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학사환생 156화
북해빙궁의 얼어붙은 대지.
그곳에서 천신우는 오연한 눈으로 사방을 쓸어보았다.
천신우 주변엔 마교 고수들의 시체가 너부러져 있었다.
천신우를 죽이려다가 역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물론 천신우도 더는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
이제부터는 전황을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전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곳곳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백중세.
하지만 천신우의 분석력은 역시 남달랐다.
‘근소한 차이지만 분명 아군의 우세다.’
사실 북해빙궁이나 천씨세가 고수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새롭게 합류한 무림맹 멸악전단이 착실하게 전장을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역시 단주님이시군.’
천신우의 직속상관 멸악전단 단주 심인기.
개인적인 무력도 뛰어나지만 심인기는 무엇보다 타고난 지휘관이었다.
냉철한 분석력. 치밀한 전략. 그리고 공세와 수세를 조율하는 순발력까지.
지휘관으로서 모든 자질을 갖춘 그였다.
그리고 북해빙궁은 심인기의 능력을 발휘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무대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무림맹의 멸악전단과 제23지부 병력이 합류하면서 전황이 바뀐 것이다.
물론 가장 커다란 전환점은 천신우로부터 비롯됐다.
천신우가 광마존을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마교의 기세를 꺾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당사자인 천신우 입장에서도 실감이 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군.’
천신우의 시선이 광마존의 시체에 머물렀다.
광마존이 팔마존들 가운데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마교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천마 직속 고수들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정확한 분석은 어렵지만.’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성과였다.
그럼에도 천신우는 만족하지 않았다.
승천단의 부작용으로 탈진상태에 빠졌음에도 방금 전의 전투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서.
천신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 * *
멸악전단 단주 심인기가 지시를 내렸다.
“적은 여전히 투지를 잃지 않았다. 서두르지 말고 적의 목줄을 조이도록.”
전투는 이제 막바지였다.
여전히 소수의 마교 고수들이 격렬히 저항하고 있지만 오래 가지 못할 터였다.
전황을 지켜보는 심인기에게 북해빙궁 궁주가 다가왔다.
“본궁을 대표해 무림맹의 지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동맹과의 신의는 무림맹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 궁주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심인기의 대답엔 이번 전투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단순히 북해빙궁을 점령하고 못하고를 떠나 무림 전역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번 승리로 무림맹의 결속력은 한층 강해질 터였다.
반대로 한동안 승승장구하던 마교 입장에선 기세가 한풀 꺾일 테고.
“물론 가장 활약이 뛰어난 사람을 놔두고 본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
심인기의 시선이 천신우에게 머물렀다.
지금 천신우는 부축을 받아 후방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심인기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경이로운 시선으로 천신우를 응시했다.
“궁주께서도 최근 북방에서 악명을 떨치던 거인에 대해 들어보셨을 거요.”
궁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되고 나서 가장 유명세를 얻은 것이 바로 광마존이었다.
압도적인 무력과 잔인한 손속.
악인으로서 모든 것을 갖춘 그였다.
“그런 자를 쓰러뜨린 것이오. 불과 무림맹 2년차 신입이 말이오. 일찍이 전례가 없던 일. 아직 섣부른 예측일지 모르나.”
조심스러운 말투와 달리 천신우를 바라보는 심인기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오늘의 전투는 마교와의 전쟁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가능성이 높소.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난 이후엔.”
이어진 심인기의 말은 궁주의 생각과 일치했다.
“우리 모두 천씨세가의 시대를 살아가게 되겠지.”
분명 심인기의 말대로 섣부른 예측일지 모른다.
하지만 천신우의 지난 행보를 감안하면 터무니없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궁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천신우와 정략혼을 추진했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때 만일 혼담을 성사시켰다면…….
물론 아직 포기하긴 일렀다.
전투가 완전히 마무리되고 후속조치까지 단행한 궁주는 서둘러 천신우를 찾았다.
시녀들을 총동원해 꽃단장까지 하고서.
하지만 천신우는 북해빙궁 어디에도 없었다.
천씨세가를 대표해 북해빙궁에 남은 고진성만이 천신우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소가주께서는…….”
* * *
철혈성.
밀집한 수천 명의 마교 고수들을 향해 권왕이 쇄도했다.
콰앙!
권왕과 충돌한 마교 고수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추락했다.
바닥에 처박힌 그는 온몸의 뼈가 박살 난 채로 즉사했다.
마치 맹수와 같은 저돌적인 움직임에 마존들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처구니없는 놈이군.”
“저런 놈이 철혈성에 있었던가?”
혈마존과 살마존의 관심표명에 살천각주가 설명했다.
“놈의 이름은 권왕. 천씨세가 소속입니다.”
살천각은 마교 삼대살수조직 가운데 하나.
특히 그들은 전장에서 난전을 틈타 요인을 암살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권왕?”
“천씨세가라.”
관심을 보인 것도 잠시.
성향이 전혀 다른 혈마존과 살마존이지만 이번만큼은 의견을 함께 했다.
“우리까지 나설 필요 있겠나.”
그들은 권왕의 실력을 정확히 판단했다.
권왕의 무력은 분명 인상적이었지만 아직 마존들 수준엔 미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마존들이 직접 나서면 확실하게 권왕을 제압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러자니 철혈성주와 풍뢰권이 걸리는 게 사실이었다.
권왕 하나 때문에 절대강자들 앞에서 굳이 밑천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살마존이 입을 열었다.
“살천각주. 이번 기회에 자네 애들 실력 좀 보지.”
살천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살천각주가 눈짓하는 순간.
