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학사환생 158화
유가장에 닥친 위기는 사실 무림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작은 사건에 불과했다.
당장 도천과 무신궁이 마교와 충돌을 앞두고 있었기에.
‘도제가 뜻대로 움직여줘서 다행이군. 만에 하나 뒤통수를 쳤다면 곤란해졌을 텐데.’
이유야 어쨌든 도제의 적극적인 참전을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였다.
‘도제라면 팔마존 하나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지.’
승패를 떠나 마교의 발을 묶어준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물론 가장 커다란 걱정거리는 마교의 본대가 집결하기 시작한 철혈성.
‘마교는 무모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항상 철저하게 계산하고 행동에 나서지.’
전생에도.
그리고 이번 생에도.
마교의 행보는 늘 한결같았다.
언뜻 무모해 보이는 행보도 나중에 알고 나면 분명 이유가 있었다.
이번 철혈성 공략 역시 마찬가지.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면 무림맹도 충분히 대비할 여유가 있다. 그런데도 강행한다는 것은 숨은 의도가 있다는 증거.’
예상할 수 있는 마교의 전략은 둘 중 하나였다.
철혈성을 공략하는 척하고 병력을 우회시켜 다른 곳을 치거나.
아예 무림맹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력을 철혈성에 집중하거나.
‘지금 상황에선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철혈성은 그만큼 전략적 가치가 높은 곳이니까.’
천신우는 잠시 철혈성 일대의 지도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무림맹과 철혈성의 허를 찌르려면 이동경로를 노출시키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규모는 극소수. 그러면서도 철혈성에 유효한 타격을 가할 수 있으려면.’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팔마존 내지는 천마 직속 타격대. 현재 무림맹의 정보망에 따르면 위치파악이 되는 팔마존은 4인.’
나머지 팔마존들 가운데 한 명이 철혈성 공략에 추가로 투입될 가능성이 높았다.
‘예측할 수 있는 공략지점은 역시 후방이겠지.’
철혈성은 천혜의 요새다.
후방과 측면은 접근 자체가 힘들다.
하지만 팔마존들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
‘후방에 팔마존을 상대할 전력을 배치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무림맹도 여유전력이 없다.’
무림맹은 무림 전역을 방어해야 한다.
철혈성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곳에만 전력을 집중시킨다면.
무림맹을 믿고 따르는 다른 세력들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철혈성을 지원하기도 현실적으로 어렵고.’
동선 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 천씨세가도 충분히 습격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사실 이제는 마교에서 언제 천씨세가를 습격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렇게 된다고 해서 천씨세가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진 않겠지만 무한정 버티기도 힘들다.’
현재 시점에서 천씨세가의 전력은 결코 철혈성보다 위라고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풍뢰권과 권왕까지 자리를 비운 상황이니 더더욱 위험부담이 커진 상황.
만상서고의 마지막 단서가 아니더라도 천신우가 천씨세가로 복귀해야 하는 이유였다.
‘결국 돌고 돌아 원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처럼 철혈성 자체전력. 그리고 풍뢰권과 권왕을 믿는 수밖에.
물론 예비전력이 있긴 하다.
무림맹의 정보망에 마교의 추가적인 움직임이 포착되면 검신과 검귀가 지원할 예정.
하지만 제때 도착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후우. 충분히 대비했건만 역시 쉽지 않군.’
원래 7년을 내다본 계획이다.
하지만 여러 변수로 인해 마교의 침공이 앞당겨지면서 천신우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긴 셈.
‘게다가 진사명이 죽었는데도 마교의 계획은 여전히 치밀하다. 분명 진사명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책사가 마교에 존재하는 거겠지.’
그리고 지금의 계획들은 그자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일 테고.
‘일단 최대한 신속하게 천씨세가로 복귀한다.’
유가장을 떠난 천신우가 밤잠도 줄여가며 걸음을 재촉하던 그때.
철혈성 전투는 이미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 * *
철혈성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드는 마교의 병력은 누가 봐도 위협적이었다.
“성주님!”
심복의 다급한 외침에 철혈성주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지금 시점에서 후방으로 대규모 병력을 돌리긴 무리였다.
‘전방엔 대규모 군세. 후방엔 소규모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별동대라. 그야말로 진퇴양난이군.’
그렇다고 후방이 유린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철혈성주는 여러 대안을 고민했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으니까.
풍뢰권.
