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학사환생 157화
석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텅텅 비어 있는 공간에 오래된 먼지만이 흩날릴 뿐이었다.
마치 이곳까지 급박하게 달려온 무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당했군.”
무신은 깔끔히 인정했다.
마교의 계책에 당했다는 것을.
팔마존 가운데 하나가 무신궁의 제7영역을 침공할 것이라는 첩보가 빗나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마교가 함정을 파고 나를 끌어들였다고 봐야겠지.’
무신의 오판을 탓할 수는 없었다.
원래 남을 속이려면 9할의 진실에 1할의 거짓을 섞어야 하는 법이다.
마교는 그 기본에 충실했다.
의도적으로 정보를 유출시켰고 그로 인한 막대한 피해까지 감수했다.
그렇기에 무신과 무림맹 모두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이만한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이지?’
이번만큼은 무신도 마교의 의도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이럴 때 그 아이가 있었다면 마교의 꿍꿍이를 알아차렸으련만.’
이 순간, 무신이 떠올린 건 천신우의 존재였다.
* * *
“준비됐습니다.”
마교 팔마존의 일인 독마존은 어둠 속에 운집한 마교 고수들을 바라보았다.
원래 무신궁의 제7영역을 습격할 것처럼 움직여왔던 독마존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움직임은 모두 무신과 무림맹을 속이기 위한 사전공작에 불과했다.
독마존의 노림수는 바로 철혈성 공략.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혈마존과 살마존과는 달리.
독마존은 철혈성의 배후를 노릴 계획이었다.
“날랜 놈들만 데려왔겠지?”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가자고.”
철혈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정면엔 무림에서 손꼽힐 만큼 견고한 성벽이 존재했으며.
나머지 삼면을 따라 거친 강물이 흐르는 데다 험준한 절벽이 존재해 접근 자체가 힘들었다.
보통 이런 경우 지형의 유리함을 믿고 경계를 소홀히 하게 마련.
그러나 철혈성은 절벽과 강가에도 보초를 배치해 습격에 대비했다.
괜히 철혈성이 오랜 세월 난공불락의 요새라 불린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모든 방비책도 독마존 앞에선 무의미했다.
“끌끌. 쥐새끼 같은 놈들을 많이도 풀어놨군.”
독마존은 강가에 은신해 있는 철혈성 무인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둠과 갈대밭 따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쥐새끼들 잡자고 직접 손을 쓸 수야 있나.”
쥐 잡는데 쥐약만큼 효율적인 것도 없다.
물론 독마존의 소매에서 흘러내린 것은 쥐약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효율적인 독이었다.
짙은 안개가 강가의 갈대밭을 향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어둠이 드리운 갈대밭.
철혈성 무인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기도비닉을 유지하기 위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언제 마교가 이곳을 습격해 올지 모른다는 것을.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아무리 마교의 본대라 해도 본성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란 불가능하다.’
철혈성의 자체병력에 무림맹 지원까지 더해진 상황.
어지간해선 뚫린다고 보기 힘들었다.
마교 입장에선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을 터.
‘마교가 노릴 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다.’
그걸 예상했기에 철혈성은 평소보다 배후와 측면에 세워둔 보초 숫자를 3배까지 늘렸다.
비상경계령이 해제될 때까지 이곳엔 불철주야 철통경계망이 펼쳐지게 되는 셈.
발밑에 불길한 안개가 깔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몸에 닿는 순간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안개.
위기를 감지한 철혈성 무인이 입을 열어 경고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 달리 목소리 대신 핏물이 터져 나왔다.
쿨럭!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독감이 번져나가듯 사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소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들은 가슴을 고통스럽게 움켜쥐며 갈대밭 위로 쓰러졌다.
죽어서도 감지 못한 눈동자엔 짙은 의구심이 떠올라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보초를 희생양으로 삼은 안개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철혈성 후방초소.
그곳에선 철혈성 단주급 인사가 직접 경계상태를 점검하는 중이었다.
“강가 초소로부터의 연락은?”
“아직까진 이상 없다는 보고입니다.”
“계속해서 주시하도록.”
갈대숲을 감시하던 철혈성 무인들이 쓰러진 건 불과 촌각 전.
이 시점에서 철혈성에서 후방상황을 알아채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평생을 경계임무에 매진한 단주급 인사는 이상현상을 감지했다.