살천각의 살수들이 그림자처럼 전장으로 스며들었다.
* * *
“크헉!”
권왕의 돌진에 나가떨어진 마교 고수가 신음을 흘렸다.
단신으로 마교의 일차저지선을 뚫어내는 권왕의 모습은 보고도 믿기 힘든 것이었다.
이제는 누구도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든 권왕의 행동을 무모하다고 비웃지 않았다.
“위력적이군. 과감하기도 하고.”
신중한 철혈성주마저 이런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좋은 제자를 뒀군.”
풍뢰권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콧방귀를 끼는 풍뢰권이었다.
스승이나 제자나 솔직하지 못하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싸운다면 우리 쪽에서 도움을 주기 어렵네. 사람 하나 구하자고 수성의 이점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철혈성은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어지간한 고수들은 성벽을 넘을 수도 파괴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굳이 성문 밖으로 병력을 보내는 도박을 감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풍뢰권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제자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바로 그때였다.
“음!”
철혈성주가 침음을 내뱉었다.
전장에 합류하는 살수들의 기척을 감지한 것이다.
마교 살천각의 살수들이 아주 은밀하게 권왕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 * *
살천각은 전장에서 적의 중요인물을 암살하는 데 특화된 살수조직이었다.
분명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개인의 활약이 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
당장 지금만 보더라도 권왕의 난입으로 마교가 기선을 제압당한 상황.
살천각의 살수들은 권왕을 암살함으로써 전황을 바꿀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아주 신중하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동안 수십 명의 마교 고수들이 권왕의 주먹에 희생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정권에 진입한 살천각 살수들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시작한다.’
이미 수도 없이 호흡을 맞춰온 그들이었다.
실패할 걱정은 없었다.
물론 그건 그들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꽈앙!
은밀하게 권왕의 뒤로 접근하던 살천각 살수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
측면을 노리던 살수 둘은 각각 권왕의 양손에 늑골이 박살났다.
멀리서 지켜보던 살천각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건 마치 짐승 같지 않은가!’
권왕은 살수의 존재를 파악하고 대응한 것이 아니었다.
맹수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를 응징하는 것과 같았다.
권왕은 자신만의 영역을 설정해두고 그 안에 들어오는 마교 고수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살천각주는 불안감을 지우기 힘들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주력을 투입하여…….”
살천각주가 멈칫했다.
사실 마존들이 이만한 일에 경거망동할 리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만만한 표정은 뭐란 말인가.
살천각주의 마음속 의문을 읽기라도 했을까.
살마존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잠깐의 여흥일 뿐이네.”
혈마존이 덧붙였다.
“오히려 우리 입장에선 일이 쉽게 풀린 셈이지. 권왕이란 놈에게 전장의 시선이 모조리 쏠렸으니.”
“설마…….”
살천각주가 떠올린 것은 염마존의 존재였다.
마교의 무림침공 세부계획은 모두 염마존에 의해 짜여졌다.
그러니만큼 이번 철혈성 공략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아무리 본교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라지만 지나치게 정공법이라 의아했는데. 역시 염마존께선 다른 계책을 준비해두신 것인가.’
살천각주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염마존은 철혈성 공략을 위한 포석을 이미 깔아두었다.
염마존의 계책이 처음 시작된 곳은 바로 무신궁이 위치한 제7영역이었다.
* * *
제7영역.
무신궁 고수들이 커다란 장원을 에워쌌다.
순식간에 철통같은 포위망이 펼쳐졌다.
이곳이 마교의 근거지라는 첩보를 입수한 무신이 고수들을 급파한 것이다.
신호와 함께 무신궁 고수들이 장원 안으로 난입했다.
장원 곳곳에 숨어 있던 마교 고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차차차차창!
곧바로 사방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전황은 순조로웠다.
무신궁 무인들은 확실하면서도 신속하게 마교 고수들을 제압해나가고 있었다.
장원이 함락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
하지만 무신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상하군. 너무 순조로워.”
이미 여러 차례 마교를 상대했던 무신이다.
마교의 근거지 가운데 한곳이니만큼 고전을 예상했건만.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비명이 점점 잦아들었다.
마교 고수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쾅!
장원 외부를 장악한 무신궁 고수들이 문을 박살 내며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그곳에도 소수의 마교 고수들이 존재했다.
물론 그들만으로 전세를 뒤엎긴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마교 고수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최후의 일인이 쓰러질 때까지.
“과연 지독한 놈들이군.”
무신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마교 고수들의 저력은 대단했다.
“숫자가 비슷했다면 우리 쪽의 피해도 적잖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석연찮군. 어째서 병력이 이것뿐이지?”
분명 입수한 첩보에 따르면 이곳에 주둔한 마교의 인원은 훨씬 많았다.
더불어 그들은 독마존 휘하 병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모든 예상을 깨고 이곳엔 소수의 인원만이 주둔했던 것.
“확인해 보면 알겠지. 놈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샅샅이 수색하라!”
장원수색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침이 들려왔다.
“찾았습니다!”
무신궁의 고수들이 찾아낸 곳은 장원 지하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석굴이었다.
석굴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기에 무신이 앞장섰다.
무신은 언제나 위험한 일에 부하들을 앞세우는 법이 없었다.
과연 석굴 안엔 함정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무신은 거침없이 함정들을 돌파해 석굴 중심부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무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거대한 석벽이었다.
무신궁의 기술자가 석벽을 열어보려 했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다.
“물러서게.”
무신이 석벽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콰앙!
폭음과 함께 석벽이 허물어지며 석실 안의 광경이 펼쳐졌다.
“이런…….”
석실 내부를 확인한 무신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