지금 시점에서 후방을 가장 확실하게 막아줄 적임자였다.
* * *
철혈성 후방으로 침투한 마교 독마존과 부하들은 마치 독소처럼 번져나갔다.
철혈성의 방어기능을 차례로 무력화시켰으며.
저항하는 철혈성 무인들은 물론.
민간인들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으아악!”
“제발!”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람들.
아비규환 속에서 여인 하나가 아이를 안고 달리고 있었다.
그때 여인의 발목에 비수가 날아와 박혔다.
푸욱!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여인은 아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여인에게서 강제로 아이를 빼앗은 마교 고수가 잔혹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은 독마존의 직속세력인 독마궁 소속.
악랄한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들이었다.
아이를 빼앗긴 여인이 절규했다.
“안 돼! 제발 우리 아이만은!”
자기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자식부터 걱정하는 여인의 모습은 애절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독마궁의 고수는 동정심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아이의 목을 움켜쥐었다.
힘을 주면 그대로 목뼈가 부러질 상황.
바로 그때.
그를 향해 날카로운 일격이 날아들었다.
쏴앙!
살기를 감지한 독마궁 고수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나는 찰나.
누군가 벼락처럼 그의 옆구리에 검을 쑤셔 박았다.
푹!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독마궁 고수는 안간힘을 다해 아이의 목을 비틀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그의 수중을 벗어난 후였다.
새롭게 장내에 등장한 철혈성 고수들에 의해.
후방을 교란하는 적들을 막기 위해 급파된 그들은 눈앞의 광경에 침음을 삼켰다.
“잔인한……!”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까지 학살한 마교의 수법은 도적 떼가 따로 없었다.
“천벌 받을 놈들 같으니라고!”
속속들이 도착한 철혈성 고수들 역시 마교를 향한 적의를 불태웠다.
“네놈들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철혈성의 문장이 새겨진 검이 곳곳에서 뽑혀 나왔다.
차아아앙!
“적들을 섬멸하라!”
“와아아아!”
어느새 일대는 마교와 철혈성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뼈와 살이 절단되는 소리.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비명이 그곳을 가득 메웠다.
아수라장 속에서 독마존은 성내의 우물마다 독을 풀었다.
사실 당장의 승패와는 크게 상관없는 행동.
그것은 독마존 나름의 의식이었다.
이윽고 일대의 모든 우물을 맹독으로 오염시킨 독마존이 전장에 합류했다.
스륵.
독마존의 움직임은 마치 유령과 같았다.
어떠한 기척도 없이 철혈성 고수에게 접근한 그가 단도를 내질렀다.
한 뼘 정도 길이의 단도는 독마존의 애병이었다.
두 자루의 단도.
그리고 독.
그것만으로 팔마존의 자리에 오른 그였다.
평소라면 독마존의 단도는 철혈성 고수의 살점을 종잇장처럼 찢어놓았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뼈를 뚫고 들어가 장기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혔으리라.
거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그러나 오늘은 그 찰나의 순간을 비집고 들어온 상대가 있었다.
‘오호라.’
독마존이 단도를 회수하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어가 걸려들었군. 기왕이면 철혈성주 본인이 직접 나타났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너무 욕심이고.’
독마존을 향해 일격을 날린 상대는 바로 풍뢰권이었다.
풍뢰권이 직접 후방으로 내려온 것이다.
사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가 나설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고작 백여 명의 인원으로 후방을 완전히 교란하는 데 성공했다.
그대로 방치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철혈성주가 풍뢰권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렇게 등장한 풍뢰권은 일체의 대화 없이 허공에 주먹부터 내질렀다.
“……!”
독마존이 눈을 부릅떴다.
풍뢰권이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고 생각했건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주먹이 목표지점을 타격하기 직전.
풍뢰권은 보법을 펼쳐 바로 독마존 앞에 나타났다.
일체의 준비과정이 생략된 일격은 불의의 기습이나 다름없었다.
“허!”
풍뢰권의 주먹이 독마존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감히 잔재주 따위를!”
독마존이 일갈했다.
정말이지 몸이 반응해 주지 않았다면 일격에 승부가 갈릴 뻔했다.
반면 예상보다 적은 피해를 입히는 데 그쳤음에도 풍뢰권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풍뢰권이 바닥을 박찼다.
‘이번엔 어림없다!’
독마존이 눈을 빛내는 순간. 풍뢰권의 주먹이 바람을 찢었다.