“안개?”
절벽 아래 흐르는 강물 때문에 이곳엔 안개가 끼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 스멀거리는 안개는 분명 평소 보던 것과는 달랐다.
그는 즉시 결단을 내렸다.
“모두 피독제를 복용하라!”
피독제는 독으로부터 몸을 보호해 주는 약이었다.
비록 효과가 일시적이고 가격이 비싸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접촉이나 복용을 통해 중독되는 종류는 물론.
호흡기를 통해 유입되는 독까지도 사전에 차단해 주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피독제를 입에 넣으려던 그는 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질적인 무언가가 배를 헤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푸흐흐. 철혈성에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 있구나. 그래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철혈성 감시책임자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은 바로 독마존이었다.
독을 주로 다루는 그였지만 그렇다고 무력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특히 적의 배후로 잠입해 암살하는 능력만큼은 마존들 가운데서도 최상위권인 그였다.
툭.
독마존은 감시책임자의 시체를 발로 차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첨벙!
강물이 튀는 소리가 났지만 이내 거친 물살에 묻혀버렸다.
독마존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바퀴벌레 떼처럼 검은 그림자들이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철혈성 후방이 함락되는 순간이었다.
* * *
철혈성.
권왕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괴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철혈성주는 불빛에 비치는 권왕의 활약상을 지켜보았다.
이미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권왕은 전혀 지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미쳐 날뛰었다.
마치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강철처럼.
그럼에도 철혈성주는 불길한 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상하군.’
분명 권왕의 활약은 고무적이었다.
철혈성 무인들의 사기는 계속해서 올랐고.
마교가 입는 직접적인 피해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이었다.
‘이런데도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고?’
철혈성주의 시선이 멀리 마존들을 향했다.
혈마존과 살마존.
그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들인지는 안다.
멀리서 대치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릿저릿해질 지경이니까.
그들이 나선다면. 하다못해 그들이 거느린 최정예라도 투입한다면 권왕의 기세를 꺾을 수 있을 터.
하지만 마존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설마……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현실적이었다.
“후방에선 아무 소식이 없나?”
“그렇지 않아도 멸진단주가 경계상태를 점검하는 중입니다.”
철혈성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멸진단주라면 결코 쉽게 뚫리진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마교의 주력은 이곳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철혈성주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후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아라. 당장!”
한발 늦게 무인이 달려와 보고했다.
“후방이 뚫렸습니다! 후방 초소가 모조리 함락당하고 적들이 성내로 난입했습니다!”
철혈성주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적들의 규모는?”
“현재 파악된 바로는 백 명 안팎이라고…….”
철혈성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원래 백 명 정도라면 무시하고 넘어가도 무방한 숫자였다.
당장 후방에 세워둔 보초 숫자만 해도 기백 명에 달했으니까.
하지만 이곳까지 도달했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일 것이다.
오히려 숫자가 적은 만큼 절대강자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둘 중 하나군. 마교에서 지금까지 숨겨둔 패를 꺼냈던가. 아니면 무림맹에서 마교의 움직임을 놓쳤던가.’
어느 쪽이든 철혈성은 최대의 위기를 맞은 셈이었다.
“당장 후방으로 병력을…….”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철혈성주는 보았다.
지금까지 뒷짐 지고 권왕의 활약상을 구경만 하던 혈마존과 살마존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들 뒤로 마교의 본대가 철혈성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 * *
북해빙궁을 떠난 천신우는 천씨세가로 향했다.
마교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된 시점.
천신우의 행보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림맹이 아닌 천씨세가로 복귀하는 것은 만상서고의 마지막 단서를 얻기 위함.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아직은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지.’
이번에야말로 모든 무림인들이 꿈꾸는 만상서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천신우가 방금 전에 입수한 무림맹 기밀문서를 확인했다.
기밀문서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던 전생과는 달랐다.
지금의 천신우에겐 실시간으로 무림맹 기밀문서를 열람할 권한이 있었다.
철혈성 일대의 심상찮은 분위기와 도천의 움직임까지.
무림 전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속속들이 파악해 온 천신우였다.
그리고 지금 천신우의 손엔 유가장과 관련된 문서가 들려 있었다.
‘어쨌든 한 번은 들려야 하는 곳이긴 했지만 이런 상황을 원했던 건 아닌데.’
