장 커다란 장점은 넓은 시야였다.
찰나지간에 철혈성에서 사용하는 전술을 간파한 살마존이다.
“10인으로 이뤄진 조가 조장을 중심으로 일정한 간격을 지키며 진형을 유지하는군. 조에 결원이 생기면 20인으로 이뤄진 대기조에서 즉시 보충하는 식이고.”
살마존의 머릿속에 철혈성의 진형을 파괴할 최적의 동선이 그려졌다.
판단과 동시에 살마존이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주춧돌을 쓰러뜨리면 건물은 와르르 무너지게 마련.
살마존도 같은 방식으로 철혈성의 진형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물론 철혈성 무인들도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성문 안에 시체가 산을 이뤘음에도 그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자연히 마교 진영의 사망자들도 늘어갔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혈마존은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슬슬 내가 나설 때가 됐군.”
혈마존이 공력을 끌어올렸다.
구오오오!
그러자 쓰러졌던 시체들 사이에서 핏물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구슬처럼 맺힌 수천수만 개의 핏방울이 허공에 일제히 떠오르는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혈우를 맞아본 적이 있나.”
혈마존이 밀가루를 반죽하듯 양손의 위치를 바꿨다.
다음 순간.
쏴아아아아!
핏빛 혈우가 철혈성 하늘을 뒤덮었다.
“크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핏방울에 관통당한 철혈성 무인들이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도대체……!”
몸에 생겨난 구멍에서 핏물을 쏟아내며 쓰러지는 무인들.
그들 머리 위로 철혈성주가 날았다.
철혈성주의 손에 들린 도에 푸르스름한 도강이 맺혔다.
차아앙!
날아드는 도강에 맞서 핏방울이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핏방울로 이뤄진 원형의 막이 철혈성주의 도강과 충돌했다.
콰아아앙!
원형의 막이 깨지며 핏방울이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러나 철혈성주의 도강도 상쇄된 상황.
“…….”
도를 움켜쥔 철혈성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존들끼리도 당연히 실력 차가 나리라고 생각했지만.
분명 눈앞의 혈마존은 살마존보다 위였다.
“……네놈이 팔마존 가운데 최고인가?”
철혈성주의 물음에 혈마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혈마존은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
사실 혈마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마존들도 자존심이 세다.
그런 그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최강자가 존재했다.
아마도 천마를 제외하면 마교에서 가장 강할 그를 떠올리며 혈마존이 조소했다.
“어차피 네놈은 내 선에서 정리된다. 괜한 의문 따윈 품지 말도록.”
철혈성주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혈마존의 손에서 핏방울은 화살이 되었다.
쐐애애애액!
일반적인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표적에게 날아간다.
하지만 혈마존의 손에서 방출된 핏빛 화살은 궤적부터가 달랐다.
그야말로 일직선!
최단거리로 날아든 화살이 철혈성주의 옷자락을 꿰뚫었다.
* * *
혈마존이 가공할 무위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시점.
살마존의 학살을 막기 위해 철혈성의 최정예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살마존이 그들을 상대할 이유는 없었다.
마교에도 그들에 필적하는 실력자들이 존재했으니까.
차차차차창!
살마존을 가운데 두고 살벌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살마존은 전혀 개의치 않고 전장을 누볐다.
그런 살마존을 막아 세운 것은 권왕이었다.
마교 고수들은 철혈성의 실력자들을 저지할 때와 마찬가지로 권왕을 급습했다.
하지만 권왕의 저돌적인 돌진을 막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권왕의 초인적인 육체를 보며 살마존이 도끼날을 맞부딪쳤다.
“으흐흐. 네놈 살점은 다지는 맛이 있겠구나.”
살마존의 도끼가 권왕을 향해 내질러졌다.
쌍수도끼의 무궁무진한 변화가 권왕의 전신을 뒤덮었다.
“!”
주먹을 뻗어 맞불을 놓으려던 권왕이 멈칫했다.
그것은 본능이 보내는 경고였다.
지금껏 여러 번의 패배를 경험한 권왕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경고음이 강하게 울린 적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권왕은 경고음을 무시했다.
꽈아앙!
살마존의 얼굴을 향해 내질러진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물론 살마존의 도끼도 권왕의 몸을 다져놓진 못했다.
풍뢰권이 나타나 살마존의 복부에 일장을 쏟아 부었기 때문.
파파파팍!
복부를 가격당한 살마존의 몸이 새우처럼 굽어지며 한참을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볼썽사납게 바닥에 처박히는 일은 없었다.
살마존은 공중에서 가볍게 몸을 빙글 돌며 지면에 내려섰다.
풍뢰권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살마존에게 최소한의 피해밖에 가하지 못한 것이다.
“네놈은…… 설마 독마존이 당한 것이냐?”
살마존의 눈동자가 이채로 물들었다.
독마존의 무력은 분명 무시 못할 수준이지만 팔마존 가운데 상위권이라 보긴 힘들다.
그럼에도 살마존이 독마존을 껄끄러워한 이유는 무궁무진한 독의 활용 때문.
속된 말로 독마존은 뒤끝 있는 상대였다.