꽈앙!
그러나 바람마저 찢은 풍뢰권의 주먹도 독마존을 직접 타격하진 못했다.
방금 전처럼 허를 찔렸다면 모를까.
충분히 예상했기에 독마존은 가볍게 풍뢰권의 주먹을 피해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단도의 장점을 극대화한 빠른 일격을 쏟아냈다.
공격과 공격 사이의 간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치밀한 연계!
파파파파팍!
눈부신 공방전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풍뢰권과 독마존이 뿜어내는 폭발적인 기운에 도로가 파헤쳐지고 건물이 무너졌다.
콰콰쾅!
그나마 철혈성 고수들이 민간인을 대피시킨 덕에 추가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격렬한 격돌 이후 독마존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풍뢰권은 독마존이 숨을 돌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달려드는 풍뢰권을 보며 독마존이 이를 바득 갈았다.
“빌어먹을!”
독마존의 단도가 빛을 발하는 순간.
꽈앙!
풍뢰권의 주먹이 독마존의 늑골을 정확히 타격했다.
독마존은 한참을 날아가 건물 벽까지 부수며 처박혔다.
파앗!
풍뢰권은 곧장 독마존을 따라붙었다.
건물 잔해 따윈 문제가 되지 않았다.
권풍만으로 잔해를 모조리 날려버린 풍뢰권의 시야에 독마존이 들어왔다.
독마존은 중상을 입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을 내려다보는 독마존의 눈은 의외로 생생했다.
일부러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풍뢰권을 끌어들인 그였다.
‘대어를 낚으려면 큰 미끼가 필요한 법.’
첫 격돌 직후.
독마존은 풍뢰권의 실력이 자신보다 위임을 깨달았다.
‘놈이 방심하지 않는 이상 내게 승산은 2할 남짓.’
그래서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도박을 택했다.
주먹을 맞아주는 대신, 풍뢰권의 옆구리에 맹독을 바른 단도를 꽂아 넣은 것이다.
풍뢰권 정도의 고수가 고작 독에 즉사할 리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기엔 충분할 터.
거기에 독마존은 비장의 패를 꺼내 들었다.
툭.
아래로 늘어뜨려진 독마존의 손에서 철통이 떨어졌다.
다음 순간.
파파파파파파팍!
철통에서 발사된 것은 독이 묻은 장침이었다.
그것은 백 개의 침에 각각 다른 독이 묻어 있다고 해서 백독침이라 불렸다.
심지어 서로 연쇄작용을 일으키는 독들이었다.
‘한 가지 독이야 내공을 이용해 체외로 몰아낼 수 있지만 백독침에 중독당하면 그것도 불가능.’
지금까지 비슷한 방식으로 강자들을 여럿 고꾸라뜨린 독마존이었다.
하지만 풍뢰권은 지금까지 독마존이 쓰러뜨린 상대들과는 달랐다.
풍뢰권은 중독돼 기혈이 뒤틀린 상황에서도 독마존의 예상을 뛰어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풍뢰권의 소매가 펄럭이며 방출된 장력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장침을 모조리 격추시켰다.
따다다다다당!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
하지만 독마존은 당황하지 않고 다음 행동에 나섰다.
풍뢰권을 향해 날아든 것이다.
날카롭게 찔러오는 단도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파파파파팍!
그에 맞서 풍뢰권이 주먹을 내질렀다.
꽈앙!
풍뢰권의 주먹과 독마존의 단도가 허공에서 서로를 향해 뱀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 동안 주고받은 공방만 수십 차례.
독마존이 눈을 부릅떴다.
“……!”
마지막 순간 풍뢰권의 주먹이 기묘한 변화를 보여주며 그의 가슴을 타격한 것이다.
파파파파파팍!
십여 차례에 걸쳐 이어진 타격!
“크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독마존이 아까보다 훨씬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바로 눈앞에 내려서는 풍뢰권을 독마존이 올려다보았다.
“……어이가 없군.”
독마존의 입가를 타고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고작 이런 곳에서 죽게 될 줄이야.”
죽음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독마존의 눈빛은 생생했다.
“그래도 혼자 가진 않을 것이다.”
남은 내공을 밑바닥까지 쥐어짜 낸 독마존이 일장을 내질렀다.
충격적이게도 표적은 풍뢰권이 아닌 독마존 자신.
콰아앙!
독마존의 육체가 폭발하며 방출된 독이 하늘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