마교의 별동대가 유가장을 습격할 것이라는 첩보.
천신우의 움직임이 빨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 * *
유가장은 의술로 유명한 문파.
그렇다고 유가장 무인들의 무력이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가장 무인들의 실력은 어지간한 중견문파 무인들보다 나았다.
하지만 오늘 유가장을 급습한 마교 별동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숫자는 불과 십여 명.
그럼에도 그들은 유가장 무인들을 압도했다.
순식간에 유가장 무인 십여 명이 도륙 당했다.
적들의 실력이 심상찮음을 알아차린 유가장주가 이를 악물었다.
“버텨라! 조금만 기다리면 무림맹의 지원병력이 도착할 것이다!”
지금으로선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나타난 장년인은 유가장주의 희망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미안하지만 무림맹의 지원은 없을 것이네.”
“숙부님?”
장년인은 바로 유가장주의 숙부였다.
심지어 그는 유가장주의 딸인 유설화와 함께였는데 그녀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설화야! 대체 우리 설화에게 무슨 짓을!”
유설화는 절명곡 사건 이후 절치부심해 실력이 급상승했다.
그런 그녀가 저리 무력하게 당했다면 아마도 약에 중독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사실을 입증하듯 유가장주의 숙부가 교활하게 웃었다.
“자네 탓이네. 자네가 무모하게 무림맹을 지지한다는 선언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래서 마교와 손잡았다는 말입니까?”
“개죽음을 당할 수야 없지 않겠나.”
장년인의 음흉한 시선이 유설화를 향했다.
그녀는 근방에서 명성이 자자한 미녀.
보는 것만으로 아랫도리가 묵직해질 지경이었다.
장년인의 음흉한 속셈을 알아차린 유가장주가 절규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조카손녀란 말입니다! 핏줄이라고요!”
“그래서 지금껏 참았던 것이네. 하지만 더는 그럴 수가 없군.”
장년인은 의식을 잃은 유설화의 옷자락을 거칠게 찢어버렸다.
“설화야!”
눈이 뒤집힌 유가장주가 장년인에게 달려들었지만 마교 고수들의 움직임이 그보다 빨랐다.
퍼억!
명치를 때려 유가장주를 제압한 마교 고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얌전히 구경이나 하지.”
그들은 소수임에도 여유가 있었다.
유가장주의 숙부가 무림맹의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에서 진상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일 것이다.
“크흐흐흑!”
유가장주가 피눈물을 흘리던 그때.
덜컹!
유가장 내원으로 연결되는 문이 활짝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
의구심을 품던 그때.
푸욱!
마교 고수의 가슴이 꿰뚫렸다.
방금 전에 유가장주를 조롱하던 바로 그놈이었다.
“누구냐!”
소리친 마교 고수의 목이 깔끔히 잘려 나갔다.
순식간에 아홉 명의 마교 고수가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무슨 일인지 파악할 새도 없었다.
그나마 기둥에 등을 비스듬하게 기대고 있던 마교 고수만이 반응했다.
‘다음은 나겠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의 가슴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의 사고보다 상대의 검이 훨씬 빨랐던 것이다.
옆으로 쓰러지는 사내의 눈에 주마등 대신 상대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어느새 그는 유가장주의 숙부 앞에 나타나 있었다.
“가까이 오면…… 크헉!”
유가장주의 숙부가 목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상대는 인질을 잡고 협박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돌아서는 순간.
유가장주는 정말이지 숨이 넘어갈 듯이 놀랐다.
“자네는……!”
일전에 딸을 통해 만나본 적이 있었기에 유가장주는 상대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마교 고수들을 제압하고 유설화를 구해낸 그는 바로 천신우였다.
“첩보를 입수하고 바로 찾아왔습니다만 늦고 말았군요.”
천신우의 눈빛에선 마교 고수들을 쓰러뜨렸다는 우월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유설화를 구했다는 기쁨도 없었다.
희생당한 유가장 무인들을 향한 애도의 감정만이 떠올라 있을 뿐.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모든 감정을 지워낸 천신우가 유설화를 부축해 유가장주에게 인도했다.
“무림맹에서 지원이 나올 겁니다. 마교가 무너질 때까지 당분간 피신해 계십시오.”
열린 문을 통해 걸어나가던 천신우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