아니나 다를까.
풍뢰권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본 살마존이다.
“그럼 그렇지. 독마존 그놈이 그냥 당해줄 놈이 아니지.”
살마존의 태도에 한결 여유가 묻어났다.
“그런 몸으로 나를 막아서다니.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구석에 처박혀서 몸이나 돌볼 것이지.”
풍뢰권은 살마존이 뭐라 지껄이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못난 제자 때문에 말년에 험한 꼴을 보는구나.”
권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풍뢰권이 그를 거둔지 어느덧 해를 넘겼지만 제자라고 부른 것은 처음이었기에.
“지금부터 내가 움직이는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말거라.”
평소와 다른 풍뢰권의 목소리.
아무리 눈치가 없는 권왕이라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권왕의 고집 어린 입술이 열렸다.
“……사부.”
풍뢰권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살마존을 향해 몸을 날렸을 뿐이다.
하지만 풍뢰권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배를 타고 천씨세가가 위치한 제16영역으로 향하는 천신우의 눈빛이 침중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16영역을 감시하는 무림맹 정보원들로부터 연락이 두절된 것을 시작으로.
사실상 제16영역이 외부와 단절됐다.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했다.
마교가 마침내 천씨세가를 향해 칼을 뽑은 것이다.
마교는 풍림화산과 같다.
숲처럼 고요하고 산처럼 묵직하게 몸을 낮추다가도.
때가 오면 바람처럼 빠르고 불길처럼 맹렬하게 움직인다.
아마 이미 천씨세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윽고 뱃머리에 올라선 천신우의 시야에 한수 지역의 정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신우가 직접 무인들을 이끌고 천씨세가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선착장엔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그럼에도 천신우는 알 수 있었다.
안개 속에 도사린 적들의 기척을.
‘부디 늦지 않았기를.’
진심을 담아 소망하며 천신우가 뱃머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한발 늦게 뱃전 위로 화살비가 쏟아졌다.
파파파파팍!
그러나 다음 화살이 발사되는 일은 없었다.
천신우가 육지에 상륙하는 순간.
화살을 쏘아 보냈던 마교 궁수들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그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천신우가 주변의 높은 나무 위로 올랐다.
사방에 안개가 자욱했지만 천신우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윽고 숲이나 바위언덕 등지에 은신한 적들의 위치를 파악한 천신우다.
‘역시 중요한 길목마다 빠짐없이 인원을 배치해두었군.’
마교 추종자들까지 총동원했을 것이다.
이제는 물불 가릴 이유가 없어진 상황이니까.
‘원래 이곳을 지키던 본가의 무인들은 이미 죽었겠군.’
천신우가 잠시 눈을 감았다.
애도는 그걸로 충분했다.
예우를 갖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것은 마교와의 전쟁이 끝나고 할 일이었다.
희생자들도 무엇보다 천신우가 복수해 주길 바랄 터.
‘최대한 빠르게 돌파한다.’
이곳은 천씨세가의 영역.
지리는 눈을 감고도 훤했다.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천신우의 손에서 비수가 날았다.
휙휙휙!
숨어 있던 적들은 비수의 서늘한 날이 몸을 꿰뚫고 나서야 침입자의 존재를 깨달았다.
물론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1차 저지선을 돌파한 천신우는 거침이 없었다.
선착장에서 시작해 역으로 천씨세가의 영역을 거슬러 올라갔다.
외부에서부터 적의 방어망을 돌파하며 아군을 구출하는 방식의 임무는 이번이 처음.
그런데도 천신우는 실수 따윈 하지 않았다.
지금은 실수 하나가 막대한 희생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적들도 천신우의 침입을 알아차렸다.
삐익! 삐이익!
곳곳에서 약속된 호각 소리가 울렸다.
마교의 연락체계가 가동되고 있었다.
쉭쉭쉭!
천신우를 향해 사방에서 암기가 쏟아졌다.
천신우는 피하지 않았다.
자운검을 뽑지도 않았다.
대신 양손을 휘저으며 바람을 일으켰다.
돌풍에 휩쓸린 암기들은 날아든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커헉!”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굳이 생사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그들은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침입자다!”
뒤늦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선처럼 길게 펼쳐져 있던 경계망이 천신우를 향해 좁혀졌다.
“이쪽이다!”
천신우의 이동방향을 예측하고 병력을 집중시킨 마교 고수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천신우는 이미 그곳을 돌파한 후였다.
애초에 그들을 몰살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일단 천씨세가를 구하는 것이 지상과제.
천신우는 그야말로 천씨세가로 통하는 최단경로를 최대속도로 주파하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길목을 막아선 세 명의 복면인들이 보였다.
“방어선을 이렇게 손쉽게 돌파하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이 몸 밀영객께서 직접 상대해 주마. 영광으로 알도록.”
밀영객? 분명 마교 추종자 칠객의 일인이었다.
예전이라면 깜짝 놀랐을 거물.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빠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밀영객과 마교 고수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들의 고개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천신우는 이미 그곳을 벗어난 후였다.
마침내 천씨세가의 정경이 천